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경기 침체기도 과거 미국과 일본에서 그러했듯이 소비자의 태도와 가치관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측된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소비자들의 알뜰 소비가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불황기 소비자는 가격에 큰 비중을 부여하기 때문에 설혹 부가 기능이나 서비스가 줄더라도 저가 제품을 선택하곤 한다. 가격 거품을 제거한 맥도날드 커피, 넷북(노트북) 등이 인기를 모은 것은 이 때문이다. 패스트푸드, 유통업체의 자체 브랜드(PB) 상품, 패스트 패션 등 저가 핵심 기능형 상품의 매출이 증가한 것은 이번 불황기의 전 세계적 트렌드라고 할 수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더라도 세계 경제 패턴 및 질서가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질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즉, ‘고용 없는 저성장’과 더불어 이례적인 경제위기의 충격 경험이 글로벌 소비 시장 전반에 확산되는 ‘뉴 노멀’ 시대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뉴 노멀 시대에는 신중하고 절제된 소비 패턴이 어느 정도 경기가 회복된 이후까지 이어지고 가격 대비 가치를 꼼꼼히 따져보는 ‘가치 소비’가 새로운 소비 성향으로 부각될 전망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가치’란 경기 변화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가격’ 외에도 다양한 의미의 ‘혜택’을 포함한다. 즉, ‘가치(Value)=혜택(Benefit)/가격(Cost)’이라고 볼 때 가격을 줄이는 방법 외에도 여러 혜택을 늘리는 가치 지향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글로벌 소비자가 지향하는 주요 혜택은 무엇일까? 최근 글로벌 메가 트렌드로 정착한 ‘친환경’ ‘하이브리드’ ‘안전과 보안’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소비 트렌드는 최근 불황기의 경험과 글로벌 메가 트렌드의 복합적인 영향을 통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동인에 의해 경제위기 후 부상할 뉴 노멀 소비 트렌드를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1.네오 럭셔리(Neo-Luxury):일반 제품과 럭셔리의 경계 해체
경기가 회복되고 구매력이 향상되면 단순 저가가 아닌, 가격이 다소 상승하더라도 핵심 기능에 ‘플러스 알파’ 요소를 겸비한 상품이 선호될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기업들은 차별화된 인터페이스 기능이나 맵시 있는 스타일 등 새로운 매력 포인트를 부가해야만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예컨대 PB 상품도 무조건 저가보다는 기존 스탠다드급 스타일에 이코노미급 가격을 갖춘 업그레이드 PB 상품이 인기를 끌 것이다.
이처럼 가능한 한 기존 제품의 거품을 제거하고 새로운 매력 포인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반 제품과 럭셔리의 경계가 급속히 해체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고가·고품격을 핵심으로 하는 럭셔리 소비는 금번 불황 중 세계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럭셔리 업계의 구조 개편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설립 이후 30여 년간 승승장구하던 독일 명품 패션 그룹 에스카다가 2009년 8월 파산했는가 하면, 프라다도 2008년 말 경영 악화로 인해 명품 최대 성수기인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례적으로 예정에 없던 할인 행사를 단행했다. 경기 침체에도 끄떡없을 것처럼 보였던 샤넬도 심각한 매출 부진으로 경영에 압박을 받으면서 2008년 말 총 생산 인력의 10%에 해당하는 200명을 해고했다. 또 럭셔리에 대한 소비자 태도가 과거 맹목적 추종에서 최근 지극히 이성적으로 돌변함에 따라, 일본에서는 1990년대 장기 불황 때에도 위풍당당했던 명품 거리 긴자(銀座) 에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긴자 중심부 마쓰자카야 백화점 일대에는 스웨덴 H&M, 자라 등 해외 중저가 캐주얼 의류업체들이 들어섰다. ‘일본 명품 거리’의 대명사인 긴자가 ‘중저가 거리’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10월에는 캐주얼 의류에 주력하는 유니클로가 긴자점을 열었고 2009년 12월 미국 중저가 캐주얼 의류 아베크롬비&피치가 긴자에 아시아 1호점을 열었다. 이탈리아 명품 구치가 철수한 매장에 2010년 상반기 미국 중가 패션 브랜드 포에버21이 입점할 예정이며, 프랑스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이 긴자 2호점 개점을 포기한 건물에는 미국 캐주얼 브랜드 갭이 2011년 2월 신규 점포를 열 계획이다.
따라서 긴자의 명품 시대가 지나고 대중 시대가 열렸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국내에서도 대표적인 VIP용 럭셔리로 인기를 누렸던 수입차 시장이 침체되고 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2009년 1∼9월 말까지 수입차 등록 대수는 4만2645대로 전년 같은 기간(5만381대)보다 15.4%나 감소했다.
이처럼 일반 제품의 끊임없는 업그레이드와 명품의 재편 현상은 두 시장 간 간극이 급격히 좁아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심플하고 본원적인 매력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양 제품의 지향 가치가 완전하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럭셔리 브랜드든 아니든 가격이 다소 오르더라도 스타일, 디자인 등 핵심 기능과 ‘플러스 알파’를 겸비한 상품이 선호될 것으로 전망된다. 과거의 거품 기능과는 차별화된 인터페이스 기능이나 맵시 있는 스타일을 갖춘 브랜드가 소비자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다.
2.헬스 홀리즘(Health Holism) 1
조화·안심·감성 욕구 확산
2009년 전후의 경제위기 기간 중 정신 건강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생활 전반에서 육체와 정신의 균형이 잡힌 건강을 추구하는 트렌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은 사이코패스형 범죄, 유명인의 자살 등을 목격하면서 극도의 긴장감, 소외감, 우울증을 방치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됐다. 최근 5년간 국내 항우울제 소비는 52% 증가했으며 2
, 세계보건기구(WHO)는 향후 20년 내에 우울증이 에이즈나 암보다 더 큰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3
따라서 2010년에는 경제위기 중 누적된 스트레스와 퇴직 및 실직 등으로 인한 심리적 내상을 치유하기 위한 소비가 커질 전망이다. 정신과 치료에 대한 거부감이 완화되면서 퇴직으로 인한 경제적 및 심리적 상실감, 공허감을 치유하기 위해 전문의의 상담을 받는 사례가 늘어나고, 약물 치료, 집중력 클리닉, 숙면 관련 상품 시장이 확대될 것이다. 몸에 대해서도 체격 개선, 질병 관리뿐만 아니라 만성 피로, 과다 영양, 운동 부족 등 생활 습관 개선이 관심사로 부상할 것으로 예측된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여분의 염분이나 지방 성분을 배출해주는 음료, 수면 중 다리에 붙여 불필요한 성분을 빨아내는 ‘수액 시트’ 등 다양한 상품들이 주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2010년부터 베이비붐 세대 4
의 은퇴가 본격화됨에 따라 이 같은 욕구 변화가 더욱 촉진될 것으로 보인다. 1955년생이 55세를 맞는 2010년을 시작으로 2018년까지 경제 활동 현장에서 퇴직하는 인구는 무려 312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 세대는 한국보다 약 10년 정도 앞서는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로서 사회의 중심에 서 있기는 한국과 마찬가지다. 단카이 세대는 약 680만 명으로 일본 인구 가운데 5%를 차지한다. 1960년대 후반에는 학생 운동 주역이었고 이후 산업 전사로서 고도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대도시 교외 뉴타운 건설과 마이카 붐을 불러일으킨 세대이다. 일본 경제 전문가들은 1990년대 초 단카이 세대의 은퇴 및 실직이 내수 시장 위축 및 투자 감소를 야기하여 ‘잃어버린 10년’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인구 비중만 보더라도 한국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인한 사회경제적 영향은 일본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전체 인구 중 무려 14.6%를 차지하는 한국 베이비붐 세대의 활동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다. 1970, 1980년대 과밀 학급과 대학 정원의 증가를 야기했고 1990년대 자가 운전과 아파트 시대를 본격화시킨 주역이기도 했다. 또한 이들의 소비 성향에 따라 다양한 상품과 공간들이 창조되는 등 한국 소비 문화 창조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2010년 첫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더불어 이들이 지향하는 조화·안심·감성 욕구가 전체 소비 시장으로 확산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