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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ement by Map

명량 일대의 바닷속 샅샅이 파악 이순신은 정보로 10배의 적을 깼다

송규봉 | 138호 (2013년 10월 Issue 1)

 

 

편집자주

DBR은 지리정보시스템(GIS)을 활용해 경영 효율성을 높이거나 혁신에 성공한 사례를 소개하는 ‘Management by Map’ 코너를 연재합니다. 지도 위의 거리든, 매장 내의 진열대든, 선수들이 뛰는 그라운드든 공간을 시각화하면 보이지 않던 새로운 정보가 보입니다. 지도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일본의 군신(軍神)

 

러시아 황제는 격분했다. 일본이 러시아를 향해 전쟁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유럽 발트해(Baltic Sea)에서 황제의 함대가 한반도 동해안을 향해 출발했다. 러시아는 발틱함대를 투입해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황제의 체면을 살리려 했다. 태평양함대만으로는 일본함대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발틱함대를 추가로 파견한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일본을 제압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황제의 함대를 더 많이 배치하려 했다.

 

황제의 위엄을 전달하기에 33000㎞의 길이는 너무 멀었다. 대륙 세 개를 경유한 것이다. 1015일 유럽에서 출발한 발틱함대는 대부분이 증기선이라 중간중간 석탄 공급이 필요했다. 수시로 석탄을 보급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다. 선발대는 영국과 협상이 풀리지 않아 아프리카를 돌아서 아시아를 향해 이동했다. 출발한 지 7개월이 지나서야 대한해협에 닿을 수 있었다. 이동 중 한반도와 일본의 해상조건에 맞는 전투연습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도 1)

 

일본의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한반도 남단 진해에 대기 중이던 연합함대를 출동시킨다. 진해항에서 쓰시마해협으로 가려면 거제도 칠천량을 굽어보고 부산 가덕도를 바라보며 태평양으로 우회해야 한다. 칠천량은 임진왜란에서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 300척이 하루 만에 궤멸된 패배의 바다였다. 동시에 일본 해전사에서 가장 눈부신 승리의 역사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도고 제독은 발틱함대에 승리하기 위해 1년 가까이 준비한다. 러시아함대가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주요 해로마다 정보시스템을 가동했다. 지도상 경위도 10분씩 구분해 구역번호를 정하고 구역별로 함정을 식별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 군함들은 완벽하게 수리를 마쳤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단독, 소규모, 함대별로 엄격한 훈련을 반복했다. 전투계획에 따라 통신, 어뢰공격, 기동훈련을 기상이 허락하는 한 거의 매일 실시했다. 함대의 진형유지, 종렬이동, 가상훈련을 통해 다양한 모의전투를 수행했다.1

 

결전의 날. 도고 헤이하치로는 칠천량 승리의 기억을 뒤로 하고전쟁의 신이순신 장군에게 묵념을 올리며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기원한다.2  러시아 태평양 함대와 일본함대는 전력상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막상막하의 대등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1905 527일부터 28일에 걸친 쓰시마해전에서 일본함대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쥔다. 러시아는 8척의 전함과 5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은 반면 일본은 겨우 3척의 어뢰정과 116명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었다.

 

 

일본 정부는 도쿄의 황궁 정원에서 대연회를 열어 도고를 치하했다. 연회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축하주는 여순항에서 노획한 러시아산 샴페인이었다. ‘동양의 넬슨이라는 별명을 얻은 도고 헤이하치로는 나중에는일본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는다. 도고에 대한 국민적 신망은 높았고 황실에서도 그를 황태자 학교의 교장으로 7년간 초빙했을 정도였다.3  장차 일본 황제의 군사적 지식과 경험의 바탕을 만들어주는 데 도고 제독이 최고의 적임자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군신이 존경한 남자

 

도고 제독은 자신을동양의 넬슨에 버금가는 군신이라고 치켜세우는 말에영국의 넬슨은 군신이라 할 정도의 인물이 못 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독이 있다면 이순신 한 사람뿐이다. 이순신과 나를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도 못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경남 진해에 일본해군의 사령부가 주둔했을 때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연례행사 중의 하나는 통영 충렬사에서 지낸 이순신 장군의 진혼제였다. 일본 해군성의 예산서 항목으로 비용을 지급하고 사령부의 장병들은 당일 진해에서 통영까지 이동해서 진혼제에 참석했다.4

 

이순신의 탁월함은 해군제독이라는 틀에만 갇히지 않다. 이순신의 전쟁경영이란 적을 섬멸하는 전투지휘뿐 아니라 군수, 병참, 보급, 징병, 부상자 처리에서부터 전함제작, 화포제작, 탄약생산, 농사관리, 소금확보에 이르는 전쟁의 모든 국면을 스스로 해결하는 경영의 전 과정에서 드러난다. 국가적 차원의 전쟁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의주로 달아난 피난 조정은 오히려 남해안의 수군 진영에 대해 종이나 탄약 같은 궁중용 소비물품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전시에 지방 관아는 수군에게 일정한 군량을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피난민들의 경작지 이탈과 지방 관아의 부패 등으로 군량의 징수가 어려웠다. 실제로 이순신의 부대는 계사년 한 해 동안 한산수영에서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고 상당수의 병사들이 굶주려 죽는다.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말을 키우기 위해 농사를 금지한 섬들에 농민들이 들어가 곡식을 경작할 수 있도록 조정의 허락을 받아낸다. 이렇듯 이순신이 시련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악조건과 불운한 상황에 어떤 정서도 개입시키지 않는 데 있다. 오직사실사실로만 받아들여 문제해결의 대안을 찾고 창의적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에 전념한 것이다.

  

전쟁의 승부처를 준비하다

 

이순신 장군의 창의적 리더십은 명량해전에서 최고봉을 이룬다. 일본의 도고 제독이 대등한 전력을 바탕으로 리더십을 발휘해 러시아 함대를 참패시켰다면 이순신 장군은 전선의 숫자만 놓고 봐도 12척 대 130척이라는 10배 이상의 전력 차를 극복하고 압승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정서에 휘둘리는 리더십이었다면 12척의 허름한 전선으로 수백 척이 넘는 일본 수군과의 대결에 의연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유년(1597)의 전쟁상황은 긴박했다. 7월 거제도 칠천량에서 조선수군 300척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수많은 지휘관과 병력들이 몰살당했고 원균도 이날 전사했다. 조선수군의 주력이 무너지자 남해안의 제해권은 완전히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제해권을 넘겨받자 호남의 곡창지대를 장악하기 수월했다. <지도 2>에서 볼 수 있듯 남원성은 8월에 함락당했다. 수군이 건재할 때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같은 8월에 일본수군은 남해, 여수, 고흥, 완도를 지나 해남 땅끝마을에서 가까운 어란진까지 진출한다.

 

남해안을 평정하고 서해안을 수중에 넣으면 한반도 남단은 완전히 일본의 통제권 아래에 놓인다. 조선을 제외하고 이런 상황을 가장 꺼려할 나라는 중국의 명나라다. 한반도의 곡창지대가 모두 일본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일본은 필시 장기전에 돌입해 조선군대를 앞세우고 중국대륙을 계속 넘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남해안의 제해권을 사수하느냐, 넘겨주느냐는 당시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전략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꺾어지는 길목에 명량의 바다가 있다. 이 바다는 적군의 승리로 가는 활로이자 아군의 명운이 걸린 최후의 보루였다.

 

 

일본수군 입장에서는 이제 칠천량에서 도주한 패잔병들에게 남은 허술한 12척의 전선만 쓸어버리면 되는 상황이다. 그러니 압도적인 전력을 결집시켜 일거에 판세를 정리할 요량이었다. 칠천량 전투 이후 곧바로 일본수군은 명량해협 직전인 어란진까지 진지를 전진배치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란진에서 30㎞ 떨어져 있는 진도 벽파진에 진지를 틀었던 이순신은 전략적 고려에 따라 전라우수영을 서해안에 가까운 울돌목 안쪽으로 이동시킨다. (지도 3)

 

10배 넘는 적을 상대하는 법

 

명량해전(鳴梁海戰) 1597 916(양력 1025)에 치른 전투다. “915일 맑다. 수가 적은 수군으로서 명량(鳴梁)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다. 그래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이르되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必死則生必生則死)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一夫當逕千夫足懼)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은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출정전야의 비장함이 서려 있다.

 

수적으로 열세에 처한 조건에서 명량을 등에 지고 진지를 구축할 수 없다는 기록은명량(울돌목)’의 자연환경적 특성을 이미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진술이다. 10배 이상의 전력격차를 감당하며 이순신 장군이 의연함과 평정심을 유지한 까닭은 승리의 방책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할 수 있는 작전구상이 완료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확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지도 2>는 한반도 남단 해안선을 따라 주요 해협, 수로, 항만에서 관측한 조류(潮流)의 속도를 표현하고 있다. 명량해협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드는 빠른 조류가 흐르는 곳으로 조류의 속도는 최대 11노트(knot)로 시속 20.4㎞다. 자동차 속도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시속 20㎞는 둔감한 빠르기일 수 있다. 그러나 물이라는 개념으로 볼 때 11노트는 전혀 다른 속도감을 준다. 한강에 홍수가 와서 상류의 수문을 잔뜩 열었을 때 최대 유속은 0.9노트이고 평상시의 유속은 0.5노트이다.5  명량의 최고 조수속도 11노트는 한강에 홍수가 났을 때 유속보다 12배 빠르다는 의미다.

 

이순신의 정보활용법

 

조류가 빠른 곳에서 싸우면 승리는 저절로 보장되는가? 명량해협의 폭은 평균 500m이지만 해협 양안에 암초가 있어 배가 다닐 수 있는 너비는 400m에 불과하다. 명량해협 중에서도 울돌목은 너비가 294m로 가장 좁다. 비좁은 해협에서 싸우면 승리는 손쉬운가?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안목은 단순히 명량해협의 조류속도와 지형을 파악하는 것에 있지 않다. 정보의 취합이 아니라 정보의 활용에서 진가가 드러난다. 하루에 네 번 뒤바뀌는 조류의 특성, 시간대별 유속의 변화, 적군 전선의 특징, 예상 전투대오, 상황별 세부적인 작전지침을 마련하는 창의적인 정보활용에 핵심이 있다.

 

국립해양조사원이 발간하는 <한국연안 조석표>에는 명량조수가 밀물과 썰물로 바뀔 때 보통 9.6노트의 속도를 내는 것으로 관측됐다. 국립해양조사원과 해군사관학교는 명량해협의 6개월간 조류 데이터를 분석해 명량해전 당시의 조류현상을 예측하는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명량해전 당일은 오전 630분부터 남해안에서 서해안쪽으로 밀물이 시작돼 오전 1010분경에 최고속도를 내다 유속이 느려져 1220분경 서해안에서 남해안 방향으로 물살이 바뀌기 시작한다. 정오를 전후로 바닷물의 방향이 조선수군에게 유리한 썰물로 바뀌는 것이다. 1440분에는 가장 강력한 썰물이 일본 전투선들이 대오를 형성한 쪽으로 역류한다. 1856분에 유속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정체상태를 유지하다가 다시 밀물로 바뀐다고 예측했다.6

 

연구 결과대로 상상해보면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밀물이 흘러나갈 때 그 물살의 흐름을 따라 울돌목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일본수군을 순순히 맞이하며 정오 무렵 일자진으로 대치한다. 섣부른 공격 대신 대롱처럼 비좁은 울돌목 해협에 일본수군 130척이 모두 들어와 대오를 형성한 것을 확인한다. 비좁은 해협 안으로 대략 10척씩 10줄 이상 대열을 형성했을 것이다. 다시 강력한 물살이 서해안에서 남해안으로 흘러 일본수군의 뱃머리 쪽으로 조류가 역류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오후 240분 가장 강력한 조류가 일본대오를 향해 쏟아져 들어간다. 한강의 만조홍수에 만나는 유속의 11배에 가까운 속도로 물밀 듯 뱃전을 뒤흔든다. 적군의 대오는 조선군의 화포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물의 힘과 맞서 싸우다 비좁은 해협에서 서로 부딪히며 깨지고 부서져 침몰하게 된다.

 

소설가 김훈은 이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물결은 말처럼 일어서서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밀집대형을 이룬 적의 대열이 거꾸로 흐르는 역류에 휩쓸리면서 서로 부딪혔다. 뒤로 밀리는 적선들이 불타는 적선들과 부딪히면서 깨어져나갔다. 적들은 뒤엉켜서 부서지면서 밀렸다. 나는 일자진으로 밀어붙였다. 살아남은 적들은 저무는 해남 바다 쪽으로 달아났고, 죽은 적들의 시체는 와류에 휩쓸렸다.” 소설 <칼의 노래>에 담긴 명량해전의 가상도다.

 

시련은 창조성의 디딤돌

 

교육심리학자인 스텐버그(Robert Sternberg)는 창의성이 발현되기 위한 6가지 차원을 제시한다. 창의성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1) 지능 - ● 문제의 새로운 정의와 통찰에 관련된 경험지능비판적 사고능력과 분석력과 연관된 요소지능실천력과 관련된 실용지능 2) 지식 -창의적 성과를 내기 위해 필요한 해당 분야의 기본지식 3) 입법부적 사고양식 -사법부나 행정부처럼 틀에 박히지 않고 새롭게 사물을 바라봄 4) 성격 - 모호성에 대한 인내력, 끈기, 성장욕구, 모험심, 자신감, 독립성 5) 내적동기(열정) -자신이 하는 일에서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함 6) 환경적 측면 - 생활현장(영역), 창의성 기대맥락, 창의성 수용자 등으로 구분한다.7

 

스텐버그가 제시한 여섯 번째 요소인 환경적 측면에는 창의성을 기대하는 사회적 맥락에 관한 언급이 있다. 창의성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해당 사회에 문명적합성, 개방성, 정보접근 용이성, 포용성, 관용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상황에서만 창의성이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모진 억압이나 차별적 상황 또는 극단적인 시련의 상황에서도 창의성이 만들어진다고 진단한다. 스텐버그는 대표적으로 유대인의 경우를 들었다.8

 

창조성이 발현되는 환경적 맥락으로 살펴볼 때 이순신 장군이 처해 있는 상황은 긍정적인 상황이 아니라 비관적이고 절망적이었다. 임금과 조정의 물질적·제도적·정신적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상대해야 할 적군은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텐버그의 분석틀을 대입해보면 명량해전의 승리요인은 상황을 새롭게 정의한 분석적이고 실용적인 지능요소와 불요불굴의 성격적인 측면, 그리고 비관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창의적 돌파구를 간절히 원하는 환경적 맥락 등이 중첩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과학적 사실주의

 

1799년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강력한 오스트리아를 대적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주도하는 최초의 작전을 계획하기 위해 며칠 동안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그의 비서인 루이 드 부리엔(Louis de Bourienne)의 회고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거대한 지도를 집무실 바닥에 펼쳐놓은 채 그 위에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책상 위에는 정찰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메모가 적힌 수백 장의 카드가 상자 안에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계획한 양동작전에 오스트리아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를 추측해봤다. 바닥에 엎드린 채 혼자 중얼거리며 공격과 역공의 모든 순열을 일일이 검토했다.

 

부리엔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집무실 바닥의 거대한 지도 위에 누워 핀을 마렝고 마을에 꽂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서 싸울 것이다.” 상상력을 동원한 온갖 시뮬레이션 끝에 승부처를 확정한 것이다. 마렝고 전투(Battle of Marengo)의 승리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퇴각하고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마렝고 전투를 준비하며 나폴레옹은 치밀한 계산과 세심한 계획, 유동적인 상황변화에 대한 다양한 대비책을 검토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운명을 행운에 맡기지 않고 그것마저도 계획의 일부에 포함시켰다.9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 제독을 지낸 니미츠(Chester Nimitz)는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 해군에 비해 현저하게 열세에 놓였던 함대를 지혜롭게 운영해 결국 전세의 역전을 이끌어냈다. 니미츠는 접견실에서 자신을 만나기 위해 대기 중인 장교들을 위해 3가지 질문을 벽에다 걸어놓았다. 1) 계획된 작전은 성공 가능성이 있는가? 2) 실패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예상되는가? 3) 물자와 보급의 측면에서 실행 가능한가? 니미츠는 그의 책상 유리 밑에목표, 공세, 기습, 접촉점에서 병력의 우위, 단순성, 보안, 기동, 병력의 경제적 활용과 협조라는 글귀를 적어 평상시 전투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들에 대한 체크리스트를 비치해놓았다.10

 

나폴레옹은 지도 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상황설정을 통해 승리의 해법을 찾아냈다. 니미츠는 명료한 핵심질문과 체크리스트를 통해 열세의 상황을 인내하며 전세를 바꿔 나갔다. 이순신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창의적으로 활용해 110의 전략 차를 극복했다. 승부처를 만나는 상황은 저마다 다르고 동원할 수 있는 자원도 다르며 리더들의 기질도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눈부신 역전의 사례에는 창의적인 리더십이 발견된다. 낙관적인 상황이 아니라 비관적인 상황에서 창의적 리더십은 더욱 빛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명량해전을 재현하는 축제에 초대된 소설가 김훈에게 한 대학생이 물었다. 이순신 장군이 젊은 세대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김훈은 과학적 사실주의를 언급했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산하를 모두 무기로 활용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인간의 현실을 좀 과학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현실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뿐이에요. 어떤 사태를 보고 이게 내 맘에 드나, 안 드나만 따집니다.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실을 취급하는 방식에 따라 작게는 한 개인사부터 한 국가의 존망이 좌우되기도 한다. 무수한 사실의 홍수 속에서 어떤 사실을 취하고 버릴 것인가? 탁월한 상상력이란 때로는 절박한 상황에서 시작돼 냉정한 사실의 분석에 근거할 때 위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이순신 장군은 말하고 있다.

  

송규봉 GIS United 대표 mapinsite@gisutd.com

송규봉 대표는 ㈜GIS United 대표를 맡고 있으며 연세대 생활환경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GIS를 전공했으며 와튼경영대학원과 하버드대에서 GIS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저서로는 <미국 인터넷산업의 지도> <비즈니스 GIS> <지도, 세상을 읽는 생각의 프레임> 등이 있다.

 

 

 

  • 송규봉 송규봉 | - (주)GIS United 대표
    - 연세대 생활환경대학원 겸임교수
    - 와튼경영대학원, 하버드대 GIS연구원
    mapinsite@gisut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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