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 김지영 발레리나
편집자주
모두가 ‘창조’를 말하는 시대지만 정작 정확한 개념 정의도, 진정한 의미파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창조성’에 대해 10여 년 전부터 연구해 온 신동엽 연세대 교수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진행한 각종 인터뷰와 연구결과 등을 토대로 ‘21세기 시대정신, ‘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전문가들에게 우리나라의 역대 남녀 발레무용가들 중 세계 정상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물으면 대부분 망설임 없이 김지영을 꼽는다. 전문가들은 김지영을 체격, 테크닉, 표현력, 예술성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완벽한 발레리나의 전형으로 극찬한다. 실제로도 세계 최고의 볼쇼이발레단 모스크바 공연에 주역으로 초청받을 정도로 국내외에서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평가받고 있다. 김지영의 창조적 예술관은 ‘춤바보’라는 그녀의 별명에 함축돼 있다. 무대 위에서건 아래에서건 그녀에게서 발레 이외의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우아하고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며 손짓과 표정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품격이 넘친다. 김지영의 삶이 바로 발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는 물론 무대 아래에서도 항상 세계 최고의 프리마1 발레리나로 살아간다. 김지영에게 발레란 생계나 명성과는 아무 상관 없다. 그녀는 세속적 영역에 대해서는 무지에 가까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김지영이 무대에 설 때마다 역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변신해 관객들을 무아지경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은 그녀 자신이 발레에 완전히 도취돼 있기 때문이다. 김지영은 발레에 관한 한 만족을 모른다. 그녀가 전성기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 이유다.
여유와 느슨함이 창조를 낳는다는 착각: 치열한 몰입이 정답!
최근 창조성이 전 세계적 화두가 되면서 창조와 혁신에 관한 저작물들이 넘쳐나고 있다. 창조성의 원리에 관한 무수한 주장들 중 필자가 자주 접하는 것은 새벽부터 밤까지 숨쉴 틈 없이 근면하게 일해야 하는 산업사회의 근로자들과 달리 창조적 혁신은 느슨함과 여유로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적 혁신을 위해서는 산업사회형 기업들처럼 ‘열심히 일할 것(Work Hard)’이 아니라 ‘약삭빠르게 일할 것(Work Smart)’을 권하기도 한다. 또 20세기 산업사회형 기업의 구성원들처럼 치밀하게 설계된 시스템과 직무구조에 따라 자기가 맡은 일과 자신의 강점에 선택·집중하는 전문화와 분업의 덫에 빠지지 말라고도 경고한다. 경계를 넘어 다양한 새로운 분야를 과감하게 탐험하는 것이 창조적 혁신의 필수 조건이라는 주장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모두 구체적, 논리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과도하게 치밀한 통제관리 시스템을 가진 조직에서는 창조적 아이디어를 실험해볼 시간적 여유와 자율성 자체가 없기 때문에 혁신이 창출되기 어렵다. 따라서 구글이나 3M 등 혁신을 강조하는 기업들은 ‘2대8 법칙’과 같이 아예 업무 시간 중 일부를 창조적 활동에 강제적으로 할당하는 방법도 쓴다. 또한 혁신연구의 원조격인 슘페터가 주장했듯이 대부분의 창조적 혁신은 전혀 존재하지 않던 완전히 새로운 지식이나 아이디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경계들에 의해 서로 분리돼 있던 다양한 기존 지식과 아이디어들이 경계를 넘어 새로운 방식으로 재결합 하는 데서 혁신이 창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각자 자신만의 기존 영역의 틀 안에 갇혀 기존에 해오던 일을 같은 방식대로 끊임없이 반복만 하는 조직에서 창조적 혁신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지니는 위험성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칫 21세기에 필요한 창조적 혁신을 위해서는 여유 있고 느슨한 생활태도를 가지고 전혀 다른 다양한 분야들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식의 오해를 낳을 수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아니 가장 위험한 오해다. 필자가 지난 3년간에 걸쳐 동료 학자들과 함께 <창조성의 원천>이라는 책을 집필하기 위해 인터뷰한 20여 명의 세계적 예술가들의 가장 명확한 공통점은 치열한 몰입이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이 창조적 예술가들은 일생을 창조적 예술에만 치열하게 몰입하는 불꽃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예술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도 없으며 휴식이나 여가도 즐길 줄 모르고 자나깨나 예술만을 생각하는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예술에만 완전히 몰입한 결과, 삶과 예술이 구분되지 않고 365일 24시간 완전히 예술에 도취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언뜻 바보스러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창조적 바보스러움이 창조적 예술의 가장 중요한 힘이자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었다.그중에서도 특히 불꽃 같은 치열함의 정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사람이 바로 춤에만 완전히 몰입해서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바보에 가까웠던, 그래서 ‘춤바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 세계적 발레리나 김지영이다. 완벽한 발레리나로 불리는 김지영을 심층적으로 분석해봄으로써 예술에만 온 몸과 마음을 바치는 치열한 몰입이 어떻게 창조적 혁신을 낳느냐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김지영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그녀는 예원학교 재학 중 14살의 어린 나이에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 세계적 발레학교인 키로프발레단 부설 바가노바 발레학교를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다. 1997년 18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립발레단 무용수로 입단해 주역을 도맡아 연기했다. 스타 무용수로 이름을 날리던 2002년, 돌연 네덜란드로 건너가 8년간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 수석 무용수로 춤추다가 2009년 다시 ‘친정’ 같은 한국 국립발레단으로 돌아왔다. 아름다운 신체 조건, 훌륭한 테크닉, 거기다 예술성까지 겸비한 김지영은 현재 국립발레단을 대표하는 수석 무용수가 됐다. 대다수 무용수들이 발레보다 신체적 부담이 적은 다른 분야들로 옮겨가거나 심지어 은퇴를 고려하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오히려 점점 더 기량이 급성장했다. 초인적 테크닉과 체력을 요구하는 클래식 발레 레퍼토리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 국내외 전문가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완벽한 발레리나 김지영의 예술 창조성을 찾아서
2001년 국립발레단은 클래식 발레의 대표작 ‘백조의 호수’를 무대에 올렸다. 당대 세계 최고의 안무가이자 볼쇼이발레단의 전설인 유리 그리가로비치 버전의 한국 초연이었다. 가녀리고 섬세하며 청순한 백조 오데트와 대담하게 왕자를 유혹하는 요염한 흑조 오딜. 상반된 두 캐릭터를 수시로 오가며 화려한 테크닉과 우아한 디테일까지 모두 소화해야 하는 ‘백조의 호수’는 프리마 발레리나의 궁극적 도전 과제와도 같은 작품이다. 20세를 갓 넘긴 한 발레리나가 무대에 섰다. 관객들은 신이 내린 완벽한 신체와 그 신체를 바탕으로 펼치는 고난도의 테크닉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그녀에게 반했다. 또 예술적 표현력마저 겸비한 이 신인 발레리나에 열광하고 세계적 무용수의 출현을 축하했다.
2011년, 국립발레단은 다시 ‘백조의 호수’를 무대에 올렸다. 역시 유리 그리고로비치 버전이었다. 그리고 10년 전 무대에 섰던 바로 그 무용수가 오데트와 오딜을 연기했다. 관객들은 또다시 열광했다. 그녀의 뛰어난 테크닉과 정확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음악과의 조화, 섬세한 손 끝의 표현, 오데트와 오딜의 양면성과 내적 갈등에 대한 깊은 정서적 이해 수준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 세계 다른 어느 발레리나와도 다른 자기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력이 관객을 전율케 했다. 그녀가 신들린 듯한 기량으로 연기한 백조와 흑조는 오히려 그전보다 훨씬 더 깊어졌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완벽함 그 자체였다.
2001년에도, 그리고 10년 후 2011년에도 관객을 완전히 홀린 이 발레리나가 바로 전문가들이 모든 면에서 가장 완벽한 발레리나로 평가하는 김지영이다. 이 시대 최고의 발레리나 김지영의 예술 창조성의 원천을 알아보기 위해 무대 위에서뿐만 아니라 무대 아래에서도 당당하고 우아하며 솔직하고 거침없는 그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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