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억 인구에 껌 한 통씩만 팔아도’라며 ‘묻지마 차이나 러시’를 감행했던 기업들은 지난 몇 년간 초라한 경영 성적표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중국을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한 생산기지로 삼기 어려운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3억 시장을 보고 덤벼드는 경쟁사는 산업분야별로 평균 100개가 넘는다.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시장인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시장이 중국이다. 저가 시장은 저가 시장대로 중국기업들이 값싼 가격으로 장악하고, 고가 시장에선 아직까지 한국 브랜드를 최고라고 인정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더 이상 ‘한국에선 어려워도 여기선 성공하기 쉽겠지’ ‘버티면 성공한다’ ‘살아남으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안일한 생각으로는 중국시장에서 성공할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중국사업의 경영환경은 급격하게 변해왔다. 첫째 최근 중국정부는 외자기업에 대해 ‘특혜 축소’와 ‘선별적 비준’, ‘관리감독 확대’ 정책을 펴고 있다. 즉 중국정부의 경제성장 정책의 중심이 더 이상 외국자본 투자 유치가 아니라 내수 소비시장 확대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중국정부는 자국기업 육성 및 보호 정책을 노골화하고 있다. 과세제도, 반독점법, 노동법 등은 표면적으로는 내외자 기업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외자기업을 타깃으로 무시무시한 칼날을 들이대기 일쑤다. 셋째, 중산층 증가, 도시화 진전, 낙후 시장 성장 등으로 중국 경제가 불안함 속에서도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자동차, 가전제품, 컴퓨터 등 소비재 판매에서 미국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변화에 따라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의 인식도 변하고 있다. 작년 7월 KOTRA가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 636개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48.6%가 향후 중국사업을 확대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업을 축소하겠다고 응답한 기업의 비중은 6.1%에 불과했다. 중국진출 한국기업들이 최근 급작스러운 경영환경의 변화를 오히려 기회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많은 한국기업들은 변화에 순응하면서 기업의 비즈니스모델을 바꾸고 추가적인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최근 한국기업의 중국전략 변화
경영환경 변화에 따라 최근 한국기업들의 중국전략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감지된다. 추구하는 전략 방향은 기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①전선(戰線)의 확대(유통 커버리지 확대)현대자동차는 2009년 중국 신장성(新疆省), 윈난성(雲南省), 간쑤성(甘肅省) 등 서부지역에 28개의 신규 대리점을 개설했으며, 2010년 중 중국 전역에 100여 대리점을 신규 개설할 예정이다. 현대차의 올해 중국시장 판매목표는 지난 해의 57만 대보다 28% 증가한 72만9000 대이며, 공급량 확대를 위해 연산 30만 대 규모의 제3공장 건설도 추진 중이다.
CJ제일제당은 포장식품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바이위(白玉)’ 브랜드로 베이징 포장두부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베이징에서 거둔 성공 방식을 타 지역으로 이식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CJ오쇼핑은 중국 상하이미디어그룹과의 합자법인인 동팡CJ가 24시간 쇼핑 방송이 가능한 홈쇼핑 전용채널 허가를 획득함으로써, 중국사업에 청신호가 켜졌다. 기존 방송채널의 일부 시간을 임대해 운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한국에서처럼 24시간 방송편성이 가능해졌다. CJ오쇼핑은 올해 무난하게 중국시장 점유율 1위 자리에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②비즈니스 모델 현지화 두산인프라코어는 이제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기업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성장했다. 올해 예상 판매량 1만4000대, 15% 내외의 시장점유율로 고마쓰와 치열한 선두 경쟁을 벌이고 있다. 후발주자인 두산인프라코어가 중국시장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중국에서 성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단순하고 가격이 저렴한 제품을 개발하고, 중국에 적합한 유통망을 구축했으며 할부판매를 실시했다. 지금은 중국 공사현장 어디를 가나 두산 브랜드가 박힌 굴착기를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됐다.
이랜드 그룹도 중국에서 선전하고 있다. 이 회사의 브랜드인 헌트와 이랜드, 스코필드는 모두 중국의 고급 백화점에 입점해 있으며, 지난해 매출은 3000억 원을 훌쩍 넘어섰다. 한국에서는 중저가 브랜드로 포지셔닝했지만, 중국에서는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고급 의류에 속한다. 사실상 브랜드만 그대로 사용했을 뿐, 비즈니스 모델과 브랜드 포지셔닝, 마케팅 전략을 모두 현지화한 예다.
③가치사슬 현지화를 통한 시장대응력 강화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는 각각 쑤저우(蘇州)와 광저우(廣州)에서 TFT-LCD 패널생산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지금까지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는 중국 현지에서 부가가치가 낮은 후공정 생산공장만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중국 현지 고객(로컬 TV 생산기업)에 밀착 대응해 중국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이러한 의사결정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 LCD TV 시장이 전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에 약 20%까지 늘어나,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시장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또한 대만기업의 공략으로 치열한 경쟁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석유화학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LG화학은 중국해양석유총공사(CNOOC)와 합작해 광동성(廣東省) 후이저우에 아크릴로니트릴부다디엔스타이렌(ABS)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중국 ABS 시장수요의 절반 이상이 화남지역에 집중돼 있어, 고객에게 밀착 대응하겠다는 전략이다.
④고부가가치화와 차별화 LG전자의 중국전략은 ‘집·현·전’, 즉 ‘집중화’와 ‘현지화’, ‘전문화’로 요약된다. 풀어서 얘기하자면, 첫째 무리한 시장 커버리지 확대보다는 수익성을 담보할 수 있는 시장에 집중하고 둘째, 인력과 비즈니스 모델을 현지화하며 셋째,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프리미엄 제품을 판매해 브랜드 이미지를 개선한다는 전략이다. 2006년부터 꾸준하게 ‘집·현·전’ 전략을 실행한 결과, LG전자는 휴대폰, LCD TV, 양문형 냉장고 등 고부가가치 제품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포스코는 향후 중국의 자동차강판 시장 공략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자동차강판은 철강제품 중 품질 구현이 가장 힘든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중국 자동차 시장의 폭발적 성장세와 맞물려 시장 매력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자동차강판 제품에서 이미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포스코는 향후 중국 내 주요 자동차 생산기지 인근에 자동차강판 생산 클러스터를 건설해 적극적으로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