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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 디자인 캠페인

디자인 경영, CEO 넥타이까지 바꿔라

하정민 | 47호 (2009년 12월 Issue 2)
1997년 기아자동차의 부도는 전대미문의 외환위기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보나 진로의 부도는 외환위기의 예고편이었다. 여기에 당시 재계 서열 8위였던 기아의 부도가 가져온 파문은 엄청났다. 정부는 기아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이 와중에 기아차 경영진, 정치권 및 사회 일각에서 기아를 회생시키기 위해 공기업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자 결국 스탠더드 앤 푸어스(S&P)는 1997년 10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하향했다. 2달 후 한국은 IMF 관리체제에 들어갔다.
 
당시 기아의 부도 원인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이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꼽는 이유는 디자인 역량 부족이었다. 당시 기아차가 수천억 원의 개발비를 투입해 야심 차게 출시한 ‘크레도스’와 ‘아벨라’는 디자인 측면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고 결국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했다. 표류하던 기아차는 1998년 현대차에 합병됐다.
 
이후 11년이 흘렀다. 이제 ‘기아=외환위기’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쏘울’ ‘포르테’ ‘모닝’ ‘로체이노베이션’ 등 최근 기아차가 내놓은 신모델들은 호평을 받고 있다. 이에 힘입어 기아차는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누계 영업이익 7327억 원을 기록했다. 창사 이후 최초로 영업이익 1조 원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시장점유율 또한 1995년 이후 14년 만에 다시 30%대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2009년 11월 19∼24일 마케팅 교수와 전문가 및 대학생 12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기아차는 ‘가장 혁신적(창의적)인 마케팅 콘셉트를 보여준 브랜드(상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케팅으로 가장 높은 고객 만족을 이끌어낸 브랜드(상품)는 무엇입니까?’ ‘앞으로도 장기간 마케팅 활동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브랜드(상품)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들에서 모두 2위를 차지했다. 이 변화를 가능케 한 요인이 바로 디자인 경영이다.
 
 
외국인 최고디자인책임자(CDO) 영입
2005년 11월 기아차는 옵티마에 이어 5년 만에 야심 찬 신작 로체를 출시했다. 현대 ‘쏘나타’와 같은 엔진을 사용하면서 가격은 100만 원 이상 쌌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당시 국내 경기 상황이 좋았지만 판매 부진은 이어졌다. 기아차는 쏘나타에 비해 브랜드 경쟁력이 떨어지고 차별화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진단했다. 이를 단시일 내에 극복하려면 디자인 역량부터 끌어올려야 한다고 판단, 본격적으로 디자인 경영의 시동을 걸었다.
 
디자인 경영의 시발점은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인 피터 슈라이어를 최고디자인책임자(CDO·Chief Design Officer) 및 부사장으로 영입하는 일이었다. 2006년 초 기아차에 합류한 슈라이어는 폭스바겐와 아우디에서 CDO를 지냈으며 BMW의 크리스 벵글, 아우디의 월터 드 실바와 함께 유럽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힌다.
 
최고 경영진 9명 중 6명이 외국인인 LG전자, HR 최고 책임자를 외국인으로 두고 있는 (주)SK나 SK텔레콤 사례에서 보듯 최근 외국인 최고위 임원을 뽑는 대기업이 늘고 있다. 그러나 불과 3년 전만 해도 최고위 임원을 외국인으로 영입하는 기업은 극히 드물었다. CDO라는 직책을 만든 사례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현대 특유의 보수적인 기업 문화를 감안할 때 과연 외국인이 한국 회사에 얼마나 잘 적응하겠느냐, 얼마 있다 떠나갈 얼굴 마담에 불과한 거 아니냐는 우려 또한 팽배했다.
 
이때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직접 슈라이어 영입에 팔을 걷어붙였다. 슈라이어는 기아차가 제시한 파격적인 대우와 거듭된 영입 요청에도 결정을 망설였다. 하지만 2006년 5월 한국을 방문해 정의선 당시 최고경영자(CEO)를 만나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후 기아에 합류했다. 그가 온 후 기아차의 디자인 부문은 회사 내 위계질서에서 자유로운 독립된 별도 조직으로 기능하며 경영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슈라이어는 기아차 부임 후 가장 먼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명확히 표현하는 데 매달렸다. ‘무난하고,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차’라는 이미지에 갇혀 있었던 기아차에 고유의 색깔을 입히는 게 시급하다는 이유다. 그가 내세운 콘셉트는 간결하고 아름다운 라인을 만들겠다는 ‘직선의 단순화(simplicity of the straight line)’였다. 현대차의 아류로 취급되는 기아차의 이미지를 탈피하려면 젊고, 빠르고, 생동감 있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단순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디자인을 채택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세계적인 고유가로 차 크기를 줄이고 불필요한 사항을 없애려는 화두가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기아라는 명칭의 음성학적 어감 또한 짧고 강렬하다는 점에서 직선의 단순화와 일맥상통한다.
 
현대차의 ‘아반떼’ 쏘나타의 디자인은 곡선을 많이 강조한 반면 뉴모닝, 로체이노베이션, 포르테, 쏘울 등 기아차의 최근 제품들은 직선을 강조한다. 기아차가 경쟁력을 지닌 소형차 시장에서는 가격 경쟁력을 차별화 무기로 내세우는 회사가 많다. 이 시장에서 디자인을 차별화 포인트로 내세웠다는 점 자체가 시장을 새로 규정한 셈이다. 이를 기반으로 기아차는 20, 30대 젊은 층이 선호하는 차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확실히 구축했다.
 
디자인 경영을 본격화하기 전 기아는 뚜렷한 브랜드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시장 내 위치도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도 없다(everywhere but nowhere)’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좋건 나쁘건 이미지를 갖는 게 무색무취한 것보다 훨씬 낫다. 디자인 경영으로 현대차의 자매 브랜드라는 인식을 떨쳐내고 기아만의 독립적인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디자인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 확립
과거 기아차에는 판매 부문이 연구개발(R&D) 부문이나 생산 부문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 디자인 부서는 연구개발 부서의 권력 피라미드에서도 하위에 있을 때가 많았다. 모델 품평회 등에서도 디자이너들이 내놓은 제안에 경영진이나 기술, 제조, 판매, 재정 부문의 부정적 반응이 등장하면 이를 번번이 수정하거나 폐기하는 일도 많았다. 2005년 출시됐던 로체는 임원들을 대상으로 사내 품평회를 가지기 전만 해도 날렵한 디자인의 차였다. 그러나 품평회를 거치면서 ‘트렁크를 크게 하자, 뒷좌석을 넓히자’는 식의 주문이 쏟아졌고 결국 차별화 요인이 별로 없는 평범한 디자인의 차가 나왔다.
 
하지만 디자인 경영을 본격화한 후에는 기술적, 재정적 제약 때문에 디자인 부서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졌다. 다른 부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신차 기획 단계에서부터 신차 출시 전 6∼7개월간의 시험 생산 기간 중 크고 작은 수정 문제에서도 디자인 팀이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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