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롬 원액기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윤경미(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2010년 4월, CJ홈쇼핑에 35만9000원 가격표를 단 가전제품이 방송을 탔다. 데뷔 무대였다. 업계 속설로 주부들이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홈쇼핑 방송에서 거리낌 없이 구매할 수 있는 가격대는 10만 원 후반에서 20만 원 초반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30만 원을 훌쩍 넘는 가격에도 이 가전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배정된 1시간이 다 지나기도 전에 준비했던 2000대가 동났다. 소위 말하는 ‘완판’이었다.
매진의 주인공은 원액기 ‘휴롬’. CJ홈쇼핑에서 첫선을 보인 후 휴롬은 롯데와 GS 등 주요 홈쇼핑 채널의 황금시간대를 장악했다. 매진 행진도 이어졌다. 가전은 오래 두고 사용하는 특성상 구매에 신중하기 때문에 매진되기가 쉽지 않다는 통념이 깨졌다. 휴롬은 인기를 과시하며 홈쇼핑 채널을 종횡무진했다. 그리고 그해 홈쇼핑 히트상품과 매출 순위, 우수 협력사 순위에서 1위를 휩쓸었다. 지금도 인기는 여전하다. 내년에는 중국 시장을 교두보 삼아 세계 시장에서의 인지도 제고에 힘 쏟을 계획이다. 휴롬의 성공 요인을 집중 분석했다.
개발 또 개발
휴롬의 전신은 동아산업이다. 창업자 김영기 회장은 경영인보다 발명인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본래 대기업에 TV 부품을 납품하다가 건강과 환경에 기여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직접 개발에 나섰다. 1993년 처음으로 녹즙기를 개발했다. 칼날이 아닌 스크루(screw)를 활용해 과즙을 짜내는 방식의 녹즙기였다. 제품을 내놓은 지 1년 만에 악재가 터졌다. 다른 회사 녹즙기에서 중금속 성분이 검출됐다는 기사가 났다. 이른바 ‘쇳가루 녹즙기’ 파동이다. 녹즙기 업계가 통째로 고사(枯死)하다시피했다. 김 회장도 쓴 눈물을 삼켜야 했다.
김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기능을 추가해 1999년 오스카 만능 녹즙기를 내놨다. 제품은 인기를 끌었지만 또다시 난관에 부딪쳤다. 기능을 본떠 만든 유사품이 잇따라 나왔다. 비슷해 보이면서도 값은 절반에 불과한 유사품이 쏟아지면서 매출이 뚝뚝 떨어졌다. 회사는 10년째 적자를 면치 못했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김 회장의 개발 열정은 더욱 커졌다. 그는 다른 업체에서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제품을 만들어야겠다고 열의를 다졌다. 그리고 녹즙기에서 한층 진보한 형태의 원액기 개발에 매달렸다. 제품을 개발하면서 김 회장이 거듭한 실패와 도전 에피소드는 업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는 1주일에 두세 번씩 농산물 도매시장에 들러 짓무른 과일과 채소를 한 트럭씩 사가곤 했다. 스크루가 어떻게 작동해야 과일이나 채소를 효과적으로 짜낼 수 있을지를 실험하기 위한 재료였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기계에 넣어 짜봐야 하는데 멀쩡한 과일을 넣을 수는 없었다. 질이 좋지 않은 과일만 골라 사가는 그를 상한 주스나 파는 악덕업자로 보고 삿대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꿋꿋이 도매시장에 들러 재료를 사가곤 했다.
스크루 모양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엔 눌러서 짜기만 하면 즙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통에 넓적한 스크루를 달아 누르는 형태의 제품이 먼저 만들어졌다. 이것저것 재료를 넣어서 짜보다가 솔잎에서 벽을 만났다. 아무리 세게 눌러도 솔잎에서는 즙이 나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를 궁리하던 끝에 외피를 부순 후 눌러야 즙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스크루를 세로로 세우고 칼날 모양으로 만들어 외피를 부술 수 있도록 고안했다. 그리고 압력이 가해지도록 구조를 변경했다. 그렇게 무수한 시행착오와 실험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 휴롬이다. 휴롬은 2008년 처음 만들어졌다.
휴롬 판매에 가속도가 붙은 것은 2010년 홈쇼핑에 론칭하면서부터다. 2008년 300억 원이 채 안 됐던 연 매출은 올해 10배 이상 불어난 3000억 원으로 추정된다. 현재 김영기 회장은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고 경영에서 손을 뗀 상태다. 김성훈 휴롬 전략기획실 팀장은 “경영에서는 물러났지만 개발에 대한 관심만은 여전하다”며 “요즘은 회사 한편에 개인 연구실을 두고 발명과 개발에 몰두 중”이라고 말했다.
이래서 다르다
휴롬의 가장 큰 특징은 SSS(Slow Squeezing System) 방식이다. 저속으로 짜낸다는 의미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돌아가면서 과일 혹은 야채의 즙을 내는 스크루다. 녹즙기에 썼던 스크루가 여기에 활용됐다. 일반적인 믹서기 혹은 주서기는 과일을 간다. 믹서기에 들어간 과일은 매우 잘게 부서지면서 즙을 낸다. 반면 휴롬은 과일을 짠다. 휴롬에 들어간 과일은 지그시 눌러지며 압축된다. 거기서 즙이 나온다.
단단한 과육을 잘게 갈아내려면 칼날이 매우 빠른 속도로 회전해야 한다. 이때 발생하는 마찰과 열은 과일이 지닌 영양분을 파괴할 수 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마찰과 열에 취약한 과일이 산화할 수도 있다. 휴롬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과일을 눌러 즙을 짜내는 방식을 고안했다. 과일을 갈지 않고 누르면 상대적으로 마찰과 열이 적고 손실되는 영양분이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다.
과일을 짜는 것만으로 즙을 내기 위해서는 스크루가 매우 단단해야 한다. 단단한 스크루를 얻기 위해 여러 소재를 물색하던 중 김영기 회장은 울템(ultem)이라는 재료를 알게 됐다. 울템은 GE에서 개발한 신물질로 우주선의 외관을 만들 때 쓰일 만큼 강도가 높다. 울템을 알게 된 김 회장은 즉각 스크루를 만드는 재료로 시도해봤다. 기대했던 만큼 울템은 내구성이 강해 어떤 재료든 강한 압력으로 누르는 데 문제가 없었다.
모터도 중요한 부품이었다. 모터의 성능에 따라 압력이 달라진다. 휴롬은 기존 제품에서 사용되던 DC(Direct Current)모터 대신 AC(Alternating Current)모터를 택했다. 가격이 좀 올라가더라도 소음이 작고 내구성이 강한 부품을 넣기 위해서다. 김성훈 팀장은 “즙을 짤 때마다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나는데 이는 그 재료가 갖고 있는 고유의 조직이 다르기 때문”이라며 “각 재료마다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기계 자체에서 나는 소음을 줄였다”고 설명했다.
마찰에 강하고 오래 가면서도 힘이 센 소재와 부품을 활용하면서 휴롬은 갈지 않고도 과즙을 얻을 수 있는 구조를 갖게 됐다. 과일뿐 아니라 각종 야채와 콩 등도 문제없이 짜낼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한번 휴롬을 써본 소비자들은 소음이 거의 나지 않으면서도 무엇이든 쉽게 즙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5년도 안 되는 기간에 매출이 10배로 늘어날 수 있었던 이유다.
지금도 휴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기술 개발이다. 다른 회사에서 따라오기 힘든 압도적인 기술 우위로 시장 지배적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의도다. 현재 300명이 채 안 되는 휴롬의 직원 중 20여 명이 R&D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또 식품영양분석실을 별도로 두고 원액기에 넣어 즙을 낼 수 있는 식재료 및 재료별 특성 탐구, 재료와 재료를 혼합했을 때 어울리는 맛과 영양 등을 연구하고 있다. 배재대와 산학협력을 맺어 함께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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