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가지 이론은 모두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고객의 직·간접적인 경험의 총체인 브랜드를 무조건 기업의 관점에서만 분석하고, 고객의 생각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힐(Hill)과 레더러(Lederer, 2001)는 고객 지향성을 중심으로 브랜드 포트폴리오 관리를 주장하면서 분자 구조 모델을 제시했다.
이들은 철저히 고객의 시각에서 전략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브랜드와 관련한 핵심 연상 및 이미지에 관한 멘탈 네트워크를 측정했다. 이를 통해 브랜드 간 영향력의 상관관계 및 각 브랜드가 고객의 구매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의 정도를 다차원적으로 파악했다. 이들의 멘탈 네트워크는 분자 구조로 이뤄진 지도의 형태를 띤다. 개별 브랜드들은 원자의 형태를 갖는다. 각각의 형태별 크기, 위치, 연결의 두께와 길이는 고객이 해당 브랜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분자 구조에서 중앙에 위치한 브랜드는 ‘선도 브랜드’로서 소비자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브랜드다.
원자의 크기, 색깔, 위치는 각 브랜드의 특성을 표현한다. 이때 원자의 크기는 해당 브랜드의 역할을 의미한다. 즉 브랜드 포트폴리오 내에서 가장 큰 원자는 ‘선도 브랜드’를, 중간 크기의 원자는 ‘전략 브랜드’를, 그리고 가장 작은 원자는 ‘지원 브랜드’를 의미한다. 원자의 색깔은 해당 브랜드가 고객의 구매 의사 결정에 영향을 주는 정도를 나타낸다. 원자의 위치는 개별 브랜드 간 근접성 정도를 의미한다. 연결 고리의 두께는 브랜드 담당자가 해당 브랜드를 통제할 수 있는 정도를 나타낸다.
브랜드 포트폴리오 모델의 한계
앞서 언급한 다양한 포트폴리오 모델들은 모두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이론적 근거와 실무적 유용성이 빈약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특히 아커와 조아킴스탈러의 모델은 각 축에 대한 명확한 개념과 기준이 없기 때문에 특히 그랬다. 일부에서는 이를 BCG 매트릭스와 연결지어 각각의 축에 시장 점유율과 잠재적 성장률을 대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결과의 타당성과 신뢰성에 의문을 낳을 뿐이다. 사실 BCG 매트릭스도 기업의 전략 선택에 영향을 주는 요인을 시장 점유율과 향후 성장성이라는 단 2가지로 단순화했다는 점 때문에 자주 비판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 정도의 구체적 기준도 없이 BCG 매트릭스의 축을 차용하는 모델을 비판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경영학 본질은 ‘측정에 기초한 관리(measura-ble is manageable)’다. 정량적 측정이 불가능한 기법이라면 실무 현장에서 크게 환영받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사실 아커와 조아킴스탈러의 모델이 등장했을 때는 많은 기업에서 앞다퉈 이를 브랜드 관리의 지침으로 삼았다. 여기에는 아커 교수의 개인적 유명세가 상당히 작용했다. 잘 알려진 대로 아커 UC버클리 하스 경영대학원 교수는 브랜드 자산(brand equity) 개념을 창시한 마케팅 분야의 석학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 분야의 거두가 만든 모델이라 해도 구체적인 활용 방안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효용은 낮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모델은 기업들의 뇌리 속에서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했다.
브랜드 포트폴리오 관리의 대안
이 와중에서도 선도적인 일부 기업들은 자사의 사업에 적합한 자신만의 포트폴리오 관리기법을 보유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들의 전략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존 브랜드 포트폴리오 모델에 의존하지 않고 자사만의 브랜드 포트폴리오 관리 방법을 개발했다. 현대카드는 신용카드업계 최초로 개별 브랜드 중심의 마케팅을 구사하며 업계의 룰을 확 바꿨다. 현대카드가 현대카드M을 출시할 당시, 경쟁 카드회사들은 개별 카드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마케팅이 아니라 자사의 기업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우는 마케팅을 펼쳤다. 이 와중에 현대카드가 ‘기업’이 아닌 ‘상품’으로 차별화를 시도한 승부를 걸자 신용카드 업계는 술렁였다. 현대카드는 M 이후 M, A, T, O, W 등 다양한 특성을 지닌 알파벳 카드를 속속 출시하며 개별 카드의 장점을 부각시켰고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다른 카드회사들도 잇따라 다양한 개별 카드를 출시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대부분의 카드회사가 다양한 소비자 층을 각각 공략하기 위해 십수 개의 개별 카드를 내놓고 있다. 업계의 개별 카드 브랜드 개발을 촉진한 결정적 계기가 바로 현대카드M의 성공이었던 셈이다.
둘째, 브랜드 관리에도 집중과 선택이 필요하다. 유니레버는 1999년 당시 무려 1600개의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었다. 자원의 중복과 낭비가 불가피했을 뿐만 아니라 최종 고객에게 제품을 전달하는 유통 시스템도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에 유니레버는 브랜드 포트폴리오 재조정을 통해 전체 브랜드의 25%에 해당하는 400개의 파워 브랜드에만 60억 달러의 광고 및 판촉비를 집중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유니레버는 브랜드 파워가 강하고 재무성과가 좋은 <도브> 브랜드의 카테고리를 확장해 적극적인 성과 창출을 시도했다. 경쟁 브랜드와의 차별성이 강한 도브 브랜드의 파워를 이용해 유니레버는 새롭게 데오드란트 시장에 진출했다. 그 결과, 첫 해에만 미국 내에서 79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4.7%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했다. 이는 경쟁사 P&G의 브랜드 올드 스파이스(old spice)와 비슷한 수치였다. 반면 브랜드 파워는 약하지만 수익성이 좋은 브랜드는 비슷한 카테고리의 브랜드로 통합시켰다. 유니레버는 수익성은 좋았지만 브랜드 파워가 약했던 헤어 젤 브랜드 그룸 앤드 클린(Groom & Clean)을 샴푸 브랜드인 수에브(Suave)에 통합시켰다.
셋째, 브랜드 파워가 약해 공격적 확장이 어렵다면 굳이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지 말고 기존 브랜드를 인수해야 한다. 호텔 체인 매리어트는 최상급 호텔 시장에서 매리어트 브랜드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판단 하에 리츠 칼튼을 인수했다. 당시 리츠 칼튼의 재무 상태가 나빠 회사 내부의 반대 의견도 많았지만 매리어트 경영진은 재무제표 상의 손실액보다 리츠 칼튼의 고급 이미지가 아직 손상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매리어트는 자신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분야에서는 매리어트의 브랜드를 이용하고 그렇지 않은 시장에서는 인수 브랜드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매리어트는 리츠 칼튼, 르네상스, 라마다 등 인수한 브랜드에 자사의 경영 노하우를 접목시켜 해당 회사의 재무성과를 개선하고 전 세계로의 확장 기반을 마련해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개별 호텔 브랜드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각각의 특성은 손상시키지 않은 채,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선택 옵션을 제시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했다.
세계화의 물결과 소비자의 권리가 날로 중요해지는 상황에서는 결국 발 빠른 준비만이 미래의 브랜드 경쟁력을 결정할 것이다. 이제 브랜드 포트폴리오 관리 분야에서도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과거에 개발된 모델 중 자사에 적합한 모델을 선택하건 신규 모델을 개발하건 브랜드 포트폴리오는 향후 모든 기업들에 필수불가결한 관리 기법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국내 기업들 또한 진취적 자세로 자신만의 브랜드 포트폴리오 관리 기법을 마련, 향후 국내외에서도 글로벌 브랜드의 위상을 갖춘 브랜드들이 많이 등장하기를 희망한다
손일권 소장은 한양대에서 마케팅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브랜드스톡 연구소장, 유나이티드 브랜드 컨설팅 이사, 한양여대 겸임교수, 문화재청 혁신컨설팅 위원 등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브랜드 아이덴티티> 등이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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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힐·크리스 레더러 지음, 윤경구·민민식 역(2008), 브랜드 포트폴리오 전략, 김앤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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