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k & Opportunity in 2012 - 기술
감사의 말씀
본 글의 작성을 위한 리서치에 큰 도움을 준 PRiSM연구회 소속이자 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한민선, 조길수, 이상욱 연구원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한다.
# 1. 2000년대 중반 이후 세계 대형 TV 시장은 LCD 중심으로 서서히 재편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전 세계 PDP 시장의 30% 이상을 장악하고 있던 파나소닉은 LCD에 대한 신규 투자를 멀리한 채 기존 핵심 역량인 PDP 사업 강화에 매진한다. 2005년 자신들의 생산 거점인 아마가사키에 3개의 PDP 공장을 증축하는 데 무려 6000억 엔 이상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시장의 흐름을 외면하고 자사의 역량에만 집중한 파나소닉은 결국 작년 7800억 엔의 적자를 기록하며 PDP에 ‘올인’한 전략을 폐기했다.
# 2. 1990년대까지 세계 TV 브라운관 시장을 호령했던 삼성SDI는 2000년대 들어 브라운관 TV의 종말이 닥칠 것을 직감하고 PDP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에 진출했다. 진출 3년 만인 2004년 PDP에서도 세계 정상에 올랐지만 대형 TV의 주력 디스플레이로 LCD가 자리잡는 트렌드를 간파하고 또 다른 변신을 모색한다. 바로 2000년 시작한 2차 전지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 것이다. 그 결과 현재 전지사업 매출액은 전체 매출의 절반을 넘어섰다. 삼성SDI는 명실공히 디스플레이 기업에서 에너지 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급변하는 세계 환경 속에서 기업의 유일한 생존수단은 지속적인 혁신”이라고 이야기했다. 굳이 피터 드러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기술 개발은 기업의 혁신을 위해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두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업은 기술 개발 그 자체보다 어떤 기술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더 큰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어떠한 전략을 이용할지를 고심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처럼 불확실성이 큰 시점에서는 어떤 기술 개발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명운이 갈릴 수도 있다.
기업이 따라야 할 올바른 기술 발전 방향에 대한 해법을 얻기 위해서는 기술을 본질과 지향점, 생존 전략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기술은 ‘중도(the optimum)’를 걸을 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즉, 기술적 탁월성(superiority)은 물론 정작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들이 느끼게 될 유용성(usability)을 함께 고려해 그 양극단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 또한 기술은 표면에 드러난 문제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근본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통합적 접근(holistic approach)’을 통해 시장을 재구성(reconfiguration)할 때 더욱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번 탄생한 기술이 장기간 영속하며 생명력을 가지려면 다양한 분야에서 ‘융합(convergence)’을 시도해야 한다. 본고에서는 이 세 가지 측면, 즉 중도(본질), 통합적 접근 및 재구성(지향점), 융합(생존 전략), 각각의 측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기와 기회를 분석함으로써 향후 경영자들이 유념해야 할 시사점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중도(The Optimum) - 기술의 본질
컴퓨터 사용이 인간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으면서 인간은 정보화 사회의 혜택을 누리게 됐다. 그와 동시에 장시간 컴퓨터 사용으로 인한 시력 저하, 관절 질환(예: 장시간의 키보드나 마우스 작업을 통해 손목 관절 부위에 문제가 생기는 ‘카펄 터널 증후군), 게임중독 등 육체적·정신적 부작용도 경험하고 있다. 두뇌 칩, 고도화된 감각 기능과 같은 기술을 활용해 인체의 기능을 극대화하겠다는 개념인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은 일시적으로 신체의 결함을 보완한다는 장점을 지닌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인간을 정의하는 본질 자체를 변형시킬 수 있다는 사회적 우려를 낳고 있다.
기술문명이 충분히 성숙한 현 시점에서 기술은 인류와 사회에 진정한 도움을 주고 이를 통해 가치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기술이 제안하는 방식을 인간이 따라야 했다면 이제는 기술이 인간을 향해야 한다. 이는 기술의 발전을 억제하자는 게 아니라 기술 발전의 방향성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술은 성능 자체의 탁월성(superiority)과 소비자 시각에서의 유용성(usability) 사이에서 적절하게 자리매김해야 한다. 의외로 잘 알려진 기업들 가운데 사용자 중심의 사고를 하지 못하고 기술적 성능에만 집착하다 실패한 사례가 많다. 반면 사용자 중심의 사고에 입각해 시장을 바라보고 이에 따른 적절한 수준의 기술을 도입해 성공한 사례들이 있다.
빗나간 제국의 꿈으로 인한 위기-소니의 집착
소니(Sony)는 뛰어난 기술력을 지녔지만 시장 흐름의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즉, 소비자의 생활방식과 조화로운 기술에 집중하지 않고 탁월한 기술력에 의존해 고화질, 고음질, 크기 등 단순한 특성에 치중하다 시장에서 영향력을 잃고 말았다. 베타맥스(Betamax), 미니디스크(Mini Disc), 어트랙(ATRAC), 블루레이(Blu-ray)가 대표적 예다. 이 기술들은 훌륭한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소비자 사용 환경이 변화하고 있는 맥락을 고려하지 못했다.
베타맥스는 VHS가 시장에 이미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VHS와 호환성이 없다는 이유로 시장에서 점차 퇴출됐다. 미니디스크 역시 소비자의 기호가 CD에서 MP3플레이어로 변화하고 있다는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해 기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점차 영향력을 잃었다. 어트랙은 음질의 우위를 앞세워 소니가 MP3의 대안으로 제시한 오디오 포맷이지만 현재 어트랙으로 재생되는 음악을 듣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블루레이는 고용량 고화질로 DVD의 바통을 잇는 데 성공했지만 스트리밍과 다운로딩으로 변화하는 시장의 흐름을 읽지는 못했다.
소니는 기존 전자제품 사업 영역뿐 아니라 새로운 혁신을 시도함에 있어서도 기술의 중도를 지키지 못했다. 1999년 처음 출시해 2005년까지 생산했던 애완 로봇 ‘아이보(AIBO)’의 경우 6년 동안 15만 대 판매에 그치며 단종됐다. 실제 개의 행동을 정밀하게 구현한 기술적으로 매우 탁월한 제품이었지만 생명의 가치를 차가운 모터가 대체할 수 없기에 유용성 측면에서 소비자들에게 충분한 가치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니는 지난 2001년부터 현재까지 주가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며 지난 회계연도에 2200억 엔 적자를 기록했다. 소니의 사례는 시장에서의 영향력이 오히려 독배가 될 수 있고 사용자 중심의 사고를 하지 못한 채 역량 함정(competency trap)에 갇힌다면 거듭된 실패를 할 수 있다는 반면교사의 사례로 삼을 수 있다.
유용성 강화로 기회를 맞이한 애플과 포르쉐
현재 가장 각광을 받는 대표적인 하이테크 기업인 애플(Apple)의 성공 요인을 한마디로 단순화해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애플이 가장 인간중심적 기업 중 하나이며 이를 통해 성공한 기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애플은 사용자 중심 경험과 인터페이스를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하고 있다. 이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변치 않고 계속 지켜지고 있는 원칙이다.
애플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기업이지만 절대 기술적 우월함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사용자의 환경과 사용 맥락을 고려할 때 왜 애플 제품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함으로써 소비자를 끌어들인다.애플은 현재 컴퓨터 환경에서 널리 사용되는 아이콘 방식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를 가장 먼저 창안한 기업이다. 뿐만 아니라 컴퓨터가 대부분 기업용이던 시절 개인용 컴퓨터(PC)를 제안한 최초의 기업 중 하나다. 애플의 운영체제(OS)는 윈도 및 경쟁 제품에 비해 처음 쓰는 사람도 이해하기 쉬운 직관적인 실행 환경으로 각광받고 있다. 아이팟(iPod) 역시 초기에 인기를 끈 요인은 다수의 곡을 쉽고 빠르게 검색할 수 있는 휠 버튼이었다. 터치 인터페이스는 아이폰이 등장하기 전에도 도처에 존재했지만 모바일 기기의 터치 인터페이스를 완성한 건 아이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를 실행에 옮김으로써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는 또 다른 사례로 포르쉐(Porsche)를 꼽을 수 있다. 8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포르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스포츠카 브랜드다. 포르쉐는 2000년대 초반까지 트랙에서도 달릴 수 있는 스포츠카 개발에 앞장서왔을 정도로 기술적 성능의 탁월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만큼 고객들도 제한적이었다. ‘진정한’ 드라이빙을 원하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 소수의 차량을 판매하는 회사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했다. 그러던 포르쉐가 정통성을 포기하고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다. 스포츠카는 속도감을 즐기는 소수의 마니아들에겐 가장 이상적인 차일지 모르지만 많은 짐을 싣고 장거리 여행을 가거나 대단위 가족들을 태우고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운전하기 원하는, 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 소비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포르쉐는 바로 이 점을 노렸다. 탁월한 기능성을 자랑하는 포르쉐의 성격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유용성을 극대화한 SUV 카이엔(Cayenne, 2002년)과 세단 파나메라(Panamera, 2009년)를 내놓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카이엔과 파나메라는 스포츠카의 성능을 지닌 SUV와 세단으로서 시장에서 입지를 굳건히 하며 현재 포르쉐 매출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포르쉐는 이들 매출에 힘입어 최근 몇 년간 20% 안팎의 꾸준한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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