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IT·전자 전시회 CES에서는 오랜만에 일본 기업들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달 탐사 프로젝트 ‘아르테미스 Ⅲ’에서 사용할 장비로 니콘의 미러리스 카메라 ‘Z9’을 채택해 니콘 부스에 관심이 쏠린 가운데, 소니와 도요타는 차세대 모빌리티 기술을 선보이기 위한 대형 부스를 꾸려 화제를 모았습니다.
실제로 CES 현장에서는 “Japan is back(일본이 돌아왔다)”이라는 말이 회자됐고 블룸버그는 이를 “디플레이션 탈피 이후 제조업 중심의 르네상스”로 평가하면서 히타치·다이킨·일본제철과 같은 B2B 기업들이 ‘일본 부활의 조용한 중심축’이라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장기 침체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일부 제조업체가 디지털 혁신, 기술 고도화, 글로벌 M&A(인수합병) 전략을 구사하면서 산업적 재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고 있습니다. 인구 감소와 공급망 분절 등 한국과 유사한 구조적 문제를 안고도 일본이 반등한 배경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최근 주요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일본 배우기’ 바람이 일고 있는 이유도 우리와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일본이 먼저 출구를 찾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제조업 부활의 대표적인 사례로 종종 히타치가 꼽힙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일본 제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를 냈던 히타치는 AI·빅데이터 기반 디지털 솔루션 플랫폼 ‘루마다’와 ‘사회 이노베이션’ 전략을 통해 반전을 이뤘습니다.
철강산업의 글로벌 재편 속에서 일본제철의 전략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2023년 일본제철은 미국의 대표 철강기업 US스틸과 인수 계약을 추진하면서 세계 철강산업에 충격을 줬습니다. 미중 패권경쟁과 미국의 리쇼어링 정책이 맞물린 상황 속에서 내수시장 한계를 돌파하고 자원·수요·생산기지를 동시에 확보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이는 일본 기업들이 과거의 보수적 경영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글로벌 확장 전략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일본 기업들의 또 다른 강점은 인력 전략에서 드러납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퇴사자를 위한 ‘웰컴백 채용’ 제도를 운영해 수백 명의 인재를 재고용하고 있으며, 소니와 히타치는 각 직원들이 상대 기업에서도 일정 기간 동안 일할 수 있게 하는 인재 교류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해 연구개발(R&D) 역량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대기업들이 잇따라 알럼나이(Alumni, 퇴사자 재채용) 채용을 공식화했을 정도로 인력난에 대응하는 전략 역시 체계화되고 있습니다.
일본 역시 미국발 보호무역 기조를 비롯한 대내외 불확실성의 파고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어 경제 전반이 완연한 회복세를 맞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사라질 뻔한 주요 제조기업들의 부활이 경기 회복에 순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이러한 반전이 결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30여 년간의 장기 구조조정과 기술 집중, 디지털 전환, 글로벌 네트워크 확장과 같은 ‘전략적 인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녹록지 않습니다.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 투자 정체, 전략 부재, 조직 경직성으로 인해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습니다. 디지털 전환이나 해외 인수합병, 인사 전략 등에서 전면적인 혁신에 나서지 않는다면 새로운 글로벌 질서 속에서 더욱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위기 진단이 아니라 위기를 전략으로 바꾸는 장기적 리더십과 실행력입니다. 잃어버린 30년을 견디며 무대 중앙으로 돌아오고 있는 일본 제조기업들의 사례를 통해 ‘우리의 시간’을 누리기 위한 전략을 모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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