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경쟁에서 역량 경쟁으로
‘경쟁’은 경영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다. 독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 경영은 나 홀로 벌이는 게임이 아니라 언제나 상대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벌이는 상대적인 게임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남과 달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한 환경을 의미한다. 경영자들은 오래 전부터 경쟁자와 뚜렷이 구분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일반적으로 경쟁이라고 하면 주로 ‘제품(혹은 서비스) 경쟁’을 떠올리게 된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나이키와 아디다스, 델타와 아메리칸 항공의 경쟁은 콜라, 운동화, 항공 서비스 등 자신들이 생산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놓고 벌이는 기업 간 경쟁을 의미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제품 경쟁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최종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토로라는 휴대전화 시장에서 고전하다가 2004년 하반기 회심의 신제품을 출시했다. 바로 ‘레이저(razor, RAZR)’라는 브랜드의 초슬림 휴대폰이었다. 레이저는 복잡한 기능보다 디자인이 더 중요하다는 화두를 던지면서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모토롤라가 제시한 신제품 콘셉트는 명확했다. 휴대전화 두께를 얇게 만드는 것이다. 얇게 만들려다보니 꼭 필요한 기능만 넣었다. 레이저는 휴대전화를 닫은 채로 14.5㎜라는 두께와 100g도 채 나가지 않는 무게를 자랑했다. 모토로라는 레이저를 앞세워 휴대폰 시장에서 매출과 점유율을 높였다. 2005년 3분기에는 레이저 덕분에 모토롤라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13.5%(2004년 기준)에서 18.7%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후 모토로라는 마땅한 후속 히트작이 없었다. 결국 당시 휴대전화 1위 업체였던 노키아는 물론 삼성전자와 LG전자에도 뒤처졌다.
모토로라의 사례에서 보듯 경영자들은 경쟁을 단순히 눈에 보이는 제품(혹은 서비스) 측면으로만 한정했을 때 범할 수 있는 치명적인 오류를 경계해야한다. 모토로라의 경영자도 이를 간과했다. 휴대전화 산업에서는 히트 제품 출시도 중요하지만, 더 신경 써야 할 점은 우수한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역량(competence)을 구축하는 일이다. 물론 역량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운 좋게 신제품을 히트시킬 수 있다. 그러나 유행이 바뀌거나 모방 제품들이 범람하면, 모토로라 사례처럼 1∼2개 히트 제품만으로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경쟁을 제품 측면에만 국한하지 말고 역량 측면으로 확장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때 역량 경쟁이란 제품 경쟁처럼 당장 고객들 눈앞에 보이는 경쟁은 아니지만, 우수한 자원이나 능력을 확보하려는 기업 간 경쟁을 의미한다. 인력과 자본이 거래되는 노동 시장과 자본 시장을 요소 시장(factor market)이라고 한다면, 역량 경쟁은 바로 이런 요소 시장에서 벌어지는 경쟁을 의미한다. 또 역량 경쟁은 구매가 이뤄지는 실제 시장이 아닌 가상의 시장에서 경쟁하는 경우도 포함한다. 예컨대 노동 시장에서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기업 간에 경쟁하는 것은 요소 시장에서 벌어지는 역량 경쟁의 좋은 예다. 이와 함께 기업들이 앞다퉈 미래를 위한 기술 개발에 투자하는 경우도 가상 시장에서 벌어지는 역량 경쟁의 좋은 사례다. 이런 역량 경쟁의 개념은 경영자들로 하여금 단기적으로 제품에만 집중하는 것에서 벗어나,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제품의 기반인 탁월한 역량에 초점을 맞추는 데 도움을 준다.
1901년 설립된 질레트(Gillette)는 기술 개발과 브랜드 혁신을 통해 면도기 산업을 개척한 선두기업이었다. 질레트는 카트리지(cartridge) 방식의 탁월한 제품과 혁신적인 디자인, 뛰어난 광고와 강력한 브랜드 파워 덕분에 면도기 사업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경쟁사인 빅(BIC)이 일회용 면도기(disposable razor)를 선보이면서 시장 판도에 변화가 일었다. 빅은 값싼 플라스틱 제조 방법을 개발했고, 볼펜과 라이터와 더불어 면도기를 효율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유통 경로를 개척했다. 급기야 유럽 시장에서 빅은 질레트를 물리쳤고 여기에 자극 받은 질레트는 미국 시장을 지키기 위해 1976년 서둘러 ‘굿 뉴스(Good News)’라는 브랜드의 일회용 면도기를 시판했다. 하지만 문제는 질레트의 낮은 수익률이었다. 경쟁사인 빅에 대응하기 위해 저가의 일회용 면도기에 주력하다보니 질레트의 매출과 시장 점유율은 늘어도 수익성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질레트의 가장 큰 오류는 당장 눈에 보이는 제품 경쟁에 함몰됐다는 점이다.빅이 출시한 일회용 면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유사 제품을 출시한 것이 질레트가 취한 조치의 전부였다. 그러나 애초에 일회용 면도기를 시장에 선보였던 빅과, 카트리지 방식의 고급 면도기를 생산했던 질레트는 서로 다른 역량을 갖고 있었다. 빅의 핵심역량은 플라스틱 제조공법을 중심으로 한 원가 경쟁력이었다. 빅은 값싼 면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저렴한 생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가의 일회용 면도기를 팔아도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반면에 질레트는 상황이 달랐다. 질레트의 핵심역량은 원가 경쟁력이 아니라 고기능 제품을 설계할 수 있는 R&D 역량과 브랜드 파워였다. 질레트는 전통적으로 막대한 R&D 투자를 통해 고급 제품을 출시하고, 이를 통해 높은 마진을 확보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가 제품인 ‘굿 뉴스’의 출시는 질레트에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사실 ‘굿 뉴스’는 질레트의 핵심역량과는 거리가 먼 제품이었다.
다행히 질레트는 자신이 범한 실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어차피 질레트는 일회용 면도기 시장에서 경쟁사인 빅을 압도하기 어려웠다. 대신 질레트는 면도기 산업의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는 역량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빅의 싸구려 일회용 면도기 제품에 단순 대응하는 게 아니라, 높은 품질의 고급 면도기 제품이 시장의 주류를 형성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질레트는 전략을 바꿔 자신의 핵심역량을 활용한 제품 혁신에 주력했다. 그 결과 1990년 ‘센서’라는 히트 제품 출시를 필두로 1993년 ‘센서 엑셀’, 1998년 ‘마하3’, 2002년 ‘마하3 터보’, 2004년 ‘마하3 파워’, 2006년 ‘퓨전’에 이르기까지 혁신적인 프리미엄 제품들을 잇달아 선보이면서 면도기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