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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 김지영 발레리나

불꽃같은 치열함이 창조의 에너지 발레밖에 모르는 바보, 몰입이 완벽을 낳다

신동엽 | 145호 (2014년 1월 Issue 2)

 

 

 

 

편집자주

모두가창조를 말하는 시대지만 정작 정확한 개념 정의도, 진정한 의미파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창조성에 대해 10여 년 전부터 연구해 온 신동엽 연세대 교수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진행한 각종 인터뷰와 연구결과 등을 토대로 ‘21세기 시대정신, ‘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전문가들에게 우리나라의 역대 남녀 발레무용가들 중 세계 정상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물으면 대부분 망설임 없이 김지영을 꼽는다. 전문가들은 김지영을 체격, 테크닉, 표현력, 예술성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완벽한 발레리나의 전형으로 극찬한다. 실제로도 세계 최고의 볼쇼이발레단 모스크바 공연에 주역으로 초청받을 정도로 국내외에서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평가받고 있다. 김지영의 창조적 예술관은춤바보라는 그녀의 별명에 함축돼 있다. 무대 위에서건 아래에서건 그녀에게서 발레 이외의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우아하고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며 손짓과 표정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품격이 넘친다. 김지영의 삶이 바로 발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는 물론 무대 아래에서도 항상 세계 최고의 프리마1 발레리나로 살아간다. 김지영에게 발레란 생계나 명성과는 아무 상관 없다. 그녀는 세속적 영역에 대해서는 무지에 가까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김지영이 무대에 설 때마다 역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변신해 관객들을 무아지경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은 그녀 자신이 발레에 완전히 도취돼 있기 때문이다. 김지영은 발레에 관한 한 만족을 모른다. 그녀가 전성기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다.

 

여유와 느슨함이 창조를 낳는다는 착각: 치열한 몰입이 정답!

 

최근 창조성이 전 세계적 화두가 되면서 창조와 혁신에 관한 저작물들이 넘쳐나고 있다. 창조성의 원리에 관한 무수한 주장들 중 필자가 자주 접하는 것은 새벽부터 밤까지 숨쉴 틈 없이 근면하게 일해야 하는 산업사회의 근로자들과 달리 창조적 혁신은 느슨함과 여유로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적 혁신을 위해서는 산업사회형 기업들처럼열심히 일할 것(Work Hard)’이 아니라약삭빠르게 일할 것(Work Smart)’을 권하기도 한다. 20세기 산업사회형 기업의 구성원들처럼 치밀하게 설계된 시스템과 직무구조에 따라 자기가 맡은 일과 자신의 강점에 선택·집중하는 전문화와 분업의 덫에 빠지지 말라고도 경고한다. 경계를 넘어 다양한 새로운 분야를 과감하게 탐험하는 것이 창조적 혁신의 필수 조건이라는 주장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모두 구체적, 논리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과도하게 치밀한 통제관리 시스템을 가진 조직에서는 창조적 아이디어를 실험해볼 시간적 여유와 자율성 자체가 없기 때문에 혁신이 창출되기 어렵다. 따라서 구글이나 3M 등 혁신을 강조하는 기업들은 ‘28 법칙과 같이 아예 업무 시간 중 일부를 창조적 활동에 강제적으로 할당하는 방법도 쓴다. 또한 혁신연구의 원조격인 슘페터가 주장했듯이 대부분의 창조적 혁신은 전혀 존재하지 않던 완전히 새로운 지식이나 아이디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경계들에 의해 서로 분리돼 있던 다양한 기존 지식과 아이디어들이 경계를 넘어 새로운 방식으로 재결합 하는 데서 혁신이 창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각자 자신만의 기존 영역의 틀 안에 갇혀 기존에 해오던 일을 같은 방식대로 끊임없이 반복만 하는 조직에서 창조적 혁신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지니는 위험성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칫 21세기에 필요한 창조적 혁신을 위해서는 여유 있고 느슨한 생활태도를 가지고 전혀 다른 다양한 분야들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식의 오해를 낳을 수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아니 가장 위험한 오해다. 필자가 지난 3년간에 걸쳐 동료 학자들과 함께 <창조성의 원천>이라는 책을 집필하기 위해 인터뷰한 20여 명의 세계적 예술가들의 가장 명확한 공통점은 치열한 몰입이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이 창조적 예술가들은 일생을 창조적 예술에만 치열하게 몰입하는 불꽃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예술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도 없으며 휴식이나 여가도 즐길 줄 모르고 자나깨나 예술만을 생각하는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예술에만 완전히 몰입한 결과, 삶과 예술이 구분되지 않고 365 24시간 완전히 예술에 도취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언뜻 바보스러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창조적 바보스러움이 창조적 예술의 가장 중요한 힘이자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었다.그중에서도 특히 불꽃 같은 치열함의 정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사람이 바로 춤에만 완전히 몰입해서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바보에 가까웠던, 그래서춤바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 세계적 발레리나 김지영이다. 완벽한 발레리나로 불리는 김지영을 심층적으로 분석해봄으로써 예술에만 온 몸과 마음을 바치는 치열한 몰입이 어떻게 창조적 혁신을 낳느냐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김지영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그녀는 예원학교 재학 중 14살의 어린 나이에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세계적 발레학교인 키로프발레단 부설 바가노바 발레학교를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다. 1997 18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립발레단 무용수로 입단해 주역을 도맡아 연기했다. 스타 무용수로 이름을 날리던 2002, 돌연 네덜란드로 건너가 8년간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 수석 무용수로 춤추다가 2009년 다시친정같은 한국 국립발레단으로 돌아왔다. 아름다운 신체 조건, 훌륭한 테크닉, 거기다 예술성까지 겸비한 김지영은 현재 국립발레단을 대표하는 수석 무용수가 됐다. 대다수 무용수들이 발레보다 신체적 부담이 적은 다른 분야들로 옮겨가거나 심지어 은퇴를 고려하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오히려 점점 더 기량이 급성장했다. 초인적 테크닉과 체력을 요구하는 클래식 발레 레퍼토리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 국내외 전문가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완벽한 발레리나 김지영의 예술 창조성을 찾아서

 

2001년 국립발레단은 클래식 발레의 대표작백조의 호수를 무대에 올렸다. 당대 세계 최고의 안무가이자 볼쇼이발레단의 전설인 유리 그리가로비치 버전의 한국 초연이었다. 가녀리고 섬세하며 청순한 백조 오데트와 대담하게 왕자를 유혹하는 요염한 흑조 오딜. 상반된 두 캐릭터를 수시로 오가며 화려한 테크닉과 우아한 디테일까지 모두 소화해야 하는백조의 호수는 프리마 발레리나의 궁극적 도전 과제와도 같은 작품이다. 20세를 갓 넘긴 한 발레리나가 무대에 섰다. 관객들은 신이 내린 완벽한 신체와 그 신체를 바탕으로 펼치는 고난도의 테크닉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그녀에게 반했다. 또 예술적 표현력마저 겸비한 이 신인 발레리나에 열광하고 세계적 무용수의 출현을 축하했다.

 

2011, 국립발레단은 다시백조의 호수를 무대에 올렸다. 역시 유리 그리고로비치 버전이었다. 그리고 10년 전 무대에 섰던 바로 그 무용수가 오데트와 오딜을 연기했다. 관객들은 또다시 열광했다. 그녀의 뛰어난 테크닉과 정확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음악과의 조화, 섬세한 손 끝의 표현, 오데트와 오딜의 양면성과 내적 갈등에 대한 깊은 정서적 이해 수준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 세계 다른 어느 발레리나와도 다른 자기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력이 관객을 전율케 했다. 그녀가 신들린 듯한 기량으로 연기한 백조와 흑조는 오히려 그전보다 훨씬 더 깊어졌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완벽함 그 자체였다.

 

2001년에도, 그리고 10년 후 2011년에도 관객을 완전히 홀린 이 발레리나가 바로 전문가들이 모든 면에서 가장 완벽한 발레리나로 평가하는 김지영이다. 이 시대 최고의 발레리나 김지영의 예술 창조성의 원천을 알아보기 위해 무대 위에서뿐만 아니라 무대 아래에서도 당당하고 우아하며 솔직하고 거침없는 그녀를 만났다.

 

 

재능이 창조적 열정으로 점화되려면 좋은 스승이 필요하다

 

김지영이 처음 발레를 접한 것은 10세 무렵이다. 발레를 배운 한 친구가 학교 교실 뒤에서 스트레칭하는 모습을 보고 단숨에 발레에 빠져들었다. 한번 원한 것은 꼭 시도해 보고야 마는 성격이었던 어린 김지영은 어머니를 조르다 못해 스스로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혼자 뒤적여 무용학원 전화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어린 김지영의 발레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정을 보다 못한 어머니는 지인을 통해 발레학원을 한 곳 소개받았다. 김지영은 첫 수업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학원 연습실 뒤쪽에 서서 기존 수강생들의 동작을 한번 따라 해보라는 선생님 말씀에 처음 보는 동작을 너무나도 쉽게 소화한 것이다. 그녀는 돌이켜보면 움직임을 잘 포착해 모방하는 타고난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제가 어느 기사에서 봤는데 악기나 몸을 움직이는 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부분이 있대요. 뇌 신경의 어느 부분이 발달되면 몸을 움직이는 것과 관련된 능력을 타고난대요. 타고난 부분이 제게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동작을 봤을 때 그걸 빨리 캐치해요. 어렸을 적에 수영도 배우지 않았는데 그냥 혼자 했고요, 스케이트도 배우지 않았는데 혼자 탔어요. 그러니까 뭔가가 있었나 봐요. 움직임에 대해서.”

 

발레를 처음 접한 날 들었던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김지영을 춤에 완전히 빠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36세에 낳은 막내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관심은 자연히 7∼8세 차이가 나는 언니와 오빠의 입시 준비에 집중돼 있었다. 발레학원에서 받은 칭찬과 관심,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다는 느낌, 그리고 무엇보다 춤출 때의 즐거움은 김지영이발레에 목숨 걸이유가 됐다.

 

발레의 매력과될 성 싶은 나무를 알아본 좋은 스승의 칭찬, 인정받는 뿌듯함에 사로잡힌 김지영은 학교가 끝나면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학원에서 발레를 배우고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김지영을 발레의 길로 인도했던 사람. 첫 스승은한국 발레의 숨은 공신이라 불리는 진수인이다. 진수인은 20세기 중반 발레 불모지와 다름없던 우리나라에 발레의 전문화와 정착을 위해 노력했던 진수방의 조카다. 20∼30대에 국립발레단과 임성남발레연구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던 진수인은 발레를 정확하고 과학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1982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뉴욕무용전문학교에서 4년간 수학했다. 귀국 후에는 무용 상해나 해부학 등 유학시절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학생들 개개인의 몸의 특성을 파악해 가장 적합한 방법을 알려주는 교육방식으로 제자들을 육성했다. 당시 무용계의 분위기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무용 전공으로 대학 학위가 없는 사람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는 없었으나 재야의 진정한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우연히 지인을 통해 입소문을 듣고 찾아간 학원에서 김지영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발레를 배울 수 있는 국내 최고의 스승을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진수인의 교육 방식은 학생들이 고통스럽지 않게, 그러나 빠르게 실력 향상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유명했다. 김지영에게는 이 학원에서 기초를 꼼꼼하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큰 자산이 됐다.

 

“그 당시에 기초를 잘 가르치는 분이 없었거든요. 요즘이야 많이 좋아져서 기초의 중요성을 많이들 인식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달랐어요. 콩쿠르를 나갔는데 어린 아이들이 어른 작품과 어른 테크닉을 하더라고요. 그런 것들은 어린 아이들에게 시키면 할 수는 있지만 라인이나 다리가 망가져요. 저희 선생님은 그런 것들을 절대 못 하게 하셨어요. ‘두 바퀴 이상 돌지 마. 한 바퀴 돌고 서 있어라고 말씀했어요. 다른 학원에서는 세 바퀴 돌게 했었거든요.”

 

진수인의 발레학원에는 또 하나의 특별한 점이 있었다. 진수인 스스로가 한국 발레의 주요 인물들에게 배우고 해외에서 수학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주요 무용수들이나 외국에서 온 무용수 및 교육자들을 학원으로 초청해 학생들에게 이들을 보고 배울 기회를 줬던 것이다. 진수인은 한마디로 국내외 무용계의 주요 인사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허브(hub)였다.

 

‘어린 나이에 발레에 완전히 꽂혀버린김지영의 성화에 못 이겨 그녀의 어머니가 마지못해 데려간 발레학원은 김지영이라는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를 탄생시켰다. 차근차근 기초를 쌓게 하는 수업과 학생 개인의 신체에 맞춘 교육 방식은 김지영이 훌륭한 테크닉과 완벽한 몸을 갖게 된 초석이었다. 또 다양한 선배 예술가와 훌륭한 선생님들이 가르치고 배우며 다양한 지도자들의 장점을 편식 없이 골고루 습득할 수 있었다. 글로벌 발레계와 끊임없이 교류했던 이곳의 열린 분위기는 김지영이 발레 지도의 변방이었던 한국을 벗어나 세계 발레계의 중심에서 공부하고 인정받겠다는 꿈을 품게 했다.

 

성공에 안주 않는 끝없는 도전정신이 창조성의 원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계획 없이 무작정 모험에 몸을 던졌다

 

진수인의 학원에서 발레의 세계에 눈을 뜬 김지영은 예원학교에 진학하면서 일찌감치 선생님들과 발레계 리더들로부터 촉망받는 엘리트 학생이었다. 그러나 김지영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는 모험가였다. 그녀의 발레 경력을 살펴보면 무모하리만큼 계산 없이 가슴과 열정이 이끄는 대로 과감하게 일을 저질러버리는 도전정신이 돋보인다. 러시아 발레 유학의 선택이나 발레학교 졸업 후 한국의 국립발레단에서 커리어를 쌓는 과정, 그리고 국내에서의 명성과 지위를 모두 버리고 다시 해외로 떠나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으로 옮겨 새로운 환경에서 자리매김하겠다는 결단은 전후좌우 계산하지 않고 마음이 이끄는 곳에 몸을 던져 흠뻑 빠져 보는 모험의 여정이었다.

 

모험 1. 키로프발레단에 매혹돼 미국에서 미지의 러시아 바가노바로

 

김지영에게 발레 유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예원중학교와 예고를 졸업한 후 이화여대에서 수학하는 것이 최고의 엘리트 코스라는 당시의 통념과는 달리 김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인생에 예고와 이화여대는 없다고 생각했다. 예원, 유학, 그리고 발레단이라는 파격적인 진로를 10세를 갓 넘은 어린 학생이 꿈꿀 수 있었던 것은 진수인 선생님과 학원 분위기의 영향이 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세뇌 당하다시피유학을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외국 선생님이 내한할 때마다 학원에 초청해 연수를 받았고 방학마다 해외 연수프로그램에 보내진 것이다.

 

‘유학’을 떠나겠다는 막연한 꿈은 주위 환경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지만 실제로 유학을 감행한 결단과 구체적인 사항들의 선택은 어린 예술가의 카리스마적인 결정에 의해 틀이 잡혔다. 10대 초반 어린 소녀는 우리나라와 교류가 활발하고 유학생들도 많았던 미국의 명문 발레학교들 중 한 곳으로 진학을 추진했다. 그런데 우연한 사건으로 미국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던 유학 계획을 어느 날 갑자기 뒤집는다. 우리나라와 국교가 정상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유학생이나 교민들도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얼마 전까지 공산권의 종주국이어서 문화와 제도도 완전히 다른 미지의 러시아로 방향을 선회한다. 비디오 테이프를 통해 본 키로프발레단의 움직임이 김지영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이다.

 

“중1 여름방학에 미국에 한 달 동안 연수를 갔다 왔어요. 그래서 중2 때 미국으로 가는 걸로 유학을 거의 다 만들어 놓은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1991, 그러니까 중1 겨울에 바가노바 발레학교에서 러시아 선생님이 오셔서 처음으로 연수를 받게 됐어요. 당시 키로프발레단에 대해선 한국에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거든요. 그 선생님이 키로프발레단 비디오를 갖고 오셔서 그걸 보게 됐죠. 그런데 그 사람들은 다른 거예요! 그 이전에 미국 발레, 영국 로열 발레, 파리 오페라 발레도 많이 봤는데 키로프는 상체 쓰임이 아주 다르더라고요. 볼쇼이와도 다르고. 제가 보기엔 정말 많이 달랐어요. 그 비디오를 보고 바가노바 발레학교로 유학을 결정했어요. 당시에 키로프발레단의 스타일이 어떤 것이라고 정확히 알거나 말로 규정하지는 못했지만 너무나 색다른 거예요. 러시아 발레의 상체 움직임 같은 것들이 다른 발레단에 비해서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이고 뭔가 배울 게 있어 보였어요.”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던 김지영에게 키로프발레단의 춤은 새롭고 신비한 미지의 세계로 다가왔다. 김지영은무언가에 이끌리듯이중학교 3학년에 키로프발레단의 유관 발레학교인 바가노바로 유학을 떠난다. 보통 외국인은 16세부터 입학 허가를 내 주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김지영은 이례적으로 14세의 나이로 바가노바 발레학교에 입학했다.

 

러시아 유학은 김지영이 세계적 발레리나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 기반을 모두 배운 시기였다. 잘 짜인 커리큘럼을 바탕으로 발레의 기본, 전통, 테크닉, 음악이나 미술 등 관련 예술 분야 등에 관해 배웠음은 물론 유서 깊은 명문 학교의 분위기 그 자체로부터 무용수의 몸가짐이나 정서 등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까지 체득했다.

 

이름 없는 변방 국가였던 한국에서 발레계의 중심부 러시아로 날아간 김지영에게 가장 먼저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엄청난 훈련량이었다. 수업의 3분의 1 정도만 지나도 하늘이 노랗고 별이 보일 정도의 하드 트레이닝이 계속됐다. 10대 아이들 수백 명이 이런 훈련을 매일같이 받아왔다는 사실도 매우 놀라웠다.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 재능을 차근차근 다듬어야 무대에서 정확성과 우아함을 보여줄 수 있기에 발레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러나 김지영에게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테크닉 수업이나 학과 수업같이 쉽게 드러나는 외적인 것들보다 학교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행동 등 보다 섬세한 부분이다. 수백 명의 발레하는 아이들이 머리를 올리고 돌아다니다가 지나가는 선생님들을 마주치면 우아하고 당당하게 발레 인사를 하는 분위기는 엄격한 선후배 관계 속에서 배꼽인사를 하던 예원학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공연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데 비해 러시아에서는 발레학교 학생들은 마린스키 공연장에서 무료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언제든 원하는 때에 공연장에 가서 보고 들으며 관객들이나 공연 무용수들의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린스키 공연장을 호령하던 무용 선생님들의 분위기, 자세나 손짓 등을 배울 수 있었던 점 역시 김지영이 꼽은 바가노바 발레학교의 매력이다.

 

학교의 분위기나 사람들로부터 전해지는 느낌과 분위기가 중요한 이유는 발레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김지영은 인간문화재가 계보를 통해 선생님으로부터 사사하는 것과 발레를 배우는 것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음악은 악보가 남고 미술은 작품이 남지만 무용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무보는 그 작품의 정수를 담을 수 없다. 사람으로 인해 남겨지고 사람을 통해 이어지는 예술이 무용이다. 바가노바 발레학교 유학이 김지영의 예술인생에서 중요한 이유는 발레 기초와 테크닉을 닦을 수 있었던 기회인 동시에 250년 이상 사람을 통해 이어온 발레의 전통과 정조가 몸 속에 스며들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험 2. 러시아의 기회를 거부하고 발레 미개척지 한국의 국립발레단으로 귀환

 

어린 나이에 홀로 타지에서 유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아침, 저녁은 직접 해 먹어야 했고 겨울 한 달 동안은 온수가 끊기는데 세탁기가 없어 손빨래를 해야 했다. 한국에서 충실히 기본기를 쌓아서 유학길에 올랐지만 바가노바의 동급생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기량을 뽐냈다. 졸업 공연에서는 부분 장면 주역을 따낼 정도로 성장했지만 무용 자체에 몰입하거나 원대한 목표를 위해 정진했다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잘 해내는 것이 우선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김지영의 발레 인생을 또 한번 세차게 흔들어 놓는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났다. 졸업 공연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이다.

 

“처음 러시아에서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하루하루 지내는 게 목적이었어요. 사실 마지막 졸업 공연할 때만 해도 제가 무용을 사랑한다거나 하는 마음가짐은 없었어요.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제가 이렇게 바뀐 거예요. ‘내가 이걸 해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엄마가 제 졸업 공연 때 돌아가셨는데 엄마는 제 성공을 보고 싶었던 거니까, 그건 정말 이뤄내야 하잖아요. 사람을 변화시킬 만한 큰 이유가 될 수밖에요.”

 

예정돼 있던 러시아 발레단의 입단을 취소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지영은 예원학교 재학 시절 진수인 발레학원에서 인연이 닿았던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을 만나 18세의 나이로 국립발레단에 최연소 입단했다. 1997년 입단 후, ‘해설이 있는 발레에서파키타의 주역을 맡아 춤췄다. ‘해설이 있는 발레는 최태지 단장이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많이 만들어줘 현장 경험을 쌓도록, 그리고 예술적으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무료 발레 공연 프로그램이다. 김지영은 파트너였던 김용걸과 함께 1회 공연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발레 스타로 떠올랐다. 김지영은 당시 국립발레단의 선배들을 제치고 선 자리이기에 더 잘했어야 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서는 무대라 각오가 남달랐다고 회상한다. 몇 달 뒤, ‘노틀담의 꼽추주역으로 전막 공연에 주역 데뷔했다. 강수진이 첫 번째 공연의 주역이었고, 김지영은 세 번째 공연의 주역을 맡았다. 그 무렵, 김지영 이외에도 김용걸, 김주원, 이원국 등 걸출한 무용수들이 국립발레단에 입단했고 서로 경쟁하고 배우면서 기량과 예술성을 향상하며 스타 무용수로 성장했다.

 

모험 3. 국내 최고 스타의 현재를 버리고 세계 정상의 유럽 무대에 도전

 

국립발레단에서 활동하는 동안 최태지 단장이 볼쇼이나 몬테카를로 발레단과 같은 세계적 발레단에서 작품을 가져오기도 하고, 외국 안무가들이 한국에 들어와 지도하기도하고, 또 직접 콩쿠르에 나가기도 하면서 김지영은 유럽 발레를 접하게 됐고 점차 유럽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국내 무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정신 없이 춤만 췄어요. 그런데 콩쿠르도 나가고 외국 안무가들도 들어오게 되면서 유럽 발레에 대해서 알게 된 거예요. 알게 되면서 궁금해지는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아서 외국 발레라는 게 생소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국립발레단 각 개인 무용수 스타 시스템이 생겨나면서 몇 명의 무용수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나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던 시기지 시스템 면에서는 발전이 안 된 상태였어요. 예를 들면 예전에 국립발레단이 국립 극장에 있던 시절에는 발레 무용수 외에 오피스에서 무용 담당하시는 분이 한 분 계셨고, 의상 담당하시는 분도 한 분 계셨어요. 그분이 의상 제작하는 것도 아니고 관리만 하시는 거였죠. 지방 공연 가게 되면 우리가 직접 의상 매고 가고 스케줄 다 만들고, 완전 유랑극단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외국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좋은 시스템에서 춤추고도 싶었어요. 국내에서는 여러 레퍼토리를 접해볼 기회도 제한돼 있었고요. 새로운 작업을 할 수도 없었어요.”

 

국내 무대에서 최고의 프리마 발레리나로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고 해외의 콩쿠르를 섭렵했던 김지영이었지만 발레의 발원지이자 중심지인 유럽에서 한국은 여전히 발레 지도 변방의 조그만 나라에 불과했다. 외국의 여러 발레단에 자료를 보냈지만 유럽 사람들은 김지영의 자료를 보지도 않고 폐기하기 일쑤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콩쿠르에서 수상했다는 사실은 외국 발레단에 입단하는 데 큰 영향을 주는 요소가 아니었다. 해외 유수 발레단에서 매년 새로운 단원을 뽑는 수보다 매년 열리는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뿐만 아니라 명문 발레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콩쿠르에 잘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콩쿠르라는 제도가 갖는 영향력이 크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파리 오페라 발레학교에서 춤을 잘 춘다고 인정받는 학생들은 자연스레 파리 오페라에 입단하게 되는 식이다. 게다가 한국은 당시만 하더라도 외국에서 이름조차 생소한 국가였다. 한국 국립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라고 해도 믿을 만한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에 머물며 비디오와 자료를 보내는 것만으로 외국 발레단에 입단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 선 김지영은 과감하게 5년간 몸담았던 국립발레단에 사표를 제출한다. 국내에서의 화려한 타이틀, 스타 발레리나로서 누리던 인기와 영광, 쌓아놓은 지위를 모두 버리고 해외로 나가 직접 부딪히며 무명의 무용수와 같은 위치에서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었고 언제쯤 입단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매우 불확실한 상황에서 유럽 발레를 향한 열망을 이루기 위해 김지영은 특유의 모험가적 기질을 발휘하며 새로운 환경에 몸을 던졌다.

 

“사표를 먼저 냈어요.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채로 일단 사표부터 냈어요. 그래서 반 년 동안 백수였어요. 사표를 내지 않고는 제가 외국을 나가서 뭔가 하지 않을 거 같은 거예요. 그리고 그해 1월에 오디션 보러 가겠다는 메일을 다 쓴 거죠. 영국 로열 발레 같은 곳은 콧방귀도 안 뀌더라고요. 유럽 사람이 아니라면서 거절했어요. 그러다가 네덜란드를 가 본 거예요. 오디션 보러 가겠다고 했더니 와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정말 아무런 지식도 없이 갔어요. 그곳 단장 이름만 힐끗 보고는누구지? 모르는 사람이네하면서 갔어요. 거기는 정기적으로 오픈 오디션을 하는 곳이 아니라서 프라이빗 오디션으로 진행됐어요. 단원들과 함께 클래스를 하는 거죠. 그걸 보고 입단 결정을 하는 거예요. 저를 오디션에 부를 때는 아예 제가 기대를 못하도록 하더라고요. 이미 자리가 꽉 차서 입단하기에는 어려울 텐데 그래도 와서 오디션이라도 해 보려면 해 보라는 식이었어요. 그전에 워낙 여기저기서 험한 꼴을 당했으니까여기도 아니겠구나’ 했는데, 오디션에서 단장이 저를 너무 잘 본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가 한국에서 발레 비디오로 보곤 했던 영국 로열 발레의 유명한 주역 무용수였더라고요. 웨인 이글링이라는 정말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그분이 이미 자리가 꽉 차기는 했지만 네가 마음에 드니까 자리를 만들겠다면서 수석 무용수 자리는 못 주지만 그 아래를 주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김지영은 2002년부터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은 네오 클래식 작품들로 유명한 다국적 발레단이다. 그 당시만 해도 한 프랑스 무용수는한국에도 발레가 있느냐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유럽인들에게는 한국 발레가 생소했고 동양인에 대한 선입견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영은 승승장구했다. ‘가장 낮은 등급인 코르 드 발레 자리를 줘도 좋다, 그렇게 시작해도 결국은 인정받아서 높은 등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디션을 보러 간 그녀에게 웨인 이글링은 그랑 쉬제라는 3등급을 제안했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은 새로운 무용수에게 바로 주역급을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파격 대우에 모두들 놀랐다. 입단하자마자 동료 무용수의 소개로 러시아에 초청 무용수로 가서 공연하기도 했다. 모험가 김지영 앞에 꿈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련에도 좌절 않는 불굴의 예술혼이 창조성의 필수조건:

나는 발레에게 간택 당했다.”

 

발레에꽂혀발레가 이끄는 곳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든 김지영에게도 예외 없이 슬럼프가 찾아왔다. 네덜란드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바로 그해에 큰 부상을 당한 것이다. 쿠바에서 열릴 돈키호테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돼 연습하던 중 공연을 불과 10일 앞두고 발목을 다쳤다. 다친 후 4개월 동안은 아예 무용을 하지 못했다. 한 달 이상 무용을 쉬어 본 경험이 없었던 탓에 쉬는 방법도 잘 몰랐다. 무작정 4개월을 쉬고 나니 다시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 마치 무용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너무나 쉽게 하던 동작들이 잘 안 되자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 우울했고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슬럼프가 처음은 아니었다. 첫 번째 슬럼프는 러시아 유학을 떠난 지 2년쯤 후에 찾아왔다. 한국에서는 발레만이 행복을 줄 수 있고 발레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져 유학을 떠났는데 햇빛이 들지 않는 우울한 방에서 홀로 생활하다 보니 발레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거기서 오는 실망감과 절망감이 컸다. 사춘기 소녀에게 생애 첫 슬럼프가 찾아왔던 것이다. 두 번째로 찾아온 네덜란드에서의 슬럼프는 더욱 충격이 컸다. 어릴 적에 이미 잘 이겨낸 경험이 있기에 그 후로는 어떤 고난이 와도 잘 해낼 수 있을 줄로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다친 발목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2004년 발레단 의사의 권유로 수술을 했다. 수술 후 재활을 하면서 점차 본래의 컨디션을 찾았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무용수이다 보니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매우 우울해지고 절망감을 느꼈던 것이다. 김지영은 가끔 휴가를 받아 쉴 때도 무용 외에 다른 것들 하면서 즐겁게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좀 우울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가 발레단에 나와 움직이고 땀을 흘리면 우울한 기분이 사라진다.

 

길고 지독한 슬럼프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회의와 이쯤에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동반한다. 김지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번의 슬럼프를 겪으며발레를 그만둘까라는 고민을 했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이유가 김지영으로 하여금 춤추는 일을 그만 둘 수 없게 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발레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관둘 수가 없었다.

 

“크게 보자면 저는 발레한테 간택 당한 것 같아요. 그래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냥 좋아서 시작했고 그 뒤로는 하나님이 맛있는 거 주면서 꼬인 것 같아요. 그만 두려고 해도 저는 그만한 용기가 없었어요. ‘그만 두면 뭐하지? 나 이거밖에 안 해봤는데?’ 그만한 용기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물론 제가 있는 자리라는 게 있으니 사람들 눈이 신경 쓰이는 점도 있었고, 심지어 저희 언니가 우스갯소리로지영아, 너 지금 발레 관두면 시집도 못 가라고 하기도 했었고요. 또 이걸 해야 한 달마다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데 그것도 걸리고요.

 

그런데요, 제가 이렇게 핑계를 대지만 결국에는 좋아서 안 떠나는 거예요. 제가 살면서 행복을 느끼고 슬프고 힘들고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 발레 때문이었어요. 아직까지는 제 일 때문에 감정 상태가 많이 좌지우지돼요. 발레가 제게는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무대에 서서 춤을 출 때 갖는 그 어떤 행복감, 그게 가장 강렬한 것 같아요. 아쉽도록 짧지만 강렬한, 행복감이 있어요.”

 

10세에 친구가 하는 발레 동작을 보고 막연히 좋아서 시작하게 된 발레. 그리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러시아 바가노바로, 한국 국립발레단으로, 다시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으로 이어진 김지영 발레 여정 각 단계는 세계적 발레리나에게 필요한 다양한 역량과 자양분을 제공했다. 진수인의 발레학원에서 자신의 몸에 맞는 탄탄한 기본기 교육과 넓은 시야를, 바가노바 발레학교에서는 무용수로서 알아야 할 모든 지식과 가져야 할 기본적인 몸가짐을 배웠다. 국립발레단에서는 신인 무용수로서 이례적으로 주역 무용수로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할 기회를 가졌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는 유럽 발레를 익힐 수 있었고 다양한 해외 무대에 초청돼 세계 정상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각 단계에 진입하는 중요한 의사결정은 치밀한 계산이나 계획에 의해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김지영은 친구처럼 발레를 하고 싶어서, 선생님의 칭찬을 더 많이 받고 싶은 마음에, 키로프 발레단 비디오에 나온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좋아서,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귀동냥 눈동냥으로 알게 된 유럽 발레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 ‘끌림에 의한 직관적 의사결정을 내리고 새로운 둥지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며 노력하다 보니 발레의 간택을 받은 것처럼 세계적 수준의 무용수가 된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예술이 그러하듯 김지영의 발레 인생도 치밀한 계획과 계산이 아닌 자신의 열정이 이끄는 대로 과감하게 행동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탐색하는 모험정신에 의해 진화해온 것이다.

 

끝없는 완벽에의 열망: “나는 전성기라는 말이 제일 싫다

 

김지영은 수술 이후 부상을 딛고 일어나 유럽 무대를 주름잡았다. 2007년에는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의에투왈(수석 무용수)’로 승격됐다. 그러던 중 2009년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생활을 정리하고 국내 무대에 복귀했다. 십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자신을 수석 발레리나로 임명해줬던 친정과도 같은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지 8년째에 한국 국립발레단 최태지 단장이 복귀를 제안했고 마침 집에 도둑이 들어 혼났는데 잘됐다 싶어 귀국했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의 객원 주역 자리를 겸할 수 있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기량이나 음악적 해석력, 표현력 등에서 최고조에 오르고 있다는 평가를 받던 김지영이 국내 무대에 돌아왔다는 사실 그 자체로 국내 발레계는 들썩였다.

 

복귀 후, 김지영은 국내 무대에서 주역 무용수로서 레퍼토리를 가리지 않고 세계 최고 수준의 기량을 선보이며 맹활약했고 해외 무용단이나 예술가들과의 협업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드라마 발레차이코프스키’, 한국 창작 발레왕자 호동’, 롤랑 프티의카르멘’, 발레리나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해 보여주는빈사의 백조’, 프랑스 안무가 파트리스 바르가 직접 한국에 와 안무 지도를 맡아 협업했던지젤’, 클래식 발레의 정수백조의 호수’, 연말 공연의 대표작호두까기인형’, 마이요 안무의 모던 발레로미오와 줄리엣등으로 국내 무대에 섰다. 또 댄스스포츠 국가대표 박지우와 함께라틴 이노베이션, 유니버설발레단 출신 임혜경, 네덜란드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출신 김세연과 함께 컨템퍼러리발레플라잉 레슨을 올리기도 했다.

 

국내 무대에서의 활약도 대단했지만 해외 초청 공연을 통해 한국 발레가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기쁨을 누린 것도 대단한 성과다. 김지영은 2010년 로마 오페라발레단의돈키호테에서 주역키트리역으로 초청됐으며 2011 5월 이탈리아의 티아트로 디 마시모 극장의 발레 공연신데렐라에서 신데렐라 역할의 객원무용수로 초청되기도 했다. 또한 2012 12월에는 볼쇼이발레단 초청으로 러시아에서 국립발레단 무용수 이동훈과 듀엣으로스파르타쿠스주역을 맡아 춤췄다. 한국 무대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를 해외 무용단들이 초청해 협연한다는 것은 높아진 한국 발레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지영은 세계 최고 발레단인 볼쇼이에서스파르타쿠스의 오리지널 안무가인 유리 그리가로비치가 예술감독으로 직접 무대에 올린 공연에서 현지 전문가들의 극찬을 받는 쾌거도 이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발레계의 변방이던 우리나라 발레단의 발레리나가 세계 최고 발레단의 객원 수석으로 초청받아 최고의 평가를 받는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다.

 

세계 정상급의 발레리나들도 원숙해지기는 하지만 체력이나 테크닉 면에서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든 김지영은 놀랍게도 모든 면에서 더 가파르게 향상되고 있다. 그녀의 턴이나 점프는 어느 누구보다 더 날렵하고 높다. 주위에서는 마치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다고 한다. 심지어 어느 발레계 인사는 지금 추세라면 대다수의 동년배 발레리나들이 은퇴하거나 부담이 적은 다른 분야에 전환한 뒤에도 김지영은 여전히 발레 핵심 레퍼토리들의 주역 발레리나로 무대에서 맹활약할 수 있을 것 같다고까지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김지영이 30대 중반에 가까워지면서 테크닉과 예술적 표현력 등 모든 면에서 드디어 최정점에 이르렀다고 극찬한다.

 

그러나 정작 김지영 본인은 아직 자신의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주위에서잘한다고 칭찬하는 것을 아무리 들어도 여전히 자신의 춤이 성에 안 찬다는 것이다. 때로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부끄러울 정도로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 자신의 무대를 비디오로 보고 크게 실망할 때도 있다. 그래서 김지영은 앞으로도 자신의 춤에 발전이 있기를 희망한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했기에 그 점들을 계속 보완해 최고의 무대를 향해 나아 가고 싶다는 것이다.

 

주위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만족을 모르는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전성기 혹은 정상이라면 더 이상 나아질 수는 없고 앞으로 내려갈 일만 남아 있는 것 아닌가? 나의 최고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테크닉과 예술적 깊이를 겸비한 완벽한 발레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의 창조적 춤을 찾아서

 

화려하게 국립발레단에 복귀해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지영에 대해 평단은 워낙 테크닉이 뛰어난 발레리나였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며 음악에 대한 해석력이나 표현력까지 좋아져 세계 최정상급의 무용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한다. 사실 김지영은 예전에 평론가들이나 언론이 본인의 춤에 대해 테크닉이 뛰어나나 상대적으로 연기력이 약하다고 규정하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작품, 역할, 곡의 해석에 있어서 훨씬 깊어지고 자유로워진 자신을 발견했다. 김지영은 예전엔 스스로의 춤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상태로 무대에 섰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게도 그런 느낌이 전해졌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자신의 표현을 사람들이맞다고 인정해줄지, 예쁘게 봐 줄 것인지를 먼저 생각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보는 이의 눈을 의식하다 보니 자신을 100% 보여줄 수 없었고 표현과 의도가 관객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술에 정답은 없고 자신이 내면에서 끄집어내 표현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아름다운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춤추는 자신을 믿고 순간에 집중해야 관객도 몰입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돌아보면 지금에 비해 어렸을 때에는 동작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소화해 내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감정을 충분히 담는다는 것이 어려웠다.

 

김지영은 나이가 들며 더 성숙해지고 더 나은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서른을 넘으면서 발레가 달리 보였다고 했다. 20대에는 힘밖에 없었고 스텝을 정확히 밟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면 서른을 넘기며 보다 여유롭게 종합적인 관점에서 춤을 출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2011 3, 국립발레단에서 파트리스 바르의지젤을 공연한 후에 그런 느낌이 강해졌다.

 

발레, 특히 클래식 발레의 경우에는 이미 정교하게 짜여진 안무대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무용수가 변화를 주거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돼 있다. 단순한 테크니션이 아닌 훌륭한 예술가로서의 무용수는 그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독창성을 춤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김지영이 생각하는 본인 춤의 독특함은 역할을 표현할 때 명확한 대비를 주는 데 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레퍼토리로 꼽는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 역할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김지영의 줄리엣은 아주 발랄하다. 발랄함으로 인해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모습이 더욱 더 비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젤의 경우에도 대부분의 무용수는 몸이 약한 시골 처녀인 지젤을 최대한 청순하게 표현하려 하지만 김지영에게 지젤은 뜨거운 여자다. 물론 청순한 면이 있지만 강단이 있는 소녀라는 것이 김지영의 해석이다. 몸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춤을 너무 사랑하고, 어머니가 반대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유령이 돼서도 사랑하는 왕자를 지켜주는 지젤은 아주 뜨거운 여자이기에 김지영은 청순함과 강렬함의 대비를 준다.

 

보는 이들의 눈에 김지영의 춤은 기량과 표현력, 예술성 등 모든 면에서 최고다. 2011년 대한민국 발레축제에서 김지영이 선보인백조의 호수연기에 대한 리뷰에서 한 신문은 김지영이 무대와 음악, 자신의 신체와 리듬감을 파악해 하나로 통일시키는 과정을 이해하는 무용수라고 평했다.

 

타고난 재능만으로 창조적 예술이 탄생할 수는 없다:

창조성의 재료는 공기 속에 있다!”

 

‘창조성’ 혹은창의력은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치이자 개념이지만 정의를 내리기가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다. 마치사랑이라는 개념처럼 누구나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추상적 개념이다. 게다가 어떤 예술 작품이나 예술가가창의적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평가는 해당 작품이나 예술가가 속해 있던 사회적 맥락을 떠나서는 성립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만약 예술에서의 창조성을사회와 시대가 원하는 특정한 재능이라고 좁은 범위에서 규정할 수 있다면 김지영은 1990년대 말 한국 사회가 원했던 창조적 재능과 2010년대 한국 및 세계 예술계가 원하는 창조적 재능 모두를 갖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지영이 18세의 나이로 국내 무대에 데뷔하던 1990년대 말에 한국 발레계는 공연 준비와 상연 시스템이나 무용수들의 기량 등 모든 면에서 초기 발전기 단계였다. 따라서 무용수에게도 신체 조건이나 다양한 클래식 발레 레퍼토리에서 요구하는 테크닉 등의 외적인 조건을 갖추는 것이 가장 시급하게 요구되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완벽한 발레리나 체형과 러시아에서 갈고 닦은 테크닉을 가지고 혜성과 같이 등장한 김지영은 당시 한국 발레계에는 너무나 소중한 인재였다. 2001년 공연했던백조의 호수에서 흑조의 춤 중 제자리에 선 채로 32바퀴를 회전하는푸에테를 완벽하게 선보인 김지영은 그야말로 사회와 시대가 원하는 신체 조건과 테크닉 등의 재능을 갖춘 한국 발레계의 프리마 발레리나였다.

 

 

그렇다면 2013년 현재 한국 발레계는 어떠한가? 김지영을 비롯한 스타 무용수들의 등장과해설이 있는 발레등의 프로그램과 찾아가는 발레 공연 등을 통해 발레가 대중화됐다. 사회 전반적인 경제 수준의 향상이나 서구식 식단 및 생활 방식의 일반화로 운동, 다이어트, 몸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점 등 거시 환경적인 변화도 발레로 관심이 향하는 데 일조했다. 뿐만 아니라 내한 공연이나 해외 여행·체류 중 직접 해외 발레단의 공연을 감상하거나유튜브’ 등을 통해서 유명 발레단의 실황 공연 모습에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국내 관객들의 안목 역시 많이 업그레이드됐다. 발레 창작 측면에서도 해외와의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서 레퍼토리를 확보하고 공연 횟수를 늘려 무용수들이 무대 경험을 쌓게 하는 한편 해외 안무가나 의상팀 등을 초청해 협력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또 발레 작품 창작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고 한국 창작 발레를 해외 무대에 올리는 등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 자연히 발레계와 관객이 원하는 무용수의 재능은 아름다운 라인과 완벽한 테크닉 등의 외적 조건을 넘어 섬세한 표현력, 개별 무용수만의 독창적 특징, 예술성 등의 가치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김지영은 자신의 독보적 강점이었던 기능적 측면에 표현력, 해석력, 예술성을 더함으로써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도 사랑받는 창조적 예술가가 됐다.

 

지금 김지영이 생각하는 발레 무용수에게 필요한 자질이나 재능 있는 예술가를 키우기 위한 주위 시스템 역시 표현력, 예술성 등에 관련된 것들이다. 먼저 표현력과 예술성이 좋은 발레 무용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 옆에 훌륭한 코치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학교에서 무용을 익히는 학생에게뿐만 아니라 프로 무용수에게도 자신의 움직임을 평가해 주고 조언해 주는 코치의 역할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발레단들은지도위원혹은미스트리스라고 불리는 코치들을 두고 무용수들이 피드백과 조언을 받도록 한다. 김지영의 경우 바가노바 발레학교에서 마린스키 주역 무용수 출신의 선생님들이 잠깐 시범을 보임으로써 발레 표현력에서 중요한 손 끝 동작을 아주 손쉽게 이해했던 경험이 있다. 또 바가노바에서 공연 리허설 중에 테크닉뿐만 아니라 섬세한 마임이나 시선과 눈동자 등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지도받았다. 한국에서 아쉬운 부분이 바로 우수한 코치진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1990년대에 바가노바 발레학교를 마치고 국립발레단에 입단했을 때에는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그래서 김지영은 스스로 비디오를 보면서 연구했다. 다른 사람이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어색한 부분을 다듬었다. 예를 들어돈키호테의 키트리 역할을 해외 유명 발레리나가 연기하는 비디오를 봤는데 굉장히 독특한 표정이 나오면 작품을 다시 분석해 보면서 그러한 표현이 나온 이유를 스스로 이해하곤 했다. 표정, 마임이나 걸어 다니는 동작 등을 혼자서 많이 연구했던 경험에서 얻은 것들이 그녀 안에 쌓였다. 김지영은 지금도 DVD나 다른 발레 공연이나 음악, 뮤지컬 등의 공연을 많이 보면서 표현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한국 발레계가 한층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춤을 잘 이해하고 전문적인 코칭 트레이닝을 거친 좋은 코치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녀의 의견이다.

 

김지영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좋은 환경이다. 모두가 무용수의 기본 자질을 갖췄다고 가정했을 때 발레하기 좋은 환경에서 활동하는 무용수가 세계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확률이 크다. 여기서 좋은 환경이란 예술가가 받는 대우나 제도적인 뒷받침, 발레단이나 발레학교 시스템 등 거시적인 문제들을 포괄한다. 바가노바의 선생님들을 한국의 학교들에서 초빙해 가르치도록 하더라도 바가노바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발레 사회에서 교류하는 그 분위기까지 재현할 수는 없다. 환경이란 이런 걸 포함하는 개념이다. 또 공연 리허설이나 클래스 역시 해외에서는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하는 데 비해 국내에서는 아직 CD로 반주음악을 재생하면서 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는 전문 반주자를 연주자들 중에 매우 지위가 낮은 직업이라고 간주할뿐더러 국내에서 올려지는 공연이 많지 않아 반주자에 대한 수요도 적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이러한 작은 것들이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김지영의 주장이다.

 

(무용수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크기 위해서는) 저는 환경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느냐가 중요해요. 일단 예를 들어타마라 러포라는 무용수가 영국 로열 발레단에 가면서부터 갑자기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돼요. 발레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발레단 전체적인 수준이 중요해요. 가령 군무나 음악 같은 요소들이 휘청거리면 (관객이 공연에) 집중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무용수의 기량이 보이지가 않아요. 돋보이질 못해요. 오히려 마이너스가 돼요. (해외 발레단에서는) 훌륭한 대접을 해주기 때문에 좋은 춤이 나오는 것이거든요. 자기 생활 방식, 생각하는 것이 무대에서 그대로 나오거든요. 예를 들어서 커다란 개인 드레싱 룸에서 연습복 갈아입고 클래스 나가게 되면 아무래도 걸음이 다르고 어깨가 다르죠. 해외 큰 발레단에서는 공연을 할 때 내 뒤에서 준비해주는 스태프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럴 때와 자기가 준비해야 하고 의상 챙겨야 할 때는 이미 무대의 한 스텝 설 때부터가 다르겠죠. 좋은 대접을 해주죠? 자기가 (훌륭한 춤을 추도록) 그렇게 돼요. 김지영의 춤이 굉장히 좋아졌다는 평을 받게 된 것도 제가 네덜란드에서 그런 대우도 받아 봤고 그런 환경을 경험해봤기 때문일 거예요.”

 

또한 국내 교육 환경도 개선돼야 할 점이다. 현재 한국에는 발레학교가 없기 때문에 예술을 전공하는 어린 학생들이 학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일주일에 2∼3회 정도 클래스를 하거나 학교가 끝난 후에 11시까지 발레 연습을 하는 식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테크닉이나 동작 등은 정확하게 따라 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훈련할 수는 있지만 마임이나 손동작,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세와 분위기 등 사소하지만 예술적 표현에 화룡점정이 되는 부분들을 익히기는 어렵다. 발레학교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궁중 무용 등을 익히거나 캐릭터 발레 수업을 하면서 이러한 부분들을 체득한다. 또한 학생들이 공연을 볼 기회와 시간이 없다는 것도 표현력을 기르는 데 제약으로 작용한다.

 

발레밖에 모르는 춤바보: 아직 오지 않은 인생 최고의 무대를 향해

날아오르기를 기다린다

 

김지영은 스스로 발레 이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본 적도 없고 또 명성이나 부 등과 같은 일상생활의 지혜에 대해서도 완전히 문외한인춤바보라고 말한다. 발레가 없다면 무엇을 하고 살지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해 본 바가 없다. 김지영과 같이 타고난 재능과 열정을 가진 예술가가 자신이 택한, 그리고간택 당한예술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환경의 조성은 창조적 예술가의 출현에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김지영의 발레는 다양한 환경으로부터 몸에 익힌 기술적, 예술적 요소가 한데 어우러진 창조적인 춤이다. 그녀는 한곳에 머무르며 주변을 탐색하기보다는 전혀 새로운 환경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원거리 탐색을 시도해 왔다. 저마다의 문화적 토양을 가진 한국과 러시아, 네덜란드에서의 경험은 김지영의 춤이 서로 다른 스타일들을 조합해 독창적인 색채를 뿜어낼 수 있도록 하는 자양분이 됐다. 또한 다음 단계에는 어디에 자리매김할 것인지의 의사결정이 의식적인 계산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곳을 향해 움직이다 보니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는 점이 그녀의 발레 인생을 더욱 더 예술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 향후 계획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불확실성 속에서 계속 노력한다는 것이 많이 힘들어요. 왜냐면 앞이 안 보이고 미래가 깜깜하거든요. 크게 아주 멀리는 뭔가 있겠죠. 가르치고 있을 것 같아요. 또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을 수도 있겠죠. 최 단장님이나 선생님들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게 그래요. 그냥 네 일 열심히 하고 있으라고. 그러면 길이 보일 것이니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춤만 열심히 추라고요.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만약 제가 일부러 무언가 차근차근 계획하고 그것에 맞게 조정하려 들면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요. 제 춤이 망가질 것 같아요. 저한테 제일 중요한 건 제가 춤을 정말 잘 춰서 그걸 후배들이 보고 나를 인정해줄 수 있는 거예요.”

 

김지영이 말했듯 춤은 기록을 통해서 이어지기보다는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예술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환경에 뛰어들어 그곳의 전통과 표현법을 몸으로 익혀 온 김지영은 한국 발레계에 보물과 같은 존재다. 1990년대 초, 러시아와의 교류가 막 시작됐을 무렵, 김지영은 한국과 러시아를 이은 연결고리였고, 2000년대 초, 발레의 중심지 유럽과 발레 지도의 변방국가였던 한국을 이은 연결고리였다. 한국 발레계에서 김지영의 위치가 중요한 이유는 그녀의 몸이 기억하는 다양한 스타일과 매너, 정신, 그리고 기품 때문이다. 이러한 몸의 기억을 다음 세대의 후배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2011 10월부터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아카데미 교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지영이 학생들에게, 그리고 후배들에게 그 섬세하고도 중요한 요소들을 가르쳐 다음 세대 창의적 무용수를 육성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점점 더 물오른 춤을 선보이고 있는 그녀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무대 위 공연을 통해서 절정의 예술성을 직접 보여주길 바란다.

 

필자주

이 글은 기초 자료 조사와 작가와의 인터뷰 녹취록 정리 등을 담당한 김맑음 미국 예일대 경영대 박사과정생(조직이론)의 도움으로 집필됐습니다. 귀한 시간을 아낌없이 인터뷰에 내어주신 김지영 발레리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 교수 dshin@yonsei.ac.kr

신동엽 교수는 미국 예일대에서 조직이론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스프링국제실내악축제 조직위원장을 지냈고 국립발레단 등 여러 문화예술단체들을 자문해왔다. 조직이론 분야 최고 학술지인와 문화예술 분야 세계적 학술지인등에 논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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