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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의 죽음?

이재연 | 9호 (2008년 5월 Issue 2)
애플이라는 두 글자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잘 익은 빨간 사과를 연상하기보다는, ‘아이팟’ ‘아이폰’과 함께 한 입 베어 문 사과 모양의 애플 로고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애플이라는 단어는 자음과 모음, 글자와 글자의 조합이 아니다. 그 이면에 수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정교한 마케팅의 산물, 즉 ‘브랜드’다.
 
브랜드는 당초 제품을 식별하기 위한 단순한 기호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제품의 가치와 품질을 보증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브랜드=마케팅’, 즉 브랜드 관리가 마케팅의 처음이자 끝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기업과 소비자 간 정보의 비대칭이 심하던 시절에 브랜드는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이끄는 첨병이었다. 정보가 부족한 소비자들은 기업이 제공하는 광고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다. 물론 경험이나 체험을 기초로 한 브랜드 이미지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이는 매우 제한된 범위의 소비자들만 공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적극적 마케팅 활동을 통해 좋은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은 상품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신뢰를 구축하는데 매우 좋은 수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브랜드의 죽음’을 선언했다. 그것도 다름아닌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하이테크 마케팅의 아버지’로 불리는 레지스 메케나(Regis McKenna)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는 2000년 경영분야 잡지인 ‘비즈니스(Business) 2.0’과의 인터뷰에서 ‘브랜드가 죽었다’고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당시에는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8년이 지난 지금 그의 목소리가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이른바 웹2.0시대를 살아가는 능동적 소비자의 영향력이 더욱더 커지면서 브랜드 파워가 줄어들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유통업체의 PB(자체 브랜드)들이 수십 년간 시장을 지배해온 제조업체의 브랜드를 압박하며 시장에서의 입지를 신속하게 키워나가는 것을 보아도 브랜드의 죽음이 실감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품 브랜드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고 아파트처럼 기능과 실속을 추구하는 제품에서까지 브랜드가 경쟁우위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브랜드는 아직 죽지 않고 건재한 듯도 하다. 그렇다면 브랜드는 죽은 걸까 살아있는 걸까.
 
필자는 메케나에 의해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 ‘브랜드’가 아닌 ‘브랜딩’, 즉 브랜드를 만드는 전통적 접근법이라고 생각한다. 소비자들에게 이미지 수용을 강요하는 전통적인 브랜딩 활동은 인공호흡기를 차고 겨우 숨을 부지하고 있는 시한부 환자가 된 것이다.
 
블로그가 넘쳐나고 온라인 네트워크가 탄탄히 구축된 웹 2.0시대의 소비자는 더 이상 정보 기근에 시달리던 예전의 소비자가 아니다. 소비자들은 때로 기업이 제공하는 정보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구매결정을 내리고 있다. 기업들이 알리고 싶지 않는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는 슈퍼 파워를 갖게 된 것이다. 아울러 오늘날 소비자는 자신이 경험한 브랜드의 실체를 지구 반대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한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수백, 수천, 수만 명에게 동시에.
 
수동적 정보 수용의 상징인 광고를 맹신하는 소비자는 이제 거의 없다. 소비자들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광고의 홍수를 피해가는 노하우를 익혔다. 기업이 막대한 돈을 투자해 전파를 태운 광고보다 더 믿을 만하고 강력한 정보라고 인식된 온라인과 오프라인 입소문이 광고의 빈자리를 채웠다.
 
설사 가열찬 브랜딩 노력으로 소비자들의 마음에 ‘A 브랜드=무엇’이라는 형태의 항등식을 주입하는 데 성공했을지라도, 소비자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최근 모 이동통신업체가 자사의 3세대 이동통신 서비스 브랜드인 ‘쇼(Show)’를 알리기 위해 공격적인 브랜딩 활동을 펼쳤고, 그 결과 ‘영상전화는 쇼’라는 명제를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름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기뻐하기에는 아쉬운 구석이 있다. 소비자들이 쇼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회사는 공부는 열심히 했으나 실속 없는 성적표를 손에 쥔 꼴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브랜딩을 살려낼 방법은 없는 걸까. 일본의 생활용품 브랜드인 ‘무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무지는 무인양품(無印良品·MUJI, mujirushi ryohin)을 줄인 말로 생활용품, 의류, 부엌용품, 가구, 식품에 이르기는 7000여 가지의 아이템을 생산하는 제조 겸 유통회사다. 한마디로 무지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노브랜딩(No Branding)’ 전략으로 성공을 거뒀다. 브랜딩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제품의 로고를 없애는 역발상이 먹힌 것이다. 무지의 제품에는 로고나 라벨, 심지어 작은 탭조차 붙어있지 않다. 디자이너의 이름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는 미니멀리즘과 친환경이라는 상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스타일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며, 과도한 브랜딩 활동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브랜드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했다. 제품의 품질과 서비스 자체로 승부하고 그것들이 가진 가치를 소비자들이 더 많이 접하도록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노브랜딩 전략이 더욱 확실한 브랜딩을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다. 광고도 한번 하지 않고 최고의 브랜드를 구축한 스타벅스 커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브랜딩이 숨을 헐떡이며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 시점에도 브랜드의 이름 석 자와 그것을 알리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루이비통의 가방을 갈망할 것이고, 닌텐도의 게임기를 즐겨 찾으며, 도요타라는 이름을 보고 자동차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비자들이 브랜드를 통해 찾고자 하는 것이 브랜드가 가져다주는 환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효용과 가치로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맥도날드의 마케팅 담당 임원인 래리 라이트는 브랜드를 ‘가치에 대한 약속’으로 정의했다. 가치는 브랜드의 이름을 수차례 반복해서 알린다고 쌓이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이름값 하는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효용과 가치를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가 애플이라는 브랜드를 접할 때 ‘혁신’과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애플이 우리 귓가에 ‘우리는 혁신적이야’라고 속삭였기 때문이 아니다. 애플의 로고를 붙인 제품들이 그들 스스로 혁신성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브랜딩의 진정성은 브랜드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컨셉트를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브랜드의 본질인 제품과 서비스의 가치에 브랜딩의 진정성을 담는 것만이 죽어가는 브랜딩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생명수인 것이다.
 
필자는 이화여대 경영대를 졸업한 후 한국HP 컨설팅사업본부에서 CRM 컨설턴트로 근무했다. 서울대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하이테크, 엔터테인먼트산업의 마케팅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편집자주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김상훈 교수가 주도하는 비즈트렌드연구회가 동아비즈니스리뷰(DBR)를 통해 연구 성과를 공유합니다. 학계와 업계 전문가로 구성된 이 연구회는 유행처럼 흘러가는 수많은 비즈니스 트렌드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을 제시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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