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조선에는 두 번의 외침이 있었다. 7월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강제로 통상과 교역을 요구하며 평양에 들어왔다가 침몰했다. 10월에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했었다(병인양요). 그 해 프랑스 신부 9명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 8000명을 처형한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했던 것이다. 프랑스군은 거의 한 달간 강화도를 점거했으나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후 함대를 철수시켰다.
1871년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이유로 함대를 파견했다(신미양요). 물론 진짜 목적은 한국의 개항이었다. J. 로저스 중장이 지휘하는 미군의 아시아 함대가 나가사키 항을 출항했다. 이들의 전력은 군함 5척에 구명정 대용으로 쓰는 작은 증기선 몇 척, 대포 85문, 군인 1230명이었다. 미군 함대는 4월 초 남양만에 도착했고, 조선 정부와 교섭을 하고 수로도 측량하면서 천천히 서해안을 따라 북상했다. 마침내 그들은 강화도 수로까지 진출했다. 미군은 강화와 김포 사이의 이 좁은 바다를 염하(鹽河)라고 불렀다. 물은 짠데 폭은 좁아서 강인지 바다인지 불분명했던 모양이다.
강화도는 삼국시대부터 군사요충지였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공에 맞서 수도가 됐다. 병자호란 때는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을 먼저 차단하는 바람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했지만, 원래는 강화도가 임시수도로 내정돼 있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청군의 공세에 밀려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함락됐지만, 조선은 강화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국왕의 피난처가 아니라도 강화도는 한강을 따라 한양으로 들어오는 내륙수로의 길목으로 수도 방어에 없어서는 안 될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한강을 따라 적의 전함이 서울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좁은 수로를 통과해야 했다. 이 수로는 폭이 한강 정도로 좁은데다가 물살이 빨라서 바람이나 물때가 맞지 않으면 배들이 거슬러 올라갈 수 없었다.
강화도와 수로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은 많은 공을 들였다. 조선 숙종 때 정부는 강화도 해안선 전체를 빙 둘러 50개가 넘는 돈대를 설치했다. 예전에는 그냥 해안선을 따라 성을 둘렀는데, 그것만으로는 방어력이 부족하다고 여겨 중간 중간 사각형, 또는 원형의 작은 성을 쌓은 것이다. 대체로 전망 좋은 고지에 설치한 이 ‘미니 성’들은 관측과 포격을 위한 것이었다. 아직도 유적이 많아 남아 있는 이 돈대들은 화강암을 사용해서 튼튼하게 축조됐다. 외침의 위협이 높아진 대원군 때는 방어시설을 더 보강했다. 강화와 김포 양쪽으로 상륙이 가능한 지점에 모두 해안 포대를 설치해서 그야말로 고슴도치처럼 빈틈없는 화망을 구축했다. 겁없이 수로로 진입하는 배들은 수로의 시작 지점에서 한강 입구까지 거의 14km 구간의 십자포화를 견뎌내야 했다. 미군의 출현이 보고되자 대원군은 즉시 어재연 휘하 600명의 병사를 급파했다. 이들은 대부분 포수 출신으로 최고의 정예병이었다.
광성보 전투
4월 14일 로저스 제독은 2척의 전함과 4척의 작은 증기선을 수로로 진입시켰다. 2척은 아시아 함대의 전함 중에서 제일 작은 배들이었다. 작은 배를 진입시킨 이유는 목적이 탐색전이었고,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다는 점을 우려했던 것 같다. 이 수로에서 가장 극적인 지점이 광성보가 있는 손돌목 지점이다. 수로가 S자로 크게 휘는 이곳은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있어 제일 위험했다. 한양으로 들어오는 배들이 조류와 바람을 놓치면 감히 이 수로로 진입하지 못하고 밖에서 대기하곤 했다.
미군이 조준선에 들어오자 광성보의 포수가 발포를 했다. 이를 신호로 양쪽 해안 포대에 배치한 수백 문의 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미군의 목격담에 의하면 양쪽에서 발사된 포탄은 하늘을 새까맣게 덮었다. 장교와 수병 중에는 남북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이 제법 있었는데, 이구동성으로 남북전쟁 때도 그렇게 엄청난 포격은 경험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조금 후 그들은 또 한번의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엄청난 포탄 중 명중탄은 고사하고, 배 근처에 떨어지는, 심지어 물보라라도 배에 튀기는 포탄이 하나도 없었다.
미군은 잠깐 놀라움을 접고 이 신기한 광경을 즐기기 시작했다. 배가 초지진과 덕포진을 지나 광성보에 근접했을 때, 한 수병이 해안선의 툭 튀어나온 곳을 가리켰다. 지금 용두돈대가 있는 그 곳에서 조선군 병사들이 전함을 향해 발포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조작하고 있는 포는 수성용으로 개발한 기다란 화승총이었다. 총신이 길어서 Y자형 받침대를 거치해야 발사할 수 있었다. 조금 개량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임진왜란 때부터 사용하던 무기였다. 선상의 미군 병사들은 전쟁의 공포도 잊은 채 자신들을 조준하고 있는 적군의 총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군 병사들의 눈길을 끈 장면은 프라이팬 같은 것에 담긴 숯불이었다. 조선 사수가 신중하게 화승총을 조준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이 부지깽이로 불이 붙은 숯을 집었다. 숯불로 도화선에 불을 붙여 총을 발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금 후 총성이 울리고 수병 2명이 어깨를 붙잡고 쓰러졌다. 그들이 이 총격전에서 발생한 유일한 미군 사상자였다. 그러나 상처는 경미했다.
그래도 이 포대를 두고 진입할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군은 해병대를 투입, 진지 점령을 시도했다. 4월 23일 450명의 해병대와 200명의 수병이 초지진, 덕포진, 광성보를 차례로 함락시켰다. 그 중에서도 제일 격렬한 격전은 미군과 어재연의 수비대가 격돌한 광성보 전투였다. 광성보는 작은 원형의 요새로 주변 일대에 시야를 확실히 확보하고, 광성보로 오르는 비탈도 50∼60도 정도로 제법 가파르다.
설계와 위치선정상 치명적 오류
미군이 상륙하자 광성보의 포수들은 맹렬하게 사격했다. 그러나 이들이 쏘는 총은 용두돈대에서 사용한 화승총이었다. 사거리는 길었지만 발사속도가 1분에 2, 3발이 전부였다. 겨우 150미터에 불과한 거리를 제압하기에도 발사속도가 너무 느렸다. 미군의 소총은 남북전쟁 때 개발됐으며 단발식 소총과 연발소총이 있다. 현대의 소총보다는 발사속도가 느리지만 사거리나 위력, 정확도는 의외로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
조선군 소총의 열악한 화력을 파악한 미군은 과감하게 돌격했다. 조선 병사들은 위축되지 않고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러나 성벽에 뚫어 놓은 총안은 시야를 확보하기에 너무 나빠 사격할 수가 없었다. 결국 병사들은 성벽 위로 머리를 내밀고 사격해야만 했다. 머리를 내민 병사들은 미군 저격병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