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Column
1월 열린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 2022’는 흥행 여부만 놓고 보면 실패한 행사였다.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구글, 아마존, 메타 등 글로벌 기업들이 개막 직전에 무더기 불참을 선언했다. CES의 메인 전시관이자 글로벌 대기업 부스 위주의 라스베이거스컨벤션센터(LVCC)는 실제로 휑한 모습이었다. 방문객 수도 4만여 명으로 코로나19 확산 전인 2년 전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참여 기업 수도 2200여 곳으로 팬데믹 전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필자가 창업한 안경 브랜드 브리즘은 미국 진출의 꿈을 안고 이번 CES에 참가했다. 스타트업의 전시 공간인 ‘유레카 파크(Eureka Park)’에 폭 1.5m도 안 되는 초소형 부스를 열었다. 하지만 글로벌 대기업의 대거 불참으로 흥행 실패를 우려한 것과 달리 예상 밖의 진풍경이 벌어졌다. 대기업 위주의 메인 전시관에 볼거리가 없어지면서 스타트업들이 모여 있는 유레카 파크로 인파가 몰린 것이다.
유레카 파크는 스타트업의 국가 대항전을 위한 경기장 같은 곳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이스라엘, 네덜란드, 일본, 대만, 한국 등 스타트업 생태계가 활발한 기술 선진국의 대표 스타트업들이 참여한다. 이번 CES에서 유레카 파크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유니콘 기업을 꿈꾸며 밤낮없이 달리는 스타트업들이 내놓은 결과물을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줄을 이었다. 필자도 초소형 부스에서 사흘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관람객을 맞았다. 커스텀 안경 제작을 위한 3D 스캔 및 가상 시착 기능이 탑재된 앱을 시연하고 커스텀 안경 샘플을 선보였다. 미국 진출을 위한 고객 피드백을 듣고 현지 주요 인사들에게 브랜드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번 CES에 참가하며 한국 제조업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제조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세계 경제 대국 10위권에 드는 오늘날의 한국은 제조업을 더 이상 성장 동력으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한국의 제조 스타트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저를 쉽게 모을 수 있는 플랫폼과 앱 서비스에 투자와 지원이 쏠리는 반면 자본과 시간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필요한 하드웨어에는 좀처럼 관심을 갖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제조업의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언어와 문화적 특수성으로 인해 웹툰 등 특수 시장을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시작된 서비스가 글로벌 시장에서 흥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전자와 자동차 등 제조 분야에서 한국은 글로벌 히트 상품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서비스는 언어와 문화적 공감을 얻지 못하면 사용자와 교감하기 힘들다. 반면 제조는 기능과 형태를 가진 하드웨어를 통해 교감할 수 있다. 한국의 제조 기업이 언어와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제품을 만들어내기 수월한 이유다. 글로벌 감각과 시장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에 오랜 축적의 시간을 거친 장인과의 협업이 더해진다면 충분히 글로벌 시장을 노려볼 만하다.
한국 제조업 50년 역사에 쌓인 장인들의 노하우와 촘촘한 제조 생태계는 엄청난 자원이다. 한국처럼 제조 생태계와 IT 기반이 모두 탄탄한 나라는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안경 제조 분야에서도 대량 생산 기반을 제대로 갖춘 나라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일본, 중국, 한국 등 6개국에 불과하다. 또 한국은 전 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디자이너를 배출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면 좋은 하드웨어 상품을 세계 시장으로 진출시키기 위한 마케팅과 영업 역량이다.
CES가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번 CES에서 한국은 유레카 파크에 가장 많은 부스를 냈다. 총 292개 스타트업이 전시에 참여했다. CES가 한국 기업을 위한 글로벌 홍보와 피드백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앞으로 CES가 대한민국 제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21세기의 청해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 기회를 국내 제조 스타트업들이 놓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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