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ve minds

100년 명품을 낳은 샤넬, 현재를 즐겼다

140호 (2013년 11월 Issue 1)

 



편집자주

창조와 혁신이 화두인 시대입니다. 예술가, 문학가, 학자, 엔지니어, 운동선수 창작가들의 노하우는 기업 경영자에게 보석 같은 지혜를 제공합니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이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창조의 노하우를 소개합니다.

 

“내가 필요한 돈을 대겠어요. 단 조건이 하나 있어요. 이 돈을 내게 받았다는 이야기를 절대로 해선 안 돼요.”

공연 자금을 구할 방법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던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에게 패션사업으로 거부가 된 디자이너 샤넬(Gabrielle “Coco” Chanel) 30만 프랑이 적힌 수표를 건넸다. 공연을 넉넉히 치르고도 남는 거액이었다. 더욱이 이때까지 디아길레프는 샤넬과 안면은 있지만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러시아 발레단을 창설한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봄의 제전을 재조명하는 공연을 기획하고 있었다. 1913년 파리의 샹젤리제극장에서 초연됐을 때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던 관객들에 의해 아수라장이 된 문제작을 새로운 안무로 다시 올리려 했는데 워낙 악명 높았던 공연인지라 어떤 후원자도 나서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샤넬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샤넬이 후원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좋아했다. 이렇게 제작된봄의 제전 1921년 재연에서 성공을 거뒀다.


샤넬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예술을 즐겼고 여러 예술가들과 교우했다. 절친했던 극작가인 콕토와 기획자 디아길레프 이외에도 사티, 풀랑크, 미요, 라귀, 스트라빈스키 등 음악가들과 르베르디, 라디게와 같은 시인, 피카소, 그리스, 레제, 브라크 등의 화가들이 그녀의 집에 모여들었다. 피카소는 긴 파티가 끝나고 집에 가기가 귀찮아지면 으레 샤넬의 집에 머물렀다. 샤넬은 술에 취한 예술가들이 새벽에 자신의 저택에 쳐들어오면 기꺼이 방을 내줬다. 그리고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예술가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스트라빈스키가 생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네 명의 자식을 포함한 가족 모두를 자신의 별장에서 기거하게 했다. 스트라빈스키 가족은 2년을 머물다 떠났지만 이후에도 10년 넘게 후원을 지속했다. 1933년 쉰 살이 넘은 스트라빈스키가 샤넬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샤넬의 후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또 다시 당신을 귀찮게 만들어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샤넬이 연초부터 돈을 보내주지 않아 한 푼도 없으니 이 달을 어떻게 살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당신이 이 사정을 그녀에게 전해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예술을 사랑했지만 샤넬은 예술작품을 수집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피카소, 모딜리아니, 브라크, 달리 등 친한 화가들의 그림을 단 한 점도 소장하지 않았다. 예술작품보다는 예술가들과 교우하며 순간순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독창적인 예술품을 소장하기보다는 그걸 만든 사람의 독창성을 느끼고 싶어했다. 그녀의 예술 후원은 자선활동이 아니라 유희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은 드러나지 않게 도왔지만 샤넬이 예술가들에게 너그럽다는 얘기를 듣고 도움을 구하러 오는 예술가들에게는 한 푼도 내주지 않았다. 샤넬은 현실을 마음껏 즐긴 사람이었다. 순간을 즐겼던 샤넬의 생각은 돈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샤넬은돈은 좋은 하인이자, 나쁜 주인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평생 그녀는 돈에 구속되지 않고 삶을 즐기는 데 수입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심리학자 매슬로(Abraham Maslow)에 의하면 샤넬과 같이 현실을 즐기는 성향이 창조가의 전형적 특성이다. 매슬로는 1962년 한 하이테크 기업의 요구로 직원들의 행동과 의사결정 과정을 지켜보며 경영과 혁신에 대해 연구한 일지를 남겼다. 창의성 역시 그의 주된 관심사였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미래를 잊고 현재에 모든 관심을 쏟을 줄 아느냐에 따라 지금 당장의 창조성 발휘 여부가 결정된다. 창조적인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예측성도 내던져버리고 현재에만 완전히 몰두하여 즐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안다. 상황이 변하면 그에 따라 노선을 변경한다. 계획을 내던져 버리고 융통성을 발휘해 변화하는 상황과 시시각각 변하는 문제의 요구사항에 자신을 맞출 줄 안다. 왜냐하면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자기존중이 있기 때문이다.”

즉 창조적인 사람은 스스로를 믿기 때문에 모호하고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지 않아서 현실을 즐긴다는 것이다. 현실을 즐기는 만큼 임기응변에 강하고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 변화 역량(Dynamic Capabilities)이 뛰어나다. 실제로 샤넬은 변화무쌍한 패션계에서 100년 동안 최고의 위치를 지켜냈다.

현실의 변화를 읽어 100년간 최고 유지

1883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태어난 샤넬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형제들과 함께 자랐다. 19 의상실에 취직해 독립했고 밤에는 술집에서 노래 부르는 일을 했다. 손님들에게코코라는 별칭을 얻어 이때부터 본명 대신 코코 샤넬로 불렸다. 샤넬 로고에 사용되는 개의 C 여기에서 나왔다. 1910 연인의 도움으로 파리에 모자 가게를 성공한 1913년에는 가게로 확장해 운동복과 같은 단순한 의복 디자인에 도전했다. 한두 경험을 쌓은 샤넬은 본격적으로 고급 의상실을 차리기로 결심했다. 현실을 직시했던 샤넬은 여성들에게 필요 옷이 뭔지 알았다. 당시 파리의 최고 디자이너는 푸아레(Paul Poiret)였는데 그는 귀족과 부자들을 위해서 예술작품에 가까운 화려한 의상을 만들었다. 샤넬이 보기에 무거운 모직이나 비싼 천으로 만든 의상은 화려하지만 여성들이 입고 활동하기에 불편했다. 더욱이 강렬한 색감, 자수, 레이스, 매듭, 주름, 장신구 여성복의 장식은 고정관념에 불과한 것으로 불필요해 보였다. 샤넬은 보다 실용적이고 단순한 옷을 만들었다. 남성용 속옷에나 쓰이는 값싸고 얇은 저지(jersey)를 활용해 치마 길이를 과감하게 줄인 단색의 드레스를 내놨다. 1916년 샤넬의 드레스는 대히트를 기록해 유명 패션잡지마다 소개됐다. 푸아레는 저지 같은 저렴한 소재를 활용한 샤넬의 제품을 “대부호들에게는 볼품없는 옷”이라고 폄하했지만 샤넬의 의상은 1차 세계대전 후 여성들의 변화된 생활에 더 적합했다. 학자, 사업가, 운동선수 같은 직업을 가진 활동적인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 편안하고 실용적인 옷이 요구됐다. 그동안 여성들은 코르셋, 속옷, 심을 넣어 몸매를 강조하는 옷으로부터 구속받고 있었는데 샤넬이 여성의 몸을 해방시켰다. 샤넬의 의상은 파리 패션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이후 여성복 디자인이 편리하고 단순하게 변했다.


1921년에는 파리의 의상실을 큰 곳으로 옮기고 디자이너 이름이 붙은 최초의 향수인 샤넬 No. 5를 출시했다. 당시 향수는 꽃이나 동물에서 채취한 천연 향을 활용했는데 샤넬 No. 5는 화학첨가물을 섞어 미묘한 향기를 만들어냈다. 또 향수를 담는 유리병은 대부분 유리 제조업자들이 공 들여 세공한 큐피드나 무용수 같은 아름다운 조각품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샤넬 No. 5의 용기는 납작한 직육면체의 단순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병 속에 담긴 금빛 향수의 빛깔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아직까지도 디자인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샤넬 No. 5는 전 세계에서 많이 팔리는 향수 중 하나다.

 

1926년 샤넬은 어디서나 입을 수 있는 더욱 단순한 검정색 드레스(little black dress)를 발표했다. 이 옷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던 자동차만큼 성공을 거뒀다고 해서샤넬의 포드로 불렸다. 디자인이 워낙 단순해 다른 업자들이 쉽게 복제 생산해서 이 옷을 입는 여성들이 넘쳐났지만 샤넬은 개의치 않았다. 이 옷도 기존에 주로 상복으로 사용되던 검정색을 여성복에 도입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으로 평가받았다. 샤넬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했다. 1930년대에는 할리우드 영화 의상을 담당할 정도로 국제적인 인물이 됐고 그녀의 옷은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에 팔려나갔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의상실 문을 닫을 때까지 샤넬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후 15년 동안 샤넬은 활동을 하지 않았다. 전쟁 중 독일군 장교와 사귄 게 문제가 돼 전쟁이 끝난 후에 조사까지 받았고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프랑스에 들어오지 못하고 스위스에서 지냈다. 이때 프랑스 패션계는 디오르(Christian Dior)가 주도하고 있었다. 디오르의 디자인은 이전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뉴 룩(new look)이라 불렸다. 뉴 룩은 꽉 조인 허리, 부드러운 어깨선,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내려오는 롱스커트로 여성의 몸매를 드러내는 디자인이었다. 이를 소화하기 위해 여성들은 1920년대부터 사용하지 않던 코르셋, 거들, 패티코트까지 착용해야 했다. 샤넬은 뉴 룩이 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디자인이라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결국 뉴 룩에 대한 불만과 질투가 1954년 샤넬을 복귀하게 만들었다. 샤넬은 복귀 패션쇼에서 단순하면서도 시대에 맞는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였다. 유행과 다른 디자인에 파리 패션계의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열광했다. 미국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프랑스에서도 곧 샤넬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이제 뉴 룩을 지지했던 사람들마저 허리에 꼭 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렸다.


복귀 후 샤넬은 현실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해 패션사업의 패턴이 바뀌는 데 영향을 줬다. 20세기 중반까지 패션계를 이끈 것은 오트쿠튀르(고급 맞춤 의상실)였다. 오트쿠튀르는 한 명의 고객을 위한 맞춤 의상을 만들었다. 자연히 이들의 작품은 독창적이고 복제가 어려웠다. 그러나 샤넬은 자신의 작품이 복제돼 더 많은 사람들이 입는 것을 환영했다. 그녀는 복귀할 때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생산라인을 갖추고 옷을 대량생산할 계획을 세웠다. 마땅한 공장을 찾지 못해 모조품 생산업자들에게 길을 터줬지만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고급 패션의 대중화가 가속화됐다. 실제로 1960년대 들어 밀라노와 뉴욕의 기성복이 파리의 오트쿠튀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파리의 오트쿠튀르들도 샤넬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기성복 상표를 설립했다.

심지어 피에르 가르뎅이나 파코 라반 같은 후배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브랜드를 라이선스로 계약해 해외 업체들이 파리의 브랜드를 마음껏 생산하게 만들었다. 샤넬은 오늘날 대중 패션의 시대를 연 선구자였다. 이처럼 샤넬은 1971년 숨을 거둘 때까지 패션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샤넬 사후에도 그녀의 철학과 스타일을 계승한 브랜드샤넬은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고급 브랜드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동태적 역량이 중요해지는 시대


샤넬은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제대로 짚어내 다양한 의상을 성공시켰다. 유행이 빠른 패션계에서 100년간 최고를 유지한 비결은 샤넬에게 동태적 역량(Dynamic Capability)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영학자들은 최근 경영환경의 불확실성 증가로 동태적 역량이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 됐다고 역설한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기업의 성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산업이었다. 유망한 산업에 들어가서 경쟁하면 좋은 성과가 났고 쇠락하는 곳에서는 아무리 잘해도 돈을 벌지 못했다. 경영학자들은 이런 현상으로부터 산업 효과가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설명했다. 이때 기업의 전략은 산업을 분석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일본 기업이 미국에서 득세하면서 같은 업종에서도 기업의 명암이 갈라졌다. 같은 자동차 산업에서도 미국 기업은 쇠락해가는 데 일본 회사는 성장했다. 그러면서 경영학에도 변화가 생겼다. 산업보다 기업의 핵심역량을 축적하는 게 경쟁력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특허, 인재, 브랜드 등 기업의 자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그런데 1990년대 말 변화가 빠른 하이테크 산업에서 예외적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IBM, 필립스, 텍사스인스트루먼트 같은 기업들은 핵심역량을 축적하기 위해 수많은 특허를 보유했다. 그런데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환경 변화에 빠르게 대응해 혁신하고 자원을 재빠르게 재구성하는 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특허도 몇 개 없고 R&D에 투자도 많이 하지 않는 애플 같은 기업이 급성장하는 것을 보고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 바뀌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에 티스와 동료 경영학자들(David Teece, Gary Pisano, Amy Shuen)은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서는 동태적 역량이 경쟁력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동태적 역량은 환경 변화에 맞춰 내외부 자원을 통합하고 육성하며 재편하는 역량이다. 이제는 동태적인 관점에서 핵심역량을 수정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IBM은 몰락 직전에 동태적 역량을 구축하는 전략으로 회생했다. 컴퓨터 하드웨어 시장이 축소될 것을 내다보고 서비스 기회를 잡기 위해 기술과 인적 자원, 핵심역량을 재구성해 제품 중심 기업에서 서비스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티스는 동태적 역량은 세 가지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우선 시장의 작은 시그널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그 시그널을 읽은 후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며, 자원과 핵심역량을 재편해 새로운 기회에 적합한 경쟁력을 빠르게 기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경영학의 설명은 다소 일반적이다.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동태적 역량이 탁월했던 샤넬의 사례로부터 보다 구체적인 통찰을 얻어본다.

신념 없인 변화 역량도 없어

샤넬이 현실을 즐기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던 까닭은 네 가지 요건 때문이다.

 

첫째, 샤넬은 신념(Belief)이 뚜렷했다. 변화의 밑바탕에는 강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줏대 없는 사람은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없다. 샤넬의 경우에는 옷에 대한 신념과 철학이 분명했다. 옷은 편리함과 단순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디자인이 바뀌어도 이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 이런 생각은 환경과 기질에서 빚어진 것 같다. 어린 시절 수녀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자랐던 영향도 있었을 테고 여성 옷을 화려하게 만드는 풍조에 대한 반항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디오르의 뉴 룩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옷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넬은 뉴 룩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디오르, 그는 자신의 옷 속에 여자들이 있다는 걸 잊고 있어. 가련한 여자들이 옷을 찢지 않고 어떻게 몸을 굽히거나 자동차를 탈 수 있겠어. 실용적인 미국 여자들이 프랑스 제품을 사지 않게 된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야.”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더 늘어날수록 뉴 룩은 그 인기가 오래 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처럼 신념은 변화와 임기응변에서 중심을 잡아준다.


둘째, 특유의 능력(Distinctive Capabilities)이 있었다. 매슬로도 지적했듯이 스스로를 존중해야 현실을 즐기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기 능력을 믿는다는 얘기다. 샤넬 역시 의복 디자인에 대한 독창성을 믿었고 자신감이 있었다. 샤넬이 카피를 허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어느 날 샤넬이 파리 시내를 돌아보던 중 이런 소리를 들었다. “샤넬을 사세요. 색깔별로 다 있습니다. 특가에 드립니다.” 이 소리에 샤넬은 자동차를 세우고 그 여성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추며 격려했다. “100프랑짜리 샤넬이 있다니 정말 기쁜 일이군요. 계속하세요.” 당시 다른 의상실은 오트쿠튀르협회를 결성해 디자인이 무단 복제되는 것을 감시하고 이를 어긴 모조품 업자를 고소했다. 샤넬은 다른 사람이 복제하면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이런 생각의 차이로 오트쿠튀르협회를 탈퇴했다. 물론 대범한 샤넬은 협회 탈퇴 후에도 비싼 연회비를 꼬박꼬박 지불했다.


셋째, 환경에 대한 민감도(Market Insight)가 뛰어났다. 동태적 역량에서 전문가들이 가장 빈번하게 언급하는 게 민감도, 즉 변화의 시그널을 읽는 능력이다. 빅데이터를 도입해서 소비자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민감도만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동태적 역량의 요건들이 동시에 충족돼야 한다. 즉 신념과 능력이 있어야 시장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샤넬은 현실의 변화를 감지하는 직감이 발달했으므로 여성들의 잠재 욕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편리성과 단순미라는 신념이 있었기에 단순하고 가벼운 의상으로 여성의 욕구를 표현했다. 반면 디오르는 여성의 욕구를 아름다움으로 봤다. 시장의 시그널은 매우 다양하다. 그중 하나를 신념과 능력이 선택하는 것이다. 신념이나 능력이 없으면 수많은 시장 시그널에 질식될 뿐이다. 빅데이터 분석에서 나타나는 시장 시그널은 더욱 다양하고 많을 것이다. 자기가 믿는 신념과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게 없다면 그중에서 하나의 미래를 선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출시할 때 터치스크린을 선택한 것은 시장의 객관적인 시그널만 보고 결정한 게 아니다. ‘스타일러스 펜은 안 된다라는 신념과 합쳐진 결과였다.


넷째, 실험과 학습(Learning by Doing)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샤넬은 의복에 대한 뚜렷한 신념을 바탕으로 다양한 디자인을 내놓은 결과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었다. 현실을 즐겼던 샤넬은 스케치를 하지 않고 디자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천의 질감을 느끼면서 옷을 만드는 과정에서 디자인을 고쳐갔다. 공교롭게도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능한 혁신 기업들이 샤넬과 비슷한 방식을 쓰고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디자인 회사인 IDEO도 실험과 학습에 의해 디자인을 한다. 제품의 소비자를 직접 관찰하고 팀원들끼리 생각을 모은 후 신속하게 시제품을 만들어 현실에서 검증해보고 재빠르게 고친다. 완결될 때까지 이 프로세스를 수없이 반복한다. IDEO 방법의 핵심은 머릿속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실험을 통해서 현실에서 학습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동태적 역량은 뚜렷한 신념과 독창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시장의 다양한 시그널 중에 하나를 택해 실험과 학습을 반복함으로써 길러질 수 있다.


미래보다 현재에 초점을 둬야

현실을 즐긴 샤넬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남자친구가 많았다. 그녀는 보육원을 나왔을 때 지주인 에티엔 발장과 사귀었다. 몇 년 후 발장의 친구이자 폴로 선수인 영국인 사업가 아서 카펠과 사랑에 빠져 오래 사귀었지만 교통사고로 그를 잃게 된다. 얼마 후 30대 후반에는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와 연인이 됐다. 그와 헤어진 후에는 영국 왕족인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연애를 하며 결혼설까지 보도됐지만 결국 결별했다. 40대 후반의 샤넬에게 나타난 남자는 잡지 출판업자인 폴 이리브였으나 그 역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후 스무 살 연하인 밀라노 태생의 루키노 비스콘티와의 짧은 전원생활로 안정을 찾았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60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독일군 장교인 한스 폰 딘클라게와 사랑에 빠져 10년 넘게 교제했다. 연인의 국적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샤넬은 이렇게 대꾸했다. “이 나이에 어떤 남자가 마음에 든다며 나를 우러러봐주는데 당신이라면 그 남자에게 신분증을 요구할 건가요?” 그녀는 남성 편력이 없었다. 한 번도 두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평생 사랑에 빠졌다. 현실을 즐겼던 샤넬, 그녀는 평생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올 상반기 가요계는 조용필과 싸이가 점령했다. 조용필의 19집 앨범과 싸이의젠틀맨은 아이돌 그룹의 음악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다. 조용필의 신작을 지켜본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는 이번 앨범을 위해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음악을 다 섭렵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최신의 음악 스타일을 골고루 수용해 치밀하게 계획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가수로 모든 것을 다 이룬 조용필이 한국을 넘어서기를 원했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해외 반응은 우리 나라만큼은 아니었다. 반면 싸이는 젊은 시절 클럽에서 놀고 점잖은 것에 대해 조롱하던 감성을 그대로 담아강남스타일을 만들었다. 해외 시장을 겨냥하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재미있게 즐기게 됐다. 싸이는 샤넬처럼 현실을 즐겼고, 그것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변동성이 커지고 변화가 빨라지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도 미래보다는 현재에 초점을 둬야 할 때다. 기술, 제품, 시장의 미래 트렌드를 예측하고 계획하기보다 현재 소비자에게 집중하며 동태적 역량을 키우라고 샤넬은 충고하고 있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 capomaru@gmail.com

이병주 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LG경제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창의성, 변화관리, 리더십 등을 연구했다. 저서로 <애플 콤플렉스> <> <3 전략>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89호 Boosting Creativity 2020년 1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