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식품 카누
편집자주
※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김현태(서울시립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100원짜리가 있는데 누가 300원짜리를 사먹겠어?”
동서식품 경영진의 반응은 차가웠다. 설탕과 프림을 넣지 않은 고급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커피믹스와 같은 스틱 형태로 300원대에 선보이겠다는 아이디어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고가 이뤄졌던 2010년 당시 커피믹스 시장을 들여다 보면 경영진의 반응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동서식품 ‘모카골드’ 같은 커피믹스가 너무 잘 팔렸다. 2000년대 들어 10년 가까이 두자릿수 이상의 성장률을 보였고 국내 대형마트에 진열된 5만∼6만여 개 상품을 통틀어 가장 잘 팔리는 품목 중 하나였다. 동서식품의 가장 큰 ‘캐시카우’이기도 하다. 최고의 성과를 내고 있는 제품이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잠재적으로 이 제품의 판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신제품에 관심을 갖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커피믹스는 여전히 잘 팔리기는 하지만 성장세는 조금씩 둔화했다. 우후죽순 생겨나는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과 아메리카노로 대표되는 블랙커피에 대한 수요 증가, 다이어트 열풍 등은 커피에 대한 소비 패턴을 점진적으로 변화시켰다. 동서식품은 미래 시장 성장 동력으로 새로운 커피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제품을 만들어야 할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동서식품 베버리지마케팅팀 최상인 부장(50)의 고민은 깊어갔다.
커피믹스의 성공- 소비 환경의 변화
커피믹스가 국내에서 처음 출시된 것은 1976년이었다. 주로 등산이나 낚시 등 레저활동을 할 때 이용하는 니치마켓 제품으로 인식됐다. 야외에서는 커피, 설탕, 프림을 따로 챙기기 번거롭다는 점을 감안해 3가지를 섞은 스틱 형태의 봉지에 넣은 것이 바로 커피믹스였다. 이 제품은 출시 후 15년 넘게 야외에서 즐기는 니치 제품으로만 인식됐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전환기를 맞았다. 다음의 3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우선 사무실 냉온수기의 보급이다. 과거에는 차나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물을 끓여야 했다. 예전에는 사무실에 ‘탕비실’이라는 곳이 있어 물을 끓여 차를 준비하고 설거지도 했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사무실마다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냉온수기가 보급되면서 뜨거운 물을 구하기가 쉬워졌다. 둘째, 기업 복리후생비의 증가다. 직원들 복리후생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기업들은 사무실마다 간단하게 커피나 녹차를 마실 수 있게 구비했다. 셋째, 한국인의 급한 성격도 한몫했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타 마신다는 건 커피 따로, 설탕 따로, 프림 따로 넣어야 하는데 성격 급한 한국인에게 이런 복잡한 절차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의 최고 수혜자는 커피믹스였다. 15년 넘게 야외를 맴돌던 커피믹스는 사무실로 들어와 거대한 시장을 만들어냈다.
블랙커피의 성장
커피믹스 시장은 성장을 거듭했다. 커피자판기는 자취를 감췄고 회의하거나 담배 피울 때, 식사 후 잡담을 나눌 때 직장인들의 손에는 커피믹스를 탄 종이컵이 들려졌다. 2010년에는 커피믹스 국내 전체 소비가 10만 t을 넘어섰다.(표1) 각 기업 사무실은 물론 가게에서도 커피믹스는 필수 품목이 됐다. 하지만 커피믹스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커피 전문점의 등장이다. 한잔당 가격이 3000원 이상으로 비싸기는 하지만 맛 좋은 커피를 파는 전문점이 서울의 대형 빌딩 1층마다 하나씩 들어섰다. 여기에 여성들이 소비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분위기 좋은 커피 전문점은 만남의 장소로 인기를 모았다. 다이어트 열풍도 한몫했다. 커피 전문점의 드립커피나 아메리카노 같은 블랙커피에는 칼로리가 거의 없지만 커피믹스에는 설탕과 프림이 들어 있어 몸무게에 신경을 쓰는 소비자들은 조금씩 커피믹스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동서식품이 파악한 외국계 및 국내 프랜차이즈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 수는 2006년 1500여 개에서 2011년 약 1만5000개로 불어났다. 커피 전문점 열풍은 한국인의 커피 입맛도 바꿔놓았다. 스타벅스코리아에 따르면 최근 국내 스타벅스에서 소비되는 커피를 커피 외에는 아무것도 안 들어간 블랙(아메리카노, 드립, 에스프레소)과 기타 라떼와 모카 등 비블랙의 2종류로 나누어봤더니 판매 잔 수로 5대5가 나왔다. 절반이 블랙커피를 마신다는 얘기다. 블랙커피는 첨가물이 없어 커피 자체의 질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설탕 넣고 프림이나 우유를 넣으면 커피가 좀 질이 떨어져도 다른 맛이 덮어준다. 소비자들은 품질 좋은 원두의 블랙커피를 마시다가 점차 원두커피에 맛을 들였다.
고민을 거듭하던 최 팀장은 다음과 같은 점에 착안했다. 소비자 1인당 마시는 커피믹스 잔 수는 더 이상 늘지 않는다. 커피믹스는 여전히 1년에 10만 t 넘게 팔리기는 하지만 2009년 이후 성장률이 5% 내외로 정체됐다. 소비자들은 이제 커피 전문점 수준의 원두커피를 원한다. 그런데 인스턴트 커피는 추출하고 농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과정에서 최대한 많이 우려내려 하기 때문에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원두커피를 흉내내서 인스턴트 커피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한마디로 원두커피 같은 고급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커피믹스가 환경이 변하면서 저절로 잘 팔리게 된 제품이었다면 이번에는 변화한 환경에 맞는 새로운 커피 제품을 내놓아야 할 차례였다.
카누의 콘셉트와 개발과정
커피 전문점 수준의 고급 인스턴트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대한 커피 전문점이 만드는 커피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전문점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추출해내는 온도는 100∼120도였다. 커피믹스에 들어가는 인스턴트 커피 추출 온도는 180도 정도다. 최대한 많이 우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맛이 떨어졌다. 고급 인스턴스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100∼120도로 추출하는 장비를 따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액체인 커피를 봉지에 담지 못하니 건조를 해야 한다. 향 손실이 가장 적은 동결건조 방식을 사용하자고 했더니 연구소 등 회사 내부에서 난리가 났다. 하루 1t 분량의 커피를 만들 수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만들면 커피를 하루에 100㎏도 못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 팀장은 120도 정도로 추출한 원두커피를 동결 건조하면 향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문점 커피를 100으로 보았을 때 80∼90%는 모방이 가능하다고 봤다. 퀄리티는 높이고 1회용 스틱 형태의 제품인 커피믹스의 사용 편의성은 그대로 둔다는 전략이다. 동서식품은 전체 커피 시장의 30% 정도는 카누가 속한 블랙커피 시장 몫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카누의 콘셉트는 이런 고민을 거쳐 탄생했다.
제조 및 연구인력과의 갈등 신제품 개발 방향은 정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사고의 전환이다. 많은 동서식품 임직원들은 커피는 무조건 동서식품의 커피믹스 브랜드인 ‘모카골드’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가격도 현재 커피믹스의 가격인 100원선에서 내놓아야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카누의 콘셉트를 설명하면 “이게 말이 되느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최 팀장은 연구소에 내려가 사정을 해야 했다. 연구소 자체 공장에 파일럿 라인을 만들어 일단 샘플 생산이라도 해보자고 졸랐다. 상업화는 나중 문제였다.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신제품을 만들자는 마케팅 부서의 요구에 연구소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최 팀장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최 팀장이 연구소 출신이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최 팀장은 1980년대에 동서식품의 최대 히트 상품인 모카골드를 직접 개발한 주인공이었다. 그는 고급 인스턴트 커피의 생산이 가능한지를 알아본 후 한 단계씩 전진하자고 연구소를 설득했다.
기술이 없는 게 기술 커피믹스인 모카골드는 커피 추출 후 건조, 설탕과 프림 추가 등 복잡한 공정을 거친다. 이에 반해 카누는 추출 후 건조해서 원두커피 가루 5%를 배합하는 단순한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 많은 사람들은 첨단기술을 사용하고 복잡한 제조 공정을 거쳐야 더 가치 있는 제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먹거리는 다르다는 게 최 팀장의 생각이다. 원재료에 가까울수록 고품질이라는 판단으로 카누 제조공정에 적용되는 기술을 최대한 줄이려 했다. 하지만 복잡한 공정을 선호했던 기존 조직원들에게 이런 발상의 전환이 쉽지 않았다. 최 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문점의 원두커피는 기술도 없고 설비도 없다. 그래서 맛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볶은 원두 그 자체를 먹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동서식품이 팔고 있는 커피믹스는 모든 첨단 기술이 다 들어가 있다. 가급적이면 손을 안 타는 게 좋은 것 아닌가? 기술을 넣는 게 아니라 기술을 빼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고품질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점을 회사 내부에 설득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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