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4일 이건희 삼성 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이 회장은 복귀 소감에서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고경영자(CEO)가 주도하는 강력한 혁신 바람이 불어올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2년 전 이 회장이 물러날 때 앞으로 삼성의 미래는 자율과 창의, 아래로부터의 혁신에 달려 있다는 안팎의 분석이 많았다. 삼성의 한 전자계열사 대표는 “모두의 실천적 참여와 집단 지성을 통해 새로운 다이내믹스를 만들어가야 한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삼성은 아래로부터의 창조적 혁신을 통해 새로운 사업 모델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삼성이 머뭇거리는 사이 경쟁자들은 창의성과 개방성을 무기로 게임의 룰을 바꾸는 파괴적 혁신을 들고 나왔다. 반면 삼성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핵심 경쟁력으로 하는 과거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경영자가 자율과 창의를 강조해도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조성되지 않으면 직원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승진·보상 등 인사 제도는 기존 틀을 유지하면서 직원들에게 과거와 다른 행동 양식을 요구한다면 변화는 공염불에 그치고 만다.
실제 삼성생명은 2008년 직원들이 넥타이를 매지 않도록 했다. 얼마 전에는 티셔츠와 면바지 차림의 캐주얼까지 허용했다. 임직원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북돋우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 변화가 실질적인 변화로 연결되기까지 수많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인사나 보상, 조직 문화가 바뀌어야 하고 직원들도 변화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캐주얼을 입더라도 과거의 인사 관행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진심으로 변화에 나서는 직원들은 소수에 그칠 것이다.
외부에서 영입된 우수 인력들도 창의성을 발휘하기는커녕 삼성 문화에 적응하는 데 급급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혁신 전담팀을 설치하고 각 부서의 우수 인력을 차출해 대대적인 혁신에 나서더라도 게임의 룰을 바꿀 혁신적 사업 모델을 발굴하기는 어렵다.
또 삼성은 여전히 계열사와 사업부 단위의 단기 성과를 기초로 한 외재적 보상을 중시하고 있다. 따라서 계열사 간 협력이나 외부와의 협업을 통한 개방형 혁신은 아직 요원하다. 사장단 회의에서 금융계열사 간 공동 마케팅을 추진해도 각사 중간 관리자들은 적극적으로 실행하지 않았다. 삼성은 1984년부터 GE와 합작해 의료 기기 사업을 추진했지만 다른 삼성의 사업에 비해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국 GE와 결별했다.
개인 간, 회사 간 경쟁에서 탁월했던 삼성의 ‘핵심 역량(core competency)’이 오히려 ‘핵심 경직성(core rigidity)’으로 탈바꿈해 성장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세계적인 경영학 석학인 싱가포르국립대 장세진 석좌교수는 기자와 만나 “삼성이 과거 장점을 모두 유지하면서 전혀 다른 성격의 새로운 장점까지 보유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위로부터의 혁신에 익숙한 삼성이 아래로부터의 혁신이나 개방형 혁신을 위한 새로운 도구를 도입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에 적합한 조직 문화를 구축하고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지 못한다면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협업을 장려하는 조직 문화, 실패를 용인하는 것을 넘어 실패를 장려하는 혁신적인 제도가 필요하다. 기존 단기성과 중심의 점진적 혁신이 아니라 탐색(exploration) 관점에서 혁신적 사업 모델을 발굴할 조직을 만들고 힘을 실어줄 필요도 있다. 외부에서 우수 인력을 채용할 때에도 억지로 삼성 스타일에 맞추려 하지 말고 각자의 장점과 경험을 살릴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
이 회장이 복귀하면 삼성은 최대 장점인 적시 의사결정과 대규모 투자 역량을 살려 다시 성장의 시동을 걸 것이다. 하지만 20년 30년 후의 먼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조직의 DNA를근본적으로 바꾸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조직문화의 변화와 정착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CEO의 결단이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