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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강신주 | 50호 (2010년 2월 Issue 1)

 
1929년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어느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안에는 매우 흥미로운 구절이 있었다. “신이 도착했다!” 도대체 신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케인스에게도 ‘신’으로 보였던 사람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바로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이다. 그는 1922년 영어로 출간된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끝으로 모든 공식적인 업무를 정리하고 케임브리지대를 떠났던 사람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만 한다”는 유명한 명제로 마무리되는 <논리철학논고>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마침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려던 그의 노력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는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는 삶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케임브리지의 지성계를 떠나서 오스트리아 시골 오지로 떠났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순한 학문적 관심에서 언어를 숙고했던 철학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 언어는 윤리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다. 특히 그가 혐오했던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 함부로 말하는 인간의 허영이나 과시욕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의 속내에 대해 당사자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함부로 이야기하고 있는가?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을 오직 두 사람이 모두 볼 수 있는 것에만 한정시킨다. 예를 들어 “서쪽으로 200m만 가면 우체국이 있어요.” “겨울이 되면 동백이 피겠지요.” 등은 말할 수 있는 것의 예가 될 수 있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적인 것, 종교적인 것, 그리고 개인적인 취향과 같은 인간 내면과 관련된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실연으로 내 마음은 찢어질 것 같아.” “네 영혼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등이 아마도 ‘말할 수 없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고 표연히 떠났던 그가 케임브리지대로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다시 철학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그 유명한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시대는 가고 장년 비트겐슈타인의 시대가 열리게 됐다. 청년 시절 <논리철학논고>를 쓰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는 지시(reference)에 놓여 있다고, 아니 정확히 말해 무엇인가를 지시할 수 있는 것만이 언어의 정확한 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시하기 힘든 인간의 내면을 언어로 지시하려는 시도를 그가 그렇게도 비판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결론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 물론 어떤 단어나 문장의 의미가 ‘지시’에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노트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노트북을 가리킨다. 그런데 1953년 사후에 출간된 말년의 주저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를 보면 이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의미가 그것의 사용(use)에 있다는 통찰에 이르게 된다. 물론 ‘지시’라는 것도 결국 언어의 사용 혹은 용례의 한 가지 사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무엇인가를 가리키기 위해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의미가 그 사용에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한 말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철학적 탐구>
 
조금 난해하다고 느껴지는 구절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논점은 결국 “나는 ∼를 안다”라는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와 관련된 것이다. 정말로 우리는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을까? 친구 앞에서, 혹은 애인 앞에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지 찬찬히 잘 생각해보자. 그렇다. 우리는 결코 이런 식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억지로 흉내를 내서 그렇게 사용할 수는 있다. 그럴 경우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은 아마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우리를 당혹스런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뜻에서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지 고민할 것이다.
 
재래시장에 가면 반드시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야, 멍청한 년아, 물은 네가 갖다 먹어야지. 내가 가져다주랴.” 이런 표현을 처음 들었다면 여러분들은 아마도 불쾌감에 얼굴이 달아오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상스러운 표현들이 그곳에서는 예전부터 그렇게 쓰이고 있는 말일 뿐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멍청한 년’은 ‘머리가 나빠서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여자’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욕쟁이 할머니에게 있어 ‘멍청한 년’은 ‘내 손녀같이 귀여운 여자’라는 정도의 친근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이 욕쟁이 할머니는 다른 곳에 가면 함부로 그런 욕을 내뱉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언어 사용의 이런 다양한 맥락들을 염두에 두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 혼자 추측하지 말고 실제로 언어가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그 상황을 배우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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