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s from Classic
한때 우리나라 CEO들의 출신배경이 달라지고 있다는 기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과거에는 많은 기업에서 현장 경험이 있고 다양한 보직을 돌면서 잔뼈가 굵은 인물들을 CEO로 선호했다. 그러나 IMF 관리체제 이후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효율성 위주의 경영과 자금 계획, 프로세스 혁신과 같은 의사결정의 메타 로직이 강조되면서 고도의 예측과 전망을 요하는 재무, 기획, 법무 계열 최고경영자들의 비중이 늘어났다. 이들은 다른 직군의 경영자들보다 훨씬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받기 쉬운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 분석, 구조화, 논리 등을 핵심으로 하는 보직을 거쳤기에 모든 전략적 선택을 데이터 기반으로 보고 과정 하나하나가 맞지 않으면 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과연 철저한 계산과 대비가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인지심리학이나 행동과학에 이론적 기반을 둔 경영전략 연구자들은 대부분 ‘no’라고 얘기한다. 긴장보다 유희를, 예측보다 몽상을 즐기는 경영자들이 훨씬 오래 달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1
불확실한 환경에서 다양한 자원들을 관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19세기의 음악가들에게도 경쟁 환경은 큰 스트레스를 줬다. 예민한 성격에 쉽게 피로함을 느꼈던 천재들은 대부분 단명했다. 멘델스존, 슈베르트, 쇼팽처럼 고도화된 ‘피아니즘(Pianism·피아노 건반을 예민하게 연주하듯이 관현악, 성악 등에서도 고도로 섬세한 선율적 표현과 화성을 지향하는 사조)을 통해 세밀화된 예술세계를 지향했던 작곡가들은 거의 마흔 이전에 죽었다.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위대한 음악인을 넘어서 당대의 패러다임을 주도할 수 있는 오피니언 리더가 됐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성격의 예민함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낭만주의 천재들의 민감성과 전혀 다른 경로를 걸어갔던 예술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아키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다. 대부분의 19세기 작곡가들은 가난, 고뇌, 철학적 몽상과 같은 키워드를 공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상적인 예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극도로 자신을 괴롭히는 인간형이 보편화돼 있었다는 의미다. 반면에 로시니의 행보는 고민하는 예술가의 몸부림과는 전혀 다른 패턴을 보였다. 20살에 혜성처럼 오페라계에 데뷔해 ‘오페라 부파(희극)’만 전문적으로 작업했던 그는 대중의 분석이나 견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자유인이었다. 2주 만에 오페라 한 곡을 썼던 전설적인 일화도 있다. 그는 20년간 39편이나 되는 작품을 쓰며 파리, 런던, 밀라노를 주름잡았다. 그리고 38세에 과감하게 은퇴해 유명 요리사의 길을 걸었던 흔적은 자유로운 천재 로시니의 단면을 대변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을까?
스마트한 바보가 성공한다
조직이론과 경영전략의 거장 제임스 마치(James March) 교수가 1970년대에 남긴 명언이 있다. ‘바보가 되는 기술(Technology of Foolishness)’을 배우라며 예측과 분석 중심의 경영 관행에 일침을 날린 것이다. 그가 강조한 똑똑한 바보(sensible foolishness)라는 개념은 로시니의 삶에도 잘 들어맞는다.2
1792년 이탈리아의 페자로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호른 연주자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밑에서 여러 고초를 겪으며 자랐다. 한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추종했던 아버지는 북이탈리아에 주둔한 프랑스 혁명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친구나 할머니의 집을 전전하며 겨우 살아갔던 로시니는 12살부터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도와야 하는 환경에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커다란 전환점이 찾아왔다. 16살에 볼로냐 콘서바토리에 입학하면서 정식으로 첼로, 피아노, 작곡 등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 시절부터 몽상가 로시니의 기질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교수들은 파이지엘로, 파가니니처럼 고전주의 시대의 색채가 짙은 작품만을 강의했다. 거의 대부분 패턴과 방향을 예측할 수 있게끔 ‘갈란트’ 스타일로 쓰여진 곡들이었다. 그러나 로시니가 깊게 심취한 것은 하이든, 모차르트의 독일 음악이었다. 특히 선율의 조화 외에 화성의 색채감이 강조됐던 모차르트의 작품이 그를 매료시켰다. ‘내가 모차르트처럼 음악을 하면 어떻게 될까?’ ‘내가 쓴 아리아를 모차르트의 작품에 넣으면 어떤 효과가 날까?’ 절제된 표현을 강조했던 이탈리안 오페라에 서민적인 재담이나 무대 장치를 동원하는 것도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한다. 12살에 현악 4중주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했다는 일화도 기행(奇行)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음악학교 친구들은 조숙했지만 어딘가 이상하게 보였던 로시니가 독일 음악에 미친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8살이 되던 해에 거대한 전환점이 생겼다. 불과 3년 차 음악학교 학생에 불과했던 그가 오페라를 작곡해 베니스의 극장에서 상연한 것이다. ‘혼인 계약(La cambiale di matrimonio)’이라는 첫 번째 작품이었다. 한때 문화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의 명문 음악학교에서 독일 음악을 중얼거리고 다녔던 로시니가 작품을 초연했다는 소문은 여러 극장과 계약주들에게로 퍼져 나갔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를 관람했던 북이탈리아의 프랑스 총독은 내무장관에게 ‘서른 살이 되지 않은 마에스트로 로시니’를 예찬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사실 로시니의 오페라 작곡은 거의 우연에서 시작했다. 학교에서 칸타타 작곡으로 우등상을 탔던 경험을 살려 평범한 구상 수준에서 썼던 작품이 ‘혼인 계약’이었다. 그러나 청중은 기존의 고전주의 오페라와는 다른 서곡(overture) 연주와 연기가 강조된 독창 파트에 열광했다. 심지어 그의 첫 번째 전기작가였던 스탕달은 로시니가 이미 10대에 치마로사, 모차르트와 대등한 정도의 역량을 평가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필립 고세(Philip Gosset)를 비롯한 로시니 연구자들은 로시니가 정형화된 레슨과 교수법을 바탕으로 연습하는 데 집중했다면 불가능한 시도였을 것이라고 한다. 꾸준한 분석과 계산, 훈련이 아니라 상상과 직관의 힘이 그를 역사적인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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