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 트레이닝의 피로를 씻는 석학과의 만남

56호 (2010년 5월 Issue 1)

슬론 MBA스쿨에서 첫 학기를 보낸 필자의 소감은 ‘내가 슬론 고등학교에 다니는구나’다. 오전 8시 30분부터 미리 짜인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선 밤 늦게까지 숙제하느라 정신이 없는 생활은 그야말로 고등학교 때와 똑같다.
 
올해 2월부터 시작된 두 번째 학기는 여러모로 여유가 생겼다. 첫 학기에 빡빡한 학사 과정 및 서머 인턴 활동을 병행하며 습득한 능력, 즉 신속한 의사결정과 효율적 시간 관리가 ‘MBA형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필자가 이번 학기에 특히 관심을 갖고 신청한 과목은 슬론 MBA스쿨을 대표하는 세계적 석학인 레스터 서로 교수의 ‘경제 정책(Economic Policy)’과 에릭 폰 히펠 교수의 ‘상품과 서비스의 돌파구를 개발하는 방법(How to develop breakthrough product and service)’이다.
 
노(老) 석학이 본 중국 경제의 미래와 허상
서로 교수는 대다수 슬론 스쿨 학생들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인 1960년대 린든 존슨 당시 미국 대통령의 경제보좌관을 역임했다. <헤드 투 헤드(Head to Head)>, <제로 섬 사회(Zero-Sum society)>, <지식의 지배(Building Wealth)> 등 명저를 저술한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그의 이름 앞에 따라오는 수식어들은 ‘금세기 최고의 지성’,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 등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 탓인지 강의실에 등장한 그의 모습은 동네 복덕방 할아버지와 비슷했다. 그러나 명불허전이었다. 서로 교수가 가진 세계 및 미국 경제에 대한 견해와 통찰력은 깊고도 예리했다.
 
서로 교수는 50년 이상 자신이 학계 및 공직에서 쌓아온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정립한 ‘경제를 바라보는 원칙(Rule)’을 하나씩 소개한다. 필자가 특히 인상 깊었던 한 가지는 바로 ‘언론 보도에는 믿지 못할 정보들이 가득하다(Rule #1: Media is full of misinformation)’다. 그는 중국 경제의 장래와 관련된 언론들의 무분별한 장밋빛 보도를 사례로 제시했다. 서로 교수는 “많은 언론은 중국이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 될 거라고 보도하는데 대체 언제 된다는 말인가? 무슨 기준으로?”라고 반문한다. 그의 주장은 “21세기가 중국의 세기가 될 거라는 말들이 많은데 어림없다. 22세기에나 가능할지 몰라도…”다.
 
반박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 경제의 70%를 차지하는 농촌 경제가 제자리걸음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중국 경제가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 성장을 이어가려면 중국의 대도시 경제가 매년 33%씩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발표하는 경제 성장률 수치 자체의 신뢰성이 높지 않다.
 
둘째, 중국 정부는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중국 내 전력 소비 증가율을 추월했다고 발표했지만 이 역시 믿을 만한 자료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전 세계 모든 국가의 경제 성장률은 늘 전력 사용량 증가율에 미치지 못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개발도상국의 취약한 인프라 때문에 전력 사용의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설사 선진국이라 해도 세계 상위 12개국 기준 GDP 성장률은 전력 사용 증가율의 45% 수준에 불과하다. 즉, 경제 성장률이 아무리 높아도 전력 소비 증가율을 넘어설 수가 없는데 중국 정부가 이런 발표를 했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서로 교수는 중국의 경제 성장률이 중국 정부의 발표인 10%대가 아닌 4.56.0% 수준일 거라고 추측한다. 그는 개발도상국 경제가 아무리 빨리 성장해도 세계 최대 경제 대국 지위를 확보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19세기 초반부터 급속도의 경제 성장을 이룬 미국도 과거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었던 영국을 1차 세계대전 이후에나 따라잡을 수 있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150여 년간 경제 성장을 이뤄온 일본 역시 구매력을 감안한 1인당 GDP는 아직도 미국의 80%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예도 들었다.
 
서로 교수는 물가 상승률을 감안한 중국의 연평균 성장률을 4.5%로 잡고, 미국의 성장률을 지난 15년 평균 성장률인 3%로 계산하면 2100년 중국의 1인당 GDP는 4만 5000달러, 미국의 1인당 GDP는 60만 달러를 기록할 거라고 전망했다. 현재 미국의 1인당 GDP는 4만 3000달러, 중국의 1인당 GDP는 1000달러로 무려 43배 차이가 난다. 즉 앞으로 100년간 중국은 연평균 4.5%, 미국은 3%씩 성장한다고 가정해봤자 100년 후 두 나라의 1인당 GDP 격차는 43배에서 16배로 줄어들 뿐이다. 즉, 격차는 좁혀질지 몰라도 중국의 1인당 GDP가 미국을 추월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1인당 GDP가 아닌 총 GDP로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1가구 1자녀 정책으로 중국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반면, 이민자 유입으로 미국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의 지속적 감소는 경제 전체의 활력과 성장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소비자 중심의 혁신, 왜 중요한가
히펠 교수는 슬론 스쿨의 또 다른 유명 교수인 제임스 우터벡 교수, 하버드대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 등과 함께 기업 혁신 분야의 연구를 선도해온 세계적인 전문가다. 그는 혁신 분야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필독서로 손꼽히는 두 권의 베스트셀러인 <혁신의 원천(the Source of innovation)>과 <혁신의 민주화(Democratizing Innovation)>의 저자이기도 하다. 히펠 교수는 혁신의 주도자나 창조자가 기업이라는 기존 관점을 넘어서, 상당수의 본원적 혁신이 해당 제품 및 서비스의 사용자에 의해 창출되었음을 증명한 바 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 필요에 의해 해당 제품 및 서비스를 구입하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사용자야말로 혁신을 주도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설명이다.
 
혁신 제품 및 서비스 개발에 성공한 후 한때 시장을 지배했으나 후속 혁신 제품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기업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기업의 성과와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기업 중심이 아니라 고객 중심의 신제품 개발을 저해하는 여러 장애 요인들이 생겨난다. 기존 핵심 제품이나 기술과의 연계성, 상업적 성공 가능성 등을 논하다 보면 후속 혁신 제품이 나올 여지가 대폭 줄어든다. 새 아이디어가 등장하더라도, 이게 얼마나 고객의 요구에 부합하느냐는 문제는 뒷전으로 밀릴 때가 많기 때문”이라고 토로한다. 즉 기업들이 지속적인 혁신 창출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한다고 해도, 그 투자가 실제로 고객들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제품 개발로 이어지지 않을 위험도 크다는 뜻이다. 아이팟이나 닌텐도는 업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최신의 기술력으로 무장한 제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을 열광시켰다. 반면 이들의 경쟁자는 더 많은 투자를 단행해 혁신 기술을 사용한 제품을 내놨지만 정작 소비자들은 이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혁신 제품 및 서비스를 통해 시장에 새롭게 진입하는 신생 기업의 창업자들은 대부분 해당 제품의 아마추어 마니아 출신이다. 이들은 대개 스스로의 필요와 호기심에 따라 기존 제품의 형태나 기능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경하거나 업그레이드한다. 또는 아예 없던 기능을 추가함으로써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혁신 제품의 원형(prototype)을 개발한다. 이를 상업화로 연결시키면 평범한 사용자가 유명한 경영자로 변신할 수 있다. 스팀 청소기로 유명한 한경희 사장이 대표적이다. 집안 청소에 가장 민감한 이해당사자인 주부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혁신 제품을 만들었고, 이게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어느 날 유명 경영자가 됐다. 히펠 교수는 이렇듯 사용자들이 주도하는 혁신을 사용자 혁신(User Innovation)이라 명명했다. 특히 한경희 사장처럼 특별한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기존 제품이 가진 기능 및 성능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용자들을 리드 유저(Lead User)라고 불렀다.
 
그의 저서 <혁신의 민주화>가 의미하는 대로 오랜 기간 기업들이 독점적으로 향유해왔던 혁신 상품 및 서비스 개발의 권리가 이제 사용자들에게 널리 확대되었고, 실제 기능 및 성능상의 본원적 혁신은 리드 유저가 창출할 때가 많다. 히펠 교수는 이에 따라 기업과 사용자, 특히 리드 유저가 바람직한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혁신을 위한 아이디어 도출 및 시제품 개발은 리드 유저가, 시제품의 상업화는 기업이 주도하는 게 이상적이라는 주장이다. 히펠 교수는 기업들이 더 적극적으로 리드 유저들을 발굴하고, 이들과 유기적인 협업 체계를 만들어 실제 사용자들이 발굴하는 생생한 혁신의 아이디어 및 기회들을 확보하는 일이야말로 지속적 혁신의 핵심 성공 요인이라고 강조한다. 생산자 및 소비자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이 주목해야 할 이론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책을 통해서나 만날 수 있었던 세계적 석학들의 강의를 한 학기에 여러 차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항상 필자를 즐겁게 하고, 의욕을 고취시킨다. 다음 수업 시간이 기다려지는 강의를 수강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슬론 스쿨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닐까.
 
편집자주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세계 톱 경영대학원의 생생한 현지 소식을 전하는 ‘MBA 통신’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매사추세츠공대(MIT) 슬론 스쿨,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LBS), 중국 유럽국제공상학원(CEIBS) 등에서 공부하고 있는 젊고 유능한 DBR 통신원들이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통신원들은 세계적 석학이나 유명 기업인들의 명강연, 현지 산업계와 학교 소식을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50호 Smart Worcation 2022년 08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