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친구가 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고, 한 때 적이었던 사람이 둘도 없는 친구로 변할 수 있다. 한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임을 강조했던 메디치 가문의 후계자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는 세상사는 이치가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문의 영향력이 커지고 접촉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세상을 경륜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체득하게 된다. 아무리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신의를 굳게 지켜 나간다 해도 상대방이 그 신의를 저버리고 내게 해를 끼치는 말과 행동을 일삼을 때,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렇다. 나 자신에게만 손해를 끼친다면 그래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악의적인 행동으로 내가 이끌고 있는 조직이나 기업에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나를 지도자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는 것은 막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1429년에 가업을 승계했다.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가 안목이 탁월했던 사업가였다면 메디치 기업의 제2대 회장이었던 코시모는 한 시대를 이끌었던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 피렌체에서 제일가는 기업가였을 뿐만 아니라 도시국가 피렌체의 정치적 운명을 책임진 정치가였으며, 이탈리아 반도의 평화를 지켜내야 했던 국제적 인물로 성장했다. 그가 가진 부의 규모와 정치적 가능성을 견제하던 피렌체 귀족 가문들의 모함을 받고 투옥과 추방이라는 시련을 겪으며, 한 기업의 리더에서 한 시대의 지도자로 거듭났다. 그는 친구의 배신이라는 쓰라린 경험도 했고, 어제의 적을 오늘의 동지로 만들어야 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코시모는 친구와 적이 뒤섞여 있는 세상에서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라는 독특한 외교정책을 고안해냈다. 사람 관계에서, 비즈니스 관계에서, 나라 간에 발생한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코시모는 힘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한 시대를 이끌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코시모를 평화를 가져다 준 ‘나라의 아버지’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시모에게 닥친 시련
1429년은 메디치 기업의 첫 번째 승계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해였다. 메디치 가문의 실질적인 창업자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는 가문의 이름을 딴 은행을 피렌체에서 세 번째 가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됨으로써 사업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고 전 유럽으로 은행 지점을 확장시킨 것은 그의 아들 코시모였다. 그의 아버지가 피렌체 평민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면 코시모는 여기에 귀족 가문들로부터 호감과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피렌체 하층민들을 지지했던 메디치 가문의 전력을 문제 삼아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던 니콜로 우짜노도 결국 코시모의 지지 세력으로 바뀌었다. 메디치 가문의 급부상을 우려하던 다른 귀족 가문들이 코시모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펼쳤으나 피렌체 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우짜노는 코시모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됐다.
그러나 젊은 코시모의 지지자였던 우짜노가 1433년 사망하자 상황은 급변한다. 당시 피렌체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알비찌(1370∼1442)는 코시모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아뇰료 판돌피니의 당시 기록에 의하면, 피렌체의 보수기득권층을 대변하던 알비찌는 성급하고 지나치게 냉정했을 뿐 아니라 ‘비판을 참지 못하고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신경질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다. 1 1 K. Dorothea Ewart, Cosimo de’ Medici (New York: Cosimo, 2006 [1899]), 44.
닫기지도자가 갖춰야 할 미덕이 결여됐던 그의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피렌체 시민들의 불만은 높았지만 그는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세습 귀족 세력의 힘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피렌체 시민들은 코시모에게 점점 친근감을 느꼈다. 피렌체 시민들은 코시모의 장점을 알비찌의 단점과 자주 비교하곤 했다. 질투심에 치를 떨던 알비찌는 귀족 세력의 힘을 빌려 코시모를 제거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피렌체의 국가원로였던 우짜노가 없었다면 젊은 코시모는 권력을 쥐고 있던 알비찌에게 희생당했을 확률이 높다.
우짜노가 사망하자 알비찌는 평소 소원대로 코시모 제거 작전에 돌입한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 났던 코시모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피렌체를 빠져나와 자신의 별장이 있는 무젤로에 은둔한다. 1433년 5월, 칩거에 들어가 숨죽이며 피렌체의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알비찌는 자신의 측근을 시뇨리아(피렌체 행정부)의 대표인 곤팔로니에리 자리에 앉히고 코시모 제거를 주도하게 한다. 2 2 베르나르도 구아다니란 인물로 이 사람의 부친이 알비찌와 친구였다. 또한 구아다니는 피렌체 정부에 납입할 세금을 내지 않아 명예롭지 않은 인물로 간주됐으나 알비찌가 밀린 세금을 대납해 주고 그를 매수하게 된다. 피렌체에서는 세금 미납자(a specchio)를 공직에 등용치 않는 전통이 있었다.
닫기피렌체 시뇨리아는 시골에 은둔 중인 코시모에게 소환명령을 내린다. 결국 그해 9월7일, 코시모는 시뇨리아 정청의 종탑 감옥에 투옥된다.
갑작스러운 투옥이었지만 코시모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먼저 감옥에서 주는 음식을 먹지 않고 버텼다. 독살의 가능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마침 간수가 메디치 가문의 은덕을 입었던 사람이라 코시모는 그를 이용해 바깥세상과 소통했다. 코시모의 동생 로렌초와 사촌 아베라르도는 체포를 면했고, 평소 코시모의 재정지원을 받았던 용병대장 토렌티노는 급히 군대를 조직해 구출작전을 전개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또한 알비찌의 후원을 받고 있던 곤팔로니에리를 1000플로린의 거금을 들여 매수해 코시모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오도록 유도했다. 피렌체 시뇨리아는 코시모의 처벌수위를 놓고 극심한 분열 조짐을 보였다. 결국 친(親) 메디치로 입장을 바꾼 곤팔로니에리의 주도로 코시모는 5년 추방형이 내려졌다. 약 4주간 감옥에 투옥됐던 코시모는 파두아를 거쳐 베네치아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코시모는 망명지 베네치아에서 칙사 대접을 받았다. 전통적으로 피렌체의 우방 국가였던 베네치아는 코시모가 곧 복권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코시모는 망명자인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석호(潟湖)의 도시에 예술 후원자다운 멋진 선물을 기증했다. 코시모는 총애하던 신예 건축가 미켈로초에게 산 조르조 성당의 도서관을 건축하도록 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코시모에게 매혹 당했고,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했다. 한 피렌체 시민은 이렇게 탄식했다. “코시모와 같은 탁월한 지도자를 추방하다니! 그야말로 피렌체의 기둥이며, 지혜의 샘이고, 모든 이탈리아의 깃발인 동시에, 모든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가 아니던가!” 3 3 앞의 책,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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