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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의 전략적 감수성과 스피드

김선우 | 101호 (2012년 3월 Issue 2)


 

“매일매일이 발전 그 자체라야 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은 정지가 아니라 후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걸음 두 걸음씩이라도 우리는 매일 발전해야 한다. 매일 발전하지 않으면 추월당하고 추월당하다가는 아예 추락하게 되고 그 추락은 중간에 세울 수도 비끄러맬 수도 없다.” -정주영, <이 땅에 태어나서>

 

“이곳에서 제자리에 머물려면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한다. 어디든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그보다 적어도 두 배는 빨리 뛰어야 한다.” -레드 퀸, <거울 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 Glass>

 

고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1915∼2001)는 무엇이든 빨리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940년 서울 아현동의 자동차 수리공장을 화재로 잃은 그는 당시 논밭만 있던 신설동에 무허가 자동차 정비업소를 냈다. 서울 중심가에서 벗어난 위치였지만 고장 난 차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수리기간이 짧은 덕분이었다. 다른 수리공장에서는 열흘이 걸릴 고장이 아산의 수리공장에서는 사흘이면 족했다. 아산은 차를 발로 쓰는 사람은 빨리만 고쳐주면 수리비가 비싸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수리 기간을 줄이는 대신 높은 수리비를 청구했다. 25세였던 아산은 화재로 잃은 돈을 다 갚고도 남을 돈을 벌었다.

 

아산은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전방으로 가는 미군 병사 10만 명이 며칠 묵을 숙소를 하루에 3시간만 자며 한 달 만에 지었다. 또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방한할 때 묵을 숙소를 약속했던 15일보다 빠른 단 12일 만에 운현궁에 만들었다. 화장실과 난방시설이 관건이라고 생각한 아산은 계약서에 사인을 하자마자 자신이 한번도 보지 못한 양변기를 찾아 서울의 고물상부터 뒤졌다. 그는 또 한겨울에 보리밭을 떠다가 부산의 유엔군 묘지를 푸르게 단장해 모두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한겨울이었기 때문에 잡초건 잔디건 무조건 푸르기만 하면 된다는 조건을 잘 이용한 셈이다. 이후 미8군 공사는 아산의 표현에 따르면손가락질만 하면 다 현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스피드와 추진력으로 신용을 쌓았고 신용을 쌓은 후에는 이 강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숙소는 기간 내에 공사를 마치면 공사비를 2배로 준다는 계약조건이 있었고 유엔군 묘지 단장은 이미 보리밭을 염두에 두고 있던 아산이 미국 사령부에 공사비를 3배로 요구했다.

 

맡는 공사의 규모가 커진 후에도 공사기단 단축은 아산의 트레이드 마크로 남았다. 경부고속도로, 한국 최초의 조선소 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 공사 등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공사를 아산은 빠르게 끝마쳤다.

 

이브 도즈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2008년 저서 <빠른 전략(Fast Strategy)>에서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혁신을 이끌어 내는 능력전략적 민첩성(strategic agility)’이라고 정의했다. 도즈 교수는 전략적 민첩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상황을 인식하고 분석해 이를 즉시 이용하는 통찰력인전략적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기적인 세부 전략을 꼼꼼하게 세우는 사람보다는 고객과 시장의 흐름에서 미래의 패턴을 읽어 내는 데 능한 사람이 전략적 감수성이 뛰어나다는 설명이다. 아산만큼 뛰어난 전략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전략적 민첩성의 본보기가 되는 경영자가 또 있을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 격인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레드 퀸의 말을 토대로 시카고대의 생물학자 리 반 베일런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빨리 뛰어야 한다는레드 퀸 효과(Red Queen Effect)’ 이론을 만들어낸 것은 1973년이었다. 아산의 자서전이 땅에 태어나서 1998년에 나왔지만 일화들을 살펴보면 아산은 이미 1930년대부터 발에 땀이 나도록 빠르게 뛰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아산에게는 무모하다는 평가와 함께 불도저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불도저가 아니라 몇 수 앞에 대한 치밀한 계산을 마친 상태에서 돌진한생각하는 불도저였다. 그가 빨리 뛰는 동시에 지치지 않고 오래 뛸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전략적 감수성 덕분이었던 셈이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필자는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인문지리학을 전공하고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1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문화부, 경제부, 산업부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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