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맛과 남성적인 이미지의 대명사 말보로가 사실 여성 전용 담배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1924년 필립모리스가 말보로를 출시했을 때, 그들은 ‘5월처럼 순한(Mild as May)’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1847년 창업자 필립모리스가 영국의 담배 가게에서 판매하던 여성 기호품 콘셉트의 담배 말보로가 그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담배 유해성 논란이 일면서 담배 업계 전체가 위기를 맞았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담배의 주 소비층인 남성을 공략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이전보다 더욱 명백해졌다. 그렇다고 남성들이 30년 가까이 시장에서 여성 담배로 인식돼 온 말보로를 갑자기 구매할 리 만무했다.
필립모리스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남성 층을 겨냥해 대대적인 변신 작업에 착수한다. 우선 담뱃갑을 튼튼한 재질로 교체했다. 주머니 속에 넣어도 담배가 찌그러지지 않아 주머니 속에 담뱃가루가 남지 않도록 단단한 재질로 케이스를 만든 것이다. 이와 함께 뚜껑이 쉽게 열리는 플립 톱(flip-top) 박스를 달면서 강렬한 붉은 색을 입혔다. 말보로의 상징과 다름 없는 ‘레드 루프(red-roof)’ 디자인의 탄생이었다. 광고도 대폭 수정했다. 남성 끽연자들을 공략하기 위해 거칠고 강인한 이미지의 카우보이(일명 ‘말보로 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말보로 컨트리’ 광고 캠페인을 전개했다. ‘독특한 운치가 있는 곳, 말보로 컨트리로 오십시오(Come to where flavor is. Come to Marlboro country)’라는 슬로건이 라디오와 TV 전파를 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미국 개척 정신의 원천인 광활한 서부를 배경으로 한 광고는 충분히 남성적일 뿐 아니라 고향을 떠나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향수마저 불러 일으켰다. 여성 담배로 시작했던 말보로는 위기탈출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전설이 됐다.
이처럼 ‘소비자의 욕구 및 경쟁환경 변화에 따라 기존제품이 가지고 있던 포지션을 분석해 새롭게 조정하는 활동::CN1::/CN::
’을 ‘리포지셔닝(Repositioning)’이라고 한다. 포지셔닝이 고객의 마음에 기업이나 브랜드의 존재를 차별화해 자리잡게 하는 것이라면, 리포지셔닝은 고객의 인식을 조정하는 일이다. 자사에 대한 인식이건 경쟁자에 대한 인식이건 그것을 조정함으로써, 고객의 마음 속에서, 또 시장에서 새로 태어나 기회를 얻는다.
코닥의 실패를 살펴 보자. 1990년대 초 경기침체를 맞이한 상황에서도 코닥은 다각화한 사업 영역에 대해 방만한 투자를 지속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독점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필름, 카메라 시장이 디지털 제품들에 의해 잠식되는 위기에 처했음에도, 코닥은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 필름 사업을 오히려 강화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이미 디지털렌즈교환식(DSLR·Digital Single-Lense Reflex) 카메라 등 디지털 이미지 프로세싱의 핵심 기술들을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디지털 사업 초기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코닥은 뒤늦게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 진입했지만 일찌감치 디지털화에 집중한 캐논, 소니, 니콘 등에 밀려 시장에서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현재 수많은 디지털 카메라 브랜드 중에서 코닥을 선택하는 고객이 얼마나 될까? ‘코닥=구형 수동필름 카메라만 만드는 기업’이라는 고객의 인식은 조정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새로움으로 진화하기를 거부한 코닥이 자초한 결과라고 하겠다.
디지털이큅먼트(DEC)는 20세기 컴퓨터 산업을 주도하던 회사였다. 1960~1970년대 미니컴퓨터로 명성을 떨쳤지만 변화를 거부하고 안주하다 1998년 컴팩에 인수당하는 비극을 맞이했다(컴팩도 이후 2002년 휴렛 팩커드에 인수됐다). DEC의 사례처럼 치열한 기술 경쟁 속에서 수많은 기업들이 사라져갔다. 이런 혼란기에 생존한 기업은 IBM과 휴렛패커드, 그리고 애플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의 생존 이유는 단 한가지, 리포지셔닝이다. IBM은 통합 전산망으로, 휴렛 패커드는 레이저 프린터와 PC 사업으로, 애플은 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끊임없이 변신과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1977년 DEC의 설립자이자 회장이었던 케네스 올슨은 “가정에 개인용 컴퓨터를 들여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에서 단적으로 보여지듯, DEC는 변화하는 PC시대로의 대응에 늦었고, 결국 역사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맞게 됐다. 기업이 미래를 온전히 예측할 수 없다면, 그래서 케네스 올슨의 빗나간 예견처럼 늘 오류의 가능성을 수반한다면, 기업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DEC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유연함을 가지고 기회를 잡는 데 실패했다.
위기의 시대, 고객의 마인드로 초점을 옮겨라
기업이 리포지셔닝을 염두에 두어야 할 위기 상황은 ‘언제’일까?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라면 답은 ‘언제나’이다. 세상은 늘 변화해 왔다. ‘변화 이외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은 그래서 존재한다. 기업 세계의 경쟁도 늘 존재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더욱 달라진 점이 있다면 경쟁의 범위와 변화의 속도가 그 자체로 엄청난 위기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경쟁은 격화되고 그 범위가 지구 전체로 확대됐으며 기술과 환경 변화의 가속도는 가공할 만한 수준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상 이상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업에 장기계획이 무색해진 지 오래다. 1950년대에 자동차를 구매하려면 GM, 포드, 크라이슬러, 아메리칸 모터스 중에서 선택하면 됐다. 그러나 오늘 날엔 어떠한가? 300여 개가 훨씬 넘는 자동차 모델, 1200여 개가 넘는 자동차 스타일이 고객들을 기다린다. 중국 시장에는 이미 135개의 식품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다고 한다. 세안 비누 하나를 고르는 일도, 백화점에서 옷을 택하는 일도,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구매할 때도 선택의 폭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다. 오죽하면 제품 정보와 가격을 비교 검색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나 잡지가 등장했겠는가? 경쟁과 변화가 치열해졌다는 것은 기업에는 위기를 의미하고, 고객에게는 그만큼 처리해야 할 정보가 증가했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의 예는 이를 극명하게 나타내준다.
- 지난 30년 동안 생산된 정보량이 과거 5000년 동안 만들어진 정보량보다 많다.
- 인쇄된 지식의 총량이 4~5년마다 두 배로 증가하고 있다.
- 일주일 분량의 뉴욕타임스가 담고 있는 정보량은 17세기 영국의 한 평범한 사람이 평생 접했을 정보량보다 많다.
- 세계적으로 하루에 4000권이 넘는 책이 출간되고 있다.
- 인터넷 웹은 이미 수억 페이지에 달하고 매일 100만 페이지가 추가되고 있다.
- 영국에서 태어난 어린이가 18세까지 접하는 TV 광고는 무려 14만 편에 이른다. 스웨덴에서 보통의 소비자는 하루에 3000개의 상업적 메시지를 접한다.
출처 : 잭 트라우트, 『리포지셔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