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에 정기적으로 받았던 신체검사 중 색맹 검사가 있었다. 이 테스트에서 필자의 친구 중 한 명은 붉은 색을 보지 못하는 색맹으로 밝혀졌다. 결과를 접한 친구는 물론 나도 깜짝 놀랐다. 수업이 끝난 뒤 우리는 학교 근처 포장마차에서 종종 떡볶이를 사먹곤 했다. 물론 그때까지 나와 친구는 모두 떡볶이가 ‘붉다’고 말했다. 놀라운 것은 색맹이라고 밝혀진 내 친구는 검사를 받은 날에도 여전히 포장마차에서 떡볶이가 ‘붉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필자는 혼자 고민했던 적이 있다. 검사 결과 색맹으로 밝혀진 친구는 지금까지 어떤 색깔을 보고 ‘붉다’고 말했던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가 보고 있던 것이 내가 보고 있는 색깔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해도 내가 보는 세계와 친구가 보는 세계에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 때 영민한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철학적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과연 누가 보고 있는 것이 진짜 세계일까? 성급하게 대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잠시 가장 탁월한 인지생물학자들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그는 인지생물학 연구를 통해 철학적 통찰을 심화시키고 있는 마투라나(Humberto R. Maturana: 1928년 출생)라는 학자다. 만약 칠레 출신이 아니라 주류 서양문명권의 학자였다면 그는 지금보다 더 큰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관찰자는 모든 것의 원천입니다. 관찰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모든 지식의 기초입니다. 인간 자신, 세계 그리고 우주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주장의 기초입니다. 관찰자의 소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과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지각하고, 말하고, 기술하고, 설명하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있음에서 함으로(From Being to Doing)>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내 친구가 있다. 마투라나는 이것이 근본적인 출발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찰자로서 내 친구에게는 그 자신이 보고 있는 나름대로의 세계가 발생한다. 사실 나는 색맹인 것으로 밝혀진 내 친구가 ‘붉다’고 말한 떡볶이를 실제 그가 어떤 색깔로 보는지 모른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도 내가 어떤 색깔을 ‘붉다’고 말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관찰자로서 내가 존재하는 한 내가 보는 세계도 존재하고, 관찰자로서 내 친구가 존재하는 한 그가 보는 세계도 엄연히 존재한다. 이것은 단지 나와 색맹이었던 내 친구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상인들도 서로 상대방이 어떤 색깔을 보고 ‘붉다’고 말하는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이미 마투라나보다 앞서 이런 입장을 피력하면서 이를 관점주의(perspectivism)라고 말했다. 물론 관점주의란 표현이 난해하다면 마투라나의 용어를 빌려서 ‘관찰자주의’라고 불러도 좋다. 관점주의 혹은 관찰자주의의 타당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하나 더 살펴보자. 뱀은 인간과는 다른 세계를 가진 존재다. 뱀은 적외선 카메라와 유사하게 세계를 지각한다. 뱀의 세계는 살아서 온기를 가지고 있는 생물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구별될 것이다. 인간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뱀의 세계도 엄연히 존재한다. 결국 존재하는 관찰자들의 수만큼 다양한 세계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여기서 우리는 약간 당혹스러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인간들, 혹은 모든 생명체들이 동의할 수 있는 하나의 객관적인 세계, 즉 ‘유일한 진짜 세계’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추론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자신이 자신만의 관점에 사로잡힌 존재,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존재라고 절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절망이 타당한 것일까? 우리에게는 이 절망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가 없는 것일까?
이 점에서 안경은 상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절망으로부터 빠져나와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안경은 우리 인간의 관점을 변화시키거나 상승시킬 수 있는 도구다. 안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이제 최소한 두 가지 세계를 가지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안경을 착용했을 때 드러나는 명료한 세계라면, 다른 하나는 그것을 벗은 후에 보게 되는 흐릿한 세계다. 이 점에서 안경은 겉보기와는 달리 무척 심오한 기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보는 세계를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안경을 통해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갖게 된 셈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안경을 갖기 위해서는 광학(optics)이란 학문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경은 광학이란 이론이 물질화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광학은 무엇보다도 빛,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눈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광학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학문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근본적으로 낯설게 만들면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붉은 장미꽃을 본 뒤 이 꽃은 붉은 색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마치 그 장미꽃이 붉은 색을 자신의 성분으로 갖고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광학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붉은 꽃이 붉게 보이는 이유는 그 꽃이 태양빛 중 붉은 색을 띠는 파장대의 빛만을 반사하고, 그 빛을 우리 눈이 감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꽃은 붉은 색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붉은 색을 튕겨내는 셈이다. 보는 작용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이해방식을 근본적으로 동요시키지 않았다면 광학은 결코 학문으로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안경을 가질 수 없었을지 모른다.
바슐라르는 광학과 같은 과학이 일상적 이해방식을 동요시키고 극복하는 과정을 ‘인식론적 단절(rupture épistémological)’이란 말로 설명했다. 사실 새로운 이해를 낳게 하는 이런 단절 때문에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에게는 역사라는 것이 존재한다. 근본적인 단절 없이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역사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 속에는 거짓된 세계와 진짜 세계라는 종교적이고 허위적인 이분법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점이다. 역사는 오직 낡은 세계와 새로운 세계라는 역동적인 생성과 창조만이 숨을 쉬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소중한 것이다. 역사는 우리가 주어진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럴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안경을 쓰고 있다. 안경을 보면서 가끔 나는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안경을 착용하였을 때 도래한 새로움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되물어 볼 때가 있다. 관찰자로서 우리는 자신이 보는 세계와 떨어지려고 해도 떨어질 수 없는 존재다. 이 점에서 마투라나와 니체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불행히도 우리는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불쌍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안경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이론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새로운 이론이 가져다주는 낡음과 새로움이란 구분이 진짜와 가짜라는 구분보다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새로운 이론을 통해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관찰자가 되고, 그만큼 이전과는 다른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