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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일본 휴대전화

천광암 | 7호 (2008년 4월 Issue 2)
일본에 처음 간 한국 관광객들이 전철을 탔을 때 무엇보다 놀라는 것 중 하나가 휴대전화 문화다. 한국 지하철에서는 옆사람이 들어서는 곤란한 사적 대화까지 휴대전화에 대고 떠드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일본 지하철 안에서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주 급한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잠시 후에 걸겠다”며 일단 끊었다가 가장 가까운 정거장에 내려서 다시 통화하는 것이 통례다.
 
일본인들이 휴대전화 통화를 절제하는 것은 공공장소뿐만 아니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인지 공공장소에서의 휴대전화 사용을 극도로 꺼린다. 가까운 친구나 연인 간에도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기보다는 문자를 보낸다. 음성통화와 달리 문자는 받는 쪽이 여유 있을 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적 차이 때문에 일본 휴대전화 단말기는 귀보다는 눈을 위한 제품이다. 한국 제품에 비해 창이 크고 ‘하이엔드(고가)’ 액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휴대전화 문화는 다르지만 양국의 휴대전화 산업이 걸어온 길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양국 모두 시장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급성장해왔다. 또 기반설비와 단말기 제조기술 면에서 두 나라 모두 선두권을 형성해왔다. 제2세대 시장에서 세계표준이나 다름없는 유럽식 이동통신(GSM) 방식 대신 별도의 기술표준을 선택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물론 휴대전화 단말기 산업의 기초토양만을 따지면 일본 기업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인구는 4900만 명인 데 비해 일본은 1억 2000만 명이 넘는다.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와 관련된 장비와 부품산업의 토양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일본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객관적 여건만으로는 일본세가 한국세를 압도하는 것이 당연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흔들리는 일본 휴대전화 산업
요즘 일본에서는 한 달이 멀다 하고 휴대전화 단말기 업체의 시장 철수 소식이 터져 나온다. 2001년 4월 스웨덴의 에릭슨과 함께 50 대 50으로 휴대전화 단말기 사업을 통합한 소니는 현재 일본 국내시장 사업을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소니와 에릭슨의 합작회사인 ‘소니 에릭슨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즈’의 일본 시장 점유율은 8%대로 샤프, 마쓰시타, 도시바, 후지쓰, NEC에 이어 6위 정도다. 소니로서는 시간과 노력을 아무리 쏟아부어 보아도 일본 시장에서는 눈에 띄는 성과를 얻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일본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업체 중 유일하게 북미시장에서 성공할 뻔했던 산요전기는 휴대전화 사업을 통째로 교세라에 넘기기로 했다. 미쓰비시전기는 3월 3일 휴대전화 사업에서 완전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2000년 이 회사의 연간 출하량은 1850만 대였지만 지금은 210만 대로 줄었다.
 
현재 세계 최대의 성장시장으로 손꼽히는 중국 시장에서는 일본 업체들이 전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년에는 도시바와 마쓰시타가, 2006년에는 미쓰비시와 NEC가 짐을 쌌다. 지난해 말 현재 순수 일본 업체로 유일하게 남아있던 업체가 교세라다. 교세라는 2001년 중국의 전자부품업체와 합작회사를 설립해 중국 시장을 공략해 왔으나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교세라는 가지고 있던 합작회사 지분을 전부 합작 파트너 등에게 공짜로 넘기고 이달 말 빈손으로 철수할 예정이다.
 
세계시장 점유율이 2%를 넘는 일본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업체는 단 한 곳도 없다. 일본 기업보다는 유럽 기업에 더 가까운 소니 에릭슨이 유일하게 6%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일본 제조업체들은 지금까지 세계시장에서 실적이 이처럼 지지부진한 원인의 하나로 2세대 휴대전화 표준문제를 꼽았다. 즉 일본의 휴대전화서비스업체 중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는 NTT도코모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GSM방식이 아니라 PDC방식을 선택하는 바람에 GSM시장에 뛰어들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설득력 없는 변명에 불과하다 고 일본의 통신산업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국의 사례가 좋은 증거이다. 한국도 2세대 표준으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을 선택했지만 한국의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업체들은 세계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억6100만 대를 판매해, 1억5900만 대를 파는 데 그친 모토로라를 제치고 세계시장 점유율 2위로 올라섰다. LG전자도 소니 에릭슨과 45위권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 휴대전화 제조업체의 운명은 어디서 엇갈린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일본 휴대전화의 황금기로 시계바늘을 되돌려보자.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게 문제
NTT도코모는 1999년 2월 ‘i모드’ 서비스를 시작했다. 휴대전화 단말기를 통한 세계 최초의 인터넷 접속 서비스였다. 가입자는 10개월도 안 돼 250만 명을 넘어섰다.
 
닛케이 비즈니스에 따르면 i모드의 폭발적인 성공에 힘입어 NTT도코모의 시가총액은 그해 10월4일 20조8757만 엔에 이르러 모회사인 NTT를 처음으로 제쳤다. i모드 기능이 장착된 휴대전화 단말기는 없어서 못 팔았다. 따라서 당시 일본의 단말기 제조업체들은 NTT도코모에게만 잘 보이면 됐다. 단말기 마케팅도 NTT도코모가 주도했기 때문에 단말기 제조업체들은 소비자를 직접 겨냥해 마케팅을 할 이유가 없었다.
 
잘 나가던 NTT도코모는 급기야 3세대 표준으로 세계시장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NTT도코모는 3세대 표준의 세계 최초 상용화에 집착한 끝에 2001년 5월 ‘포마(FOMA)’ 시험서비스에 나섰다. 그리고 일본식 표준을 보급하기 위해 19982001년 해외 통신업체와 2조 엔에 가까운 자본제휴를 맺었다.
 
단말기 제조업체들도 장밋빛 꿈에 부풀었다. 당시 일본 시장 점유율 1위이던 마쓰시타는 제3세대 표준인 광대역 코드분할다중접속(WCDMA) 기술 개발에 사운을 걸고 뛰어들면서 2005년까지 세계 3위로 발돋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가운데 중국과 인도 등과 같은 저가격-저기능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에서 일본 업체들의 존재는 더욱 흐려져 갔다. 요컨대 NTT도코모는 시장과 속도를 맞추는 데 실패했고, 단말기 제조업체들은 NTT도코모라는 보호막 아래서 자생(自生)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일본 국내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10개 안팎의 업체가 경쟁을 하면서 나눠 먹기에는 ‘너무 작은 비스킷’이 돼버렸다. 반면 일본 기업들과 달리 한국 기업들은 국내 시장이 좁아 어떻게든 해외시장에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억척스러운 ‘헝그리 정신’ 앞에 기술 표준이 다르거나 브랜드 파워가 떨어지는 것은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약점도 얼마든지 강점으로 바뀔 수 있고, 강점이 때에 따라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는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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