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기대관리
1996년 닷컴버블이 한창일 때 미국 FRB 의장이었던 Alan Greenspan이 주식시장의 이상 과열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irrational exuberance’라는 표현을 썼다. 이후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인 Robert Shiller가 같은 제목의 책에서 시장의 비정상적 과열 현상을 경계하고 원인을 분석하면서 이 단어가 관용적 표현으로 자리를 잡았다. Shiller 교수는 시장 전체의 ‘비이성적 판단’에 의한 과열 현상이 거시경제 전체의 버블, 나아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을 제공하는 수준까지 이어진다면서 인간 심리에 의해 경제가 좌우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사람들이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제한된 정보를 이성적 판단의 틀로 걸러내서 불확실성을 제거하면서 마련된다. 여기서 주어진 정보가 너무 빈약하거나 이성적 판단의 틀이 약하거나 불확실성이 너무 클 때 사람들은 이성에 따른 합리적 판단보다는 감성과 감정에 치우친 비이성적 판단을 하게 된다. 이는 과열된 시장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냉각된 시장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의 경우 뉴스나 인터넷, 주식 카페, 지인 등을 통해 투자정보를 얻는다. 증권사 리포트나 회사의 재무적 상황을 직접 공부해서 투자를 결정하는 경우는 전체의 10% 미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기관투자가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정보와 분석틀을 가지고 판단 근거를 마련하지만 여전히 투자의사를 결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투자자들이 올바른 결정을 하도록 하고 나아가 기업이 투자자(주주)들과의 관계를 적절히 관리하기 위해서는 투자자들이 투자대상(주식)에 대해 올바른 기대를 갖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른바 기대관리(Expectation Management)다. 고객의 기대를 관리하는 것은 새로운 상품이나 개봉하는 영화, 콘서트나 공연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또는 시험감독을 하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냉정하고 엄격한 목소리로 ‘부정행위를 하면 바로 F를 주겠다’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기대관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기업과 주주 간의 관계에서 기대관리는 다른 영역에서보다 한층 복잡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주가라는 가격 변수가 연결돼 있는 것은 물론 기업 가치와 존재 의미 등 보다 원론적인 부분과 맥이 닿아 있는 문제기 때문에 그렇다. 회사의 가치는 그 회사가 얼마나 잘 보여지는가(Visibility), 즉 투자자의 인지도와 지대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은 Merton이 1987년 논문에서 이론과 실증분석으로 잘 보여준 바 있다.2 Lehavy와 Sloan의 2008년 논문에서는 회사의 주식가격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내용이 실증 분석됐다.3 투자자의 기대관리가 어떤 회사의 가치와 주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기업이 투자자의 기대관리를 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해진다. 그렇다면 기업은 과연 어떤 신호를 시장에 보내서 투자자들의 긍정적 기대 심리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보다 자세히 알아보자.
시장에서의 정보는 비대칭적이다
주식시장은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투자자들이 무수히 다양한 회사들 중 대상을 골라 투자하기 위한 시장이다. 40년 전 George Akerlof는 ‘Market for Lemon’이라는 논문에서 중고차시장, 보험시장 등에서 정보의 비대칭이 가져오는 시장 왜곡현상을 증명해 보인 바 있다.4 중고차시장에서 자동차를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는 자동차 정보에 큰 차이가 있다. 구매자 중에는 자동차 전문가도 있고 오늘 막 운전면허를 딴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누구든 중고차 시장에 나온 자동차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반대로 중고차 매매 딜러는 보유하고 있는 차의 종류와 상태 등을 상세히 알고 있다. 보험시장의 경우 보험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병력이나 몸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보험회사는 그렇게 알지 못한다. 이러한 정보 비대칭은 역선택(adverse selection)을 낳는다. 정보 비대칭이 정상적인 거래를 막고 결국 품질이 낮은 상품만 시장에 남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좋은 품질의 중고차를 지닌 매도자가 시장을 떠나고 건강한 신체를 지닌 피보험자가 보험회사와 계약을 맺지 않게 되는 것이다.
주식시장에도 주식시장의 다양한 정보와 지표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기관투자가와 내부 정보를 갖고 있는 기업 임직원 및 그 가족 등 고급 정보를 가진 투자자가 있는 반면 신문이나 증권 정보 사이트, 지인의 조언 등에 의존하는 일반 투자자가 존재한다. 이들이 같은 시장에서 함께 투자하고 있는 상황은 어쩌면 시작부터 불합리한 게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정보가 비대칭적인 상황(Information Asymmetry)에서 내일의 주식시장을 예측하고 성공적인 투자를 하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라면 누가 이길 확률이 높은지는 자명하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주식시장도 레몬시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때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이 기업의 IR이다. IR은 주식시장이라는 Platform에서 이질적인 투자자들을 상대로 기업이 펼치는 시그널링 게임(Signaling Game)5 이다. 투자자들은 기업이 주는 시그널을 토대로 투자 대상에 대한 기대를 갖는다. IR의 출발은 투자자에 대한 책임의식이라는 도의적 명분에 근거하지만 기업 내부에서 생산한 IR 자료들을 시장과 공유해서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한 투자자들의 불확실성을 제거함으로써 주식시장의 레몬시장화를 막고 기업의 주가가 정당하게 책정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지닌다.
신뢰성 있는 시그널링
우선 IR에 나설 때 기업이 가져야 할 마인드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기업은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의 우월함을 알리기 위해 제품 품질을 보증하고 신제품을 광고하는 데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시그널은 시장에서 일어나는 역선택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주가를 올리는 것이 IR의 목적이자 효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동의할 수 없는 얘기다. 주식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움직이는 주가는 누구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 IR로 주가가 일시적으로 크게 올랐다면 오히려 이상 신호로 봐야 한다. 다만 올바른 IR 활동이 지속된다면 경영진이 생각하는 적정한 기업가치와 시장 주가의 괴리가 줄어들 수 있다. 다시 말해 경영진이 갖고 있는 정보와 투자자, 혹은 애널리스트가 알고 있는 정보 사이에 존재하는 비대칭성이 지속적인 IR 활동으로 줄어들면서 이로 인해 주가가 오를 수 있다. 이때 주가는 IR 활동의 직접적인 효과라기보다는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결과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상장기업들의 시그널링은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신뢰성, 적극성, 공정성을 갖춘 IR 자료들을 반복적으로 제공해서 투자자들이 기업에 갖는 기대 수준을 높이고 명성(reputation)을 쌓아야 한다. 꾸준히 신뢰도 높은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 긍정적 명성을 쌓으면서 시장에서 투자자들에게 인정받게 되고 기대 수준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회사 가치에 대한 객관적이고 신뢰성 있는 자료들은 애널리스트들의 리포트가 대표적인데 O’Brien과 Rhushan(1990),6 Bushee와 Miller(2012)7 는 애널리스트들의 리포트와 기관투자가들의 투자 간 상관관계를 실증분석으로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국내 사례 중에는 IR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정비해서 정확한 대상에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나선 결과 투자자들의 관심을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한 기업이 있다. 그 결과 10% 미만이었던 기관투자가 비율이 30%로 높아졌고 주가도 3배 이상 오르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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