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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금융의 몰락, 그 이후

닐 퍼거슨(Niall Ferguson) | 37호 (2009년 7월 Issue 2)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던 이번 금융위기가 끝나면, 미국의 금융 시스템은 이전과 전혀 다른 양상을 띨 것이다. 일각에서는 금융위기로 미국 경제와 달러화가 그간 차지했던 독보적 위치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필자는 금융위기 이후의 미국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금융은 1980년대 월가의 숨 막히는 머니 게임과 런던 금융 빅뱅이 전개됐던 1980년대부터 급격히 성장했다. 하지만 현대 금융은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2008년 9월 15일 그 종말을 고했다. 9·11 테러가 일어난 지 7년 후인 2008년 9월 15일, 월가는 9·11보다 더한 타격을 입었다.
 
2008년 9월에는 불과 19일 동안 재앙과도 같은 7가지 사건이 등장했다. 이는 한 시대의 종말을 예고했고, 리먼의 몰락은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9월 7일의 첫 번째 사건은 양대 국책 모기지 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국유화였다. 9월 14일에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메릴린치 인수를 발표했다.
 
9월 16일에는 리먼 브라더스로부터 사들인 무담보 상업 어음이 엄청난 손실을 입은 탓에 미국 대형 머니마켓펀드(MMF)인 리저브 프라이머리의 순자산 가치가 주당 1달러 이하로 폭락했다. 같은 날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미국 최대 보험회사 AIG의 파산을 우려해 8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했다. AIG는 FRB로부터 구제금융을 지급받는 대신 79.9%의 지분을 넘기는 형태로 국유화를 진행했다.
 
9월 22일에는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가 은행 지주회사로 변신했다. 이로 인해 한때 세계 금융을 쥐락펴락했던 투자은행(IB)의 존재가 월가에서 사라졌다. 마지막 날인 9월 25일에는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미국 최대 저축은행인 워싱턴뮤추얼을 압류했다. 워싱턴뮤추얼의 몰락은 미 역사상 최악의 은행 도산 사태였다.
 
서브프라임 위기는 2006년부터 시작됐지만, 2008년 9월 결국 미국의 금융 체계는 벼랑 끝으로 떨어졌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가 미국 경제와 세계 금융 시스템에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위기에서 몰락까지
현재의 불경기가 전대미문의 불황으로 연결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보자. 전미 경제조사국(NBER)에 의하면 1929년 8월 시작된 불황은 무려 43개월 동안 이어졌다. 역사학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대공황은 1873년에 시작돼 장장 65개월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이어졌다. 현재의 미국 경제가 이처럼 오랫동안 하락세를 이어간다면, 2013년 5월이 지나야 경기 회복을 논할 수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진 상황에서 2013년을 맞이했다고 가정해보자. 강제 통합 및 국유화로 BOA와 씨티라는 미국 최대 은행 두 곳을 합쳐놓은 씨티뱅크오브아메리카(Citibank of America)는 미국 소매은행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2007년 8534개에 달했던 미국의 은행 수도 절반으로 줄었다. 전 세계에는 금융위기 이전 수준의 3분의 1도 안 되는 3000여 개의 헤지펀드가 존재할 뿐이다.
 
지난 4년간 티모시 가이스너 미국 재무장관이 새롭게 도입한 규제 정책은 금융시장 환경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경영진 보상, 은행 자본 총액, 파생상품 거래 등에 새로운 규제가 속속 가해지면서 소매은행 부문은 일종의 공공사업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헤지펀드, 보험회사와 같은 비(非)은행 금융기관도 새롭게 등장한 기관인 규제금융위원회(Financial Authority for the Regulation of Systemic Institutions·FARSI)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다.
 
FARSI의 엄청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여전히 금융위기로 인한 재정 적자를 해결하느라 허덕이고 있다. 미 연방정부의 빚은 오바마 행정부가 지난 2009년 예산을 발표하면서 예상했던 금액보다 3조 달러나 많은 20조 달러에 이르렀다. 최고 소득세율은 45%에 달했다.
 
주식시장 상황도 좋지 않다. S&P500 지수는 1991년 12월 수준인 418로 떨어졌다. S&P의 하락폭은 대공황이 진행됐던 1929년부터 1934년까지의 하락폭에 견줄 만하다. 미국의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2010년 이후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과거 일본이 그랬듯 ‘잃어버린 10년’의 한가운데 서 있다.
 
사람들은 맨 처음 이런 현상을 ‘서브프라임 사태’라는 말로 표현했다. 하지만 이는 곧 ‘신용경색’으로, 다시 ‘글로벌 금융위기’로 발전해 나갔다. 2013년 현재는 ‘몰락’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등장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몰락은 세계 경제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006년 당시 미국 GDP의 5분의 1에 불과했던 중국의 GDP는 2013년 현재 미국의 절반 수준까지 높아졌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 달러 대신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발행하는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SDR)을 세계 기축통화로 대체하기로 약속했다. 그 결과 중국 위안화에 대한 달러 가치가 절반으로 급락했다. 세계 석유 가격마저도 SDR로 매겨지고 있다.
 
플로리다 주지사이자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젭 부시는 2012년 공화당 대통령 경선에서 새라 페일린을 물리쳤다. 이 여세를 몰아 그는 백악관 입성에 성공했다. 이제 새 대통령 젭 부시가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펴야 할 때가 왔다. 신임 미국 재무장관 존 폴슨은 전임자가 IMF로부터 빌린 1500만 SDR을 상환하기 위한 협상에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세계 곳곳의 금광에 투자하고 있는 그는 미국을 다시 금본위제 국가로 만들려는 부시 대통령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등 G4 국가의 외무장관들은 최근 회의에서 수입 의류 및 자동차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루 돕스 미국 상무장관의 발언을 비난하고 나섰다.
 
한편 미국 국방장관 맥스 부트는 이란 부셰히르 근처 방사능 오염 지역에 미국의 로봇 군대를 상주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로봇 부대 상주 계획이 이란의 핵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이란을 공격하려는 이스라엘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임을 밝혔다. 즉 부시 행정부가 선보인 ‘이란 자유화 작전(Operation Iranian Freedom)’의 일환인 셈이다. 비록 미국 실업률이 12%에 달했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이란 내 군사 작전 성공 소식에 고취돼 있다. 2010년 오바마 전 대통령의 테헤란 방문이 엉망이 된 후, 이란은 오바마 행정부에 여러 차례 굴욕을 안겨줬다. 하지만 미국 국민들은 남중국해에서 일어난 미군과 중국군의 해상 충돌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시나리오가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느껴진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 주식시장은 여러 차례 반등했지만, 결국 장기적으로는 하강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29년 10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3년 넘게 다우지수는 전체 거래일의 15% 정도 기간에만 불과 2% 상승했다. 하루에 5% 이상 상승한 날은 34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여러 차례의 불황을 보면, 평균 10개월 동안 경기 침체가 이어졌다.
 
1870년대로의 회귀
이번 불황에 대해 그나마 희망을 품어볼 만한 가능성이 하나 있다. 이번 불황은 19731975년 불황, 19811982년 불황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두 차례 최악의 불황보다는 나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 기대가 사실이라면, 이 글이 나올 즈음 미국 경제의 회복세가 시작돼야 한다.
 
물론 다른 시나리오도 있다. 이번 불황이 대공황(19291933년)이나 19731975년 불황을 닮지 않고, 오히려 19세기 말에 나타난 장기간의 디플레이션과 비슷하게 진행된다면 어떨까. 19세기 말의 디플레이션은 1873년 10월 공황이 발생한 직후 시작돼 1879년 3월까지 이어졌다. 이 불황은 1930년대 대공황보다 기간은 길었지만 그 여파는 상대적으로 덜 치명적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와 마찬가지로, 이 디플레이션 역시 통화 정책의 실패에서 비롯됐다. 당시 미국 정부는 오직 금만이 지폐를 대신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은은 더 이상 통화의 기능을 갖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디플레이션을 불러온 이 결정은 대중으로부터, 특히 많은 빚을 지고 있었던 농부들로부터 지지받지 못했다.
 
이 조치 때문에 철도 발전으로 인한 기술 및 건설 붐도 끝났다. 필라델피아에 본사를 두고 있던 대형 은행 제이 쿡 앤 컴퍼니의 몰락은 대공황의 서막을 알렸다. 주가가 급락이 아닌 점진적 하락세를 타기는 했지만, 월가에는 매물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주가 낙폭도 커졌다. 최고치를 기록했던 1872년 5월부터 최저치를 기록했던 1877년 6월까지 미국 주식시장은 47% 하락했다. 이번 금융위기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전 세계에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났다. 당시 베를린과 빈의 금융 시장이 먼저 무너졌다. 이후 5개월 만에 미국 금융시장까지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1930년대 대공황에 비해 1870년대에는 전체 산출량의 감소는 적었다. 불경기가 지속되는 동안 미국의 실질 GDP가 하락한 해는 1874년뿐이었다. 1877년에는 1872년보다 생산량이 12% 늘어났다. 이때 생산량이 늘어난 이유는 다음 2가지다. 첫째, 중서부 지역의 곡물 생산량과 북동부 지역의 철강 생산량이 동시에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은행 수가 꾸준히 늘어나 통화 공급량이 줄어들지 않았다.
 
둘째, 위기가 세계화의 몰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1870년대 말, 많은 국가들이 관세를 올리면서도 자본의 흐름이나 이동에는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무역도 심각한 방해를 받지 않았다. 사실 철도 노선이 늘어나고 대양을 가르는 상선의 효율성이 한층 높아지면서 무역량은 오히려 늘어났다. 미국 채권 및 주식에 대한 해외 투자자들의 관심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금융위기는 1870년대와 같은 장기 디플레이션의 형태를 띨까? 아니면 1930년대 대공황과 같은 모습을 할까? 혹은 1970년대 장기 불황과 비슷할까? 답은 ‘부채와 자산 가치 하락’ ‘금융 완화 정책 및 재정 확대’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누가 채권을 살 것인가?
이번 금융위기의 핵심 원인은 은행의 과도한 차입 경영이다.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지나치게 높은 부채 대비 자본 비율, 혹은 자산 대비 자본 비율이 문제였다. 1820세기에는 예금 규모, 최소 지급준비금, 예금 인출 쇄도 위험 등 은행의 무분별한 대출을 막기 위한 여러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말 이후 은행들은 몸집을 불리기 위해 다른 은행, 혹은 신종 기업 어음 시장에서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100여 년 전, 유럽 은행의 평균 자산 대비 자본 비율은 4:1이었다. 1970년대에는 이 비율이 10:1 혹은 12:1이어야 적당하다고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지난 20여 년 동안 이 비율은 날로 높아졌다. 미국 투자은행 업계를 보자. 채프먼 앤 커틀러 LLP의 로버트 로크너는 미국 투자은행들의 평균 레버리지 비율(총자산/자기자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 4대 투자은행의 평균 레버리지 비율은 각각 모건스탠리 21, 골드만삭스 24, 메릴린치 27, 베어스턴스 32였다. 2006년 이 비율은 훨씬 높아져 모건스탠리 33, 골드만삭스 26, 메릴린치 32, 베어스턴스 34였다. 불과 4년 동안 4대 투자은행의 평균 레버리지 비율은 26에서 31로 늘어났다. 투자은행뿐만 아니다. 1976년 GDP의 16%였던 미국 금융 부문의 부채 규모는 2007년 GDP의 116%로 급증했다.
 
자본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빌리는 행위가 위험하다는 건 상식이다. 한 은행의 레버리지 비율이 25:1이라면, 자산 가치가 약간만 떨어져도 자본이 모두 사라진다. 하지만 이때 위험가중자산을 자기자본으로 나누는 식의 방법을 사용하면 은행의 취약성을 감출 수 있다. 은행들은 장부 외 거래로 레버리지 비율을 조작하기도 한다. 레버리지 비율 조작은 영국 금융감독청(FSA)에서 2009년 3월 발표한 보고서 ‘터너 리뷰: 세계 은행 위기에 대한 규제 방법(Turner Review: A Regulatory Response to the Global Banking Crisis)’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번 금융위기로 모든 회계 속임수가 만천하에 공개됐다. 2008년 9월, 자산 기준 미국 최대은행 BOA의 레버리지 비율은 73.7:1에 달했다. 이는 BOA의 자본이 전체 자산의 1.4%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브리지워터 파이낸셜 그룹에 의하면, 장부 외 거래까지 포함하면 2008년 9월 기준 BOA의 레버리지 비율은 무려 134:1로 치솟는다. 투자은행도 아닌 상업은행 BOA의 레버리지 비율이 100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미국 금융업계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2004년 ‘바젤 라는 은행 규제 협약이 탄생했다. 하지만 금융위기 발생 전까지 이 협약은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지 않았다. 바젤 는 신용 위험, 운영 위험, 시장 위험을 구분한다. 역설적으로 이런 규범들은 ‘잔여 위험(residual risk·위험 요인을 통제하더라도 남아 있는 위험)’이라는 이름 아래 유동성 위험과 나머지 위험 요인을 하나로 묶어버린다. 하지만 은행의 차입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지면서 유동성 위험은 결코 잔여 위험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2007년 8월, 은행 간의 대출이 불가능해지자 엄청난 사태가 벌어졌다. 기업 어음(CP) 등 단기로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방법은 사라졌고, 증권화 움직임도 멈췄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담보로 한 자산 가치도 급락했다. 단 몇 주 만에 유동성 위기가 지급 불능 위기로 발전했고, 그 여파로 베어스턴스가 첫 번째 희생자가 됐다.
 
미국 정부가 취한 조치들은 신용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까, 아니면 경제 회복을 방해할까? FRB는 사실상 최저 대출 금리를 0으로 낮췄다. 그리고 재무부 및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FDIC와 함께 금융기관에 돈을 빌려주고, 자금을 제공했으며, 보증을 서줬다. 그 규모가 무려 10조 달러에 이른다. 또한 FRB는 무려 1조 달러를 투입, ‘자산담보부증권대출창구(Term Asset-Backed Securities Loan Facility·TALF)’를 통해 대출 증권화 과정을 부활시키고, 금융업체들의 주택저당증권 매입을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공공-민간 투자 프로그램을 통해 기존의 담보대출 및 주택저당증권을 거래하는 시장을 형성할 계획도 갖고 있다. 경매를 통해 자산을 매입할 사람과 그 가격이 정해지면, 민간 자본이 1달러 투입될 때마다 재무부가 세금 1달러를 투자하는 형식이다. 이와 더불어 민간 자본 1달러가 투입될 때마다 FDIC가 최대 12달러를 대출해준다.
 
이런 방안들과 비교하면, 총 7870억 달러를 투입하겠다는 오바마 행정부의 계획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특히 오바마 행정부는 3년에 걸쳐 이 금액을 지출하겠다는 계획이다. 일부 가구의 대출 이자 비용을 줄여주기 위해 연방정부가 발표한 750억 달러 규모의 주택 안정화 대책 역시 큰 도움을 주기는 어렵다.
 
정부의 지출 계획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건, 새로운 지출로 연방정부의 예산 적자는 상당히 늘어날 전망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평가해도 2009년 미 연방정부의 예산 적자는 GDP의 12%, 전체 정부 지출의 44%에 달한다. 2차 대전 이후 정부 지출과 세수 간의 격차가 이토록 크게 벌어졌던 적은 없다.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의 GDP가 2010년 1.5% 줄어든 뒤, 2011년에는 4.2%, 2012년에는 4.4%, 2013년에는 4.1% 늘어날 거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예측을 내놓았다. 이러한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행정부 역시 재정 적자에 관해서는 비관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 2009년 10조 달러(GDP의 89%) 수준인 미 연방정부의 빚이 2019년에는 23조 달러(GDP의 101%)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향후 미국 경제의 성장 속도가 더뎌지면 더 큰 문제가 생긴다. 향후 10년간 미국 경제가 평균 연간 1%의 성장률을 기록하면, 2019년 연방정부의 부채는 GDP의 146%로 치솟는다.
 
그렇다면 앞으로 발행할 수조 달러의 추가 채권을 제외하더라도, 미국 정부가 2009년 새롭게 발행할 1조7500억 달러의 채권을 과연 누가 매입할 건지 궁금해진다. 현재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채권 중 60%, 지난 5년간 발행된 신규 채권 중 75%가 외국인들 손에 있다. 하지만 세계 다른 나라의 경상흑자가 줄면서 미 재무부 채권에 대한 해외 수요 역시 줄어들고 있다. 도이체방크에 의하면, 중국은 올해 외환보유고를 1000억 달러 이상 늘리지 않을 계획이다. 이 금액은 지난해 중국이 추가로 확보한 외환보유고의 25%에도 미치지 못한다. 특히 이 금액 중 일부만이 달러 채권에 유입될 전망이다.
 
미국의 개인 저축률이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면 국내 투자자들이 적극적으로 채권 구입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가능성은 희박하다. 2005년 미국의 저축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설사 1980년대처럼 미국의 저축률이 GDP의 7%대를 기록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미국인들이 검소한 삶을 선택하면 소비 부양을 위해 힘쓰고 있는 정책 입안자들이 또 다른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의 3분의 2를 소비가 차지하기 때문에 내수 위축은 미국 경제에 좋지 않은 뉴스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FRB가 신규 발행 채권 중 상당 부분을 흡수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2009년 3월 FRB는 앞으로 6개월 동안 미 재무부가 발행하는 장기 채권 3000억 달러를 사들일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미 연방정부의 재정 정책 때문에 결국 FRB가 더 많은 달러를 찍어낼 것이라는 추측만 확인시켜줄 뿐이다.
 
미 행정부는 FRB의 ‘양적 완화’ 통화 정책과 재무부의 경기 부양책이 더해져 2010년부터 미국 경제가 살아날 것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가 하나로 묶여 있다. 요즘 각국 정부가 내놓는 다양한 통화 정책 및 경기 부양책은 성장으로 이어지기보다 채권 시장의 변동성과 환율 변동성만 높일 때가 많다. 민간 기업의 과도한 차입으로 생긴 전 세계 금융위기의 유일한 해결책이 더 많은 국채를 찍어내는 일인지도 의문이다.
 
2009년 3월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의 머빈 킹 총재는 영국 정부가 제안한 추가 경기 부양책을 거부했다. 이 사례에서 보듯,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과 정부의 재정 정책이 서로 부딪힐 가능성도 많다. 엄청난 재정 적자로 채권 가격이 떨어지고 장기 금리가 높아진다면, FRB도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채권의 구입을 늘릴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과도한 통화 팽창 정책을 사용하다 보면, 경기 회복은커녕 인플레이션과 금리 상승 가능성만 커진다.
 
달러화의 미래
수많은 정치인들이 이번 금융위기가 미국 권력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피어 스타인브뤼크 독일 재무장관은 “미국이 세계 금융 시스템을 쥐고 흔드는 슈퍼 파워의 지위를 잃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2009년 1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특정 국가에서 끊임없이 돈을 찍어내고 그 수익을 거둬들이면 세계 경제성장 시스템 자체가 심각하게 망가진다”고 얘기했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도 “이번 금융위기로 기존의 세계 금융 시스템 및 지배 구조의 문제점이 완전히 드러났다”고 선언했다.
 
현재 세계화의 두 축은 지난 10년간 공생관계를 맺으며 발전해온 중국과 미국의 역학관계다. 두 나라를 하나로 총칭해 ‘차이메리카(Chimerica)’라 부르기도 한다. 양국의 관계는 한동안 천생연분처럼 보였다. 중국은 수출, 미국은 수입을 맡아왔다. 동시에 중국은 저축, 미국은 소비를 담당했다. 중국이 무역 흑자를 내면, 미국이 그만큼 경상수지 적자를 떠안았다. 중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해 위안화 가치 상승을 막으면, 미국은 수십억 달러의 국채를 내다 팔았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는 경제를 매개로 맺어진 양국 간의 결합에 많은 의문을 남겼다. 2009년 3월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은 지금껏 미국에 많은 돈을 빌려줬다. 그 돈의 안정성이 우려된다. 좋은 신용 상태를 유지하고, 약속을 지키며, 중국 자산의 안정성을 보장해줄 것을 미국에 요청한다.” 그로부터 열흘 후,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의 저우샤오촨 총재는 달러가 아닌 IMF의 SDR을 세계 기축통화로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SDR은 개별 국가와 관련이 없으며, 장기적으로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다. 특정 국가의 통화를 쓸 때 생기는 문제를 없앨 수 있는 새로운 기축통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중국의 행복한 동행은 결국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필자는 ‘그렇다’고 결론 내리고 싶다. 대영제국 휘하에서 독보적 위상을 차지했던 영국 파운드화는 2차 대전 이후 영국의 과도한 부채와 더딘 성장 속도로 그 지위를 잃었다. 미국의 부채가 점점 늘어나고 장기 성장률은 떨어지는 현 상황에서, 달러 역시 파운드처럼 ‘한때의 기축통화’가 될 가능성이 있다. 달러가 기축통화의 자리에서 밀려나면 미국은 1960년대 이후 지금껏 누려온 특혜, 즉 외국인들에게서 자국 통화를 빌리는 특혜를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향후 4년 동안 중국이 평균 6%대 이상의 성장률을 유지하고 미국이 제로 성장에 가까운 수준을 면치 못하면, 중국의 경제 규모가 미국을 앞지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골드만삭스는 2001년 ‘2040년 중국의 GDP가 미국 GDP를 추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최근에는 그 시기가 2027년으로 앞당겨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놓았다. 중국의 대미 수출 의존도가 낮아지고 중국 정부가 위안화를 달러화에 연동시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한다면, 양국의 동행은 순식간에 끝난다. 이때 세계 무대의 힘의 균형이 바뀔 것이다. 1972년부터 이어온 미국과의 관계에 더 이상 목을 맬 필요가 없어지면, 중국은 미국과 무관한 다른 영역을 얼마든지 구축할 수 있다. 러시아도 회원국인 상하이 협력기구(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SCO) 조성, 자원이 풍부한 아프리카를 겨냥한 적극적인 움직임 등이 그 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번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달러의 기축통화 위치도 여전할 것이다.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지난 10년 동안 달러의 몰락을 예고했지만 달러의 건전성은 아직 꽤 괜찮다. 실질 무역 가중치 환율 지수가 25% 하락했던 2002년 2월부터 2008년 3월까지 달러는 세계 주요 통화를 대상으로 꾸준히 약세를 보였다. 하지만 금융위기의 진폭이 커지자 달러는 오히려 강세를 나타냈다.
 
물론 위기 상황에서 안전 자산을 선호하는 투자자들 때문에 달러 가치가 득을 본 건 사실이다. 금융위기 이전에 많은 투자자들, 특히 중국인들은 달러 가치가 떨어질 거라는 기대로 달러를 빌렸다.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금융기관들은 대출 연장을 거부했고, 돈을 빌린 사람들은 달러 가치가 상승하기 전에 달러를 빌려 빚을 갚으려 들었다. 그 결과 달러에 대한 수요가 오히려 늘어났다. 2008년 말 위안화와 달러화 페그제(고정 환율제)를 회복시키기로 한 중국 정부의 결정도 달러 가치 상승에 한몫했다.
 
이런 현상에서 보듯, 이번 금융위기는 결국 세계 금융 시스템에서 달러가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 다시 확인시켜줬다. 물론 올해가 끝나기 전에 다시 달러가 약세로 돌아설 수도 있다. 하지만 달러가 기축통화의 자리를 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달러를 대체할 만한 통화가 없기 때문이다. 몇 가지 장애물 때문에 기축통화를 SDR로 바꾸는 일도 쉽지 않다. 우선 실제 SDR을 사용하는 국제기구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결국 다른 나라 통화에 대한 달러 약세가 아니라 원자재 가격에 대한 달러 약세만 두드러질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금융위기로 미국의 경제성장률보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더욱 가파른 하락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중국의 경제 규모가 미국을 넘어서는 날이 한층 늦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IMF의 예측이 옳다면, 2009년 말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2007년보다 4.6%포인트 낮은 수준을 기록할 것이다. 같은 기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6.3%포인트 떨어질 전망이다. 즉 미국 경제의 장기 성장률이 1%대에 머물고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6%대를 기록하면, 2040년에도 중국의 경제 규모는 미국을 추월하지 못한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분명한 점은 이 위기가 ‘글로벌 위기’, 특히 ‘세계화의 위기’라는 사실이다. 19731974년 불황 이후 전 세계의 산업 생산이 이토록 급격하게 줄어든 적은 없었다. 현 추세가 이어진다면 전 세계 산업 생산의 감소 현상은 더욱 두드러질 전망이다. 전 세계 교역 규모는 불과 석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무려 25% 이상 줄어들었다. 대공황이 일어났던 1930년대 초에 견줄 만하다. 이 와중에 세계 경제가 몰락하면 미국보다 다른 나라들이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미국보다 다른 나라에 더욱 나쁜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 정부가 내놓은 엄청난 규모의 통화 및 재정 정책에도 불구하고,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의 자리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안전한 도피소라는 명성 덕에 미국은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보다 낮은 비용으로 더 많은 돈을 찍어내면서도 더 많은 적자를 떠안을 수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미국보다 다른 나라에 더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 자체는 불공평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살아갈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다.
 
위기에 처한 세상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더 이상 미국 경제와 함께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미국 소비자 신뢰지수가 하락하고 서유럽에 금융위기가 나타나자, 전 세계가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불황을 겪고 있다. IMF에 의하면, 올해 세계 경제의 산출량은 60년 만에 처음으로 하락세로 돌아서 지난해보다 0.5% 혹은 1% 정도 줄어들 전망이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미국보다 다른 나라에 더 큰 악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세계 각국의 GDP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올해 미국의 GDP는 전년 대비 2.6% 하락할 전망이다. 하지만 유로존의 GDP는 3.2%, 일본의 GDP는 무려 5.8% 하락할 수 있다. 심지어 중국의 경제성장률도 반 토막 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번 금융위기가 일본이나 아시아 신흥 공업국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까닭은 무엇일까? 지나치게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경제 구조가 그 답이다. 이들 국가들은 경제에서 차지하는 수출, 특히 대미 수출 비중이 매우 높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이들의 수출은 급격히 줄었다. 2008년 3월부터 2009년 2월까지 일본의 수출은 49%, 산업 생산은 31% 감소했다. 대만의 수출은 42%, GDP는 32% 줄었다. 한국의 수출과 GDP는 각각 33%, 21% 감소했다. 싱가포르의 수출과 GDP도 각각 21%, 17% 줄었다. 중국의 수출은 26% 감소했고, 수입 또한 비슷한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를 보면 중국의 GDP도 가파른 하락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은행의 과도한 레버리지 비율 또한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다. 2008년 미국 은행들의 평균 레버리지 비율은 12:1이었다. 반면 영국 은행의 평균 레버리지 비율은 24:1, 프랑스와 덴마크 은행은 28:1, 스위스 은행은 29:1, 독일 은행은 52:1을 기록했다.
 
유럽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유럽 은행들이 미국 은행들보다 세계에서 가장 취약한 지역, 즉 동아시아 및 동유럽에 지나치게 노출돼 있다는 점이다. 서유럽 은행들이 아시아 개발도상국 은행에 빌려준 돈은 해외 은행에 빌려준 전체 금액의 약 54%를 차지한다. 뿐만 아니라 1조8000억 달러의 서유럽 해외 대출 중 70%에 육박하는 금액이 동유럽에 들어가 있다. 오스트리아 은행들이 동유럽에 빌려준 돈은 오스트리아 GDP의 68%에 해당하는 3000억 달러다. 헝가리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의 통화 가치는 최근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등 일부 국가들의 채권에는 채무불이행 위험 프리미엄이 치솟고 있다. 현 상황은 1980년대 남미의 외채 위기와 비슷하다. 차이점은 당시에는 미국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동유럽 외채 위기는 유럽이 해결사로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동유럽의 경제 위기는 심각한 정치 위기로 번지고 있다. 이미 라트비아, 헝가리, 체코 정부가 무너졌다. 하지만 서유럽 리더들은 아직도 동유럽 사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독일인들은 국가 재정을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며, 동유럽을 구제하기 위해 세금을 지출할 의향이 전혀 없다. 물론 서유럽 국가들이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하나가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가능성은 낮지만 말이다.
 
유럽 각국 정상이 의견을 모으지 못하는 이유는 각자 처한 사정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금융위기로 일부 EU 회원국이 입은 피해는 다른 회원국들보다 훨씬 크다. 영국, 벨기에, 아일랜드의 은행 부문은 이번 금융위기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의 경상적자는 심각하지만 오스트리아, 독일, 네덜란드는 오히려 경상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유로존 전체가 단일 통화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EU 전체를 대변하며 경기 회복을 주도할 만한 단일 재무 부서는 없다. 각국의 재정 정책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 살펴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탈리아, 그리스, 벨기에는 GDP 대비 부채 비율이 80100%에 육박해 경기 부양 정책을 시행하기가 쉽지 않다. 유럽 각국의 채권 수익률 스프레드나 신용부도스와프(CDS) 스프레드의 차이도 크다.
 
이번 금융위기의 여러 특성 중 필자를 낙담케 하는 소식이 하나 있다. 금융위기가 미국의 경쟁국보다 동맹국에 더욱 큰 타격을 준다는 점이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나라들은 동아시아의 주요 수출국과 동유럽의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2009년 1월 푸틴 러시아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 군사적, 정치적 불안을 조장하고 지역 분쟁을 야기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날로 커져가는 사회 경제 문제로부터 돌릴 수 있다. 안타깝지만 앞으로 이런 시도가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잘 알려진 대로 러시아는 지난해 그루지야를 침공했다. 러시아는 최근 몇 차례의 공격적인 행보로 오바마 행정부를 시험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또한 자치공화국 압하스(아브하지아) 내에 흑해 기지를 세울 계획을 갖고 있으며, 벨로루시와도 방공 조약을 체결했다. 게다가 키르기스스탄 마나스 공군 기지에서 미국을 내쫓기 위해 키르기스스탄 정부에 돈을 주기도 했다. 러시아가 무력을 과시하는 상황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안전한 도피처, 미국
이번 금융위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이전보다 더욱 가난해지고 위험해질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 아프가니스탄, 콩고, 이스라엘 가자 지구, 이라크, 레바논, 파키스탄, 소말리아, 수단 등 이미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 지역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정착된 듯했던 국가에서도 사회 불안정 문제가 터져 나올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태국이 가장 위험하다. 부패 척결이라는 기치 아래 한동안 군사정권의 손아귀에 들어갔던 태국은 2007년 말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 하지만 시위대가 방콕 거리로 몰려나오고 ‘국민의 힘’ 당(People’s Power Party·PPP)의 활동이 금지되면서 태국은 1년 만에 다시 혼란에 빠졌다. 2009년 4월 정치 노선이 다른 태국인들은 빨간 옷과 노란 옷을 입고 거리로 몰려나와 군부와 대치했다. 태국의 수도 방콕은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다른 개도국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그루지야와 몰도바에서는 이미 문제가 발생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심각한 경기 침체로 인해 정치 분열이 나타나고 있다. 빅토르 유시첸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친(親)서방 인사다. 하지만 한때 그의 동지였으나 최근 정적으로 변신한 율리아 티모셴코 총리는 대표적인 친러시아 인사다. 우크라이나의 정치 분열은 주로 우크라이나 서쪽에 모여 사는 우크라이나인과 동쪽에 모여 사는 러시아인의 견해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이 와중에 푸틴 러시아 총리는 살기등등하게 “우크라이나인 중 모든 사기꾼과 뇌물 수뢰자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다. 러시아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우크라이나 남부의 크림 반도는 푸틴이 가장 탐내는 구소련 지역이다. 2009년 1월 서유럽 가스 공급 문제를 두고 벌어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분쟁으로 우크라이나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우크라이나의 안정을 해치기 위한 러시아의 첫 단계 도발일 수 있다.
 
세계의 불안정성이 높아질수록 안전한 도피처이자 전 세계의 경찰국가라는 미국의 매력은 커진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국제 문제에 미국이 지나치게 간섭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로 기존 분쟁 지역의 문제가 더욱 악화되고, 동유럽이나 아시아에서 새로운 문제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미국의 간섭을 더욱 적극적으로 원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2013년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가정해보자. 미국에 대한 전망은 당초 예상보다 덜 절망적이다. 금융위기로 미국보다 다른 나라들의 위험도가 높아지고, 향후 전망도 예측하기가 한층 어려워진 점은 분명하다. 이런 비대칭적인 세상에서 금융위기의 후폭풍이 대공황 때처럼 무시무시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2가지 시나리오 중 긍정적인 시나리오가 전개된다면 어떨까. 2013년에는 20072009년 불황의 흔적이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물론 고통스러웠던 기억 자체를 지울 수는 없지만, 결국 몰락의 시대는 끝났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의 양적 완화 통화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우려도 틀렸음이 드러날 것이다.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도 모두 나타나지 않았다.
 
오바마 행정부는 오랜 고민 끝에 BOA와 씨티그룹이 법정 관리 절차를 밟도록 조치했다. 그 결정 덕에 두 은행의 대차대조표 문제는 잘 해결됐다. 정부는 현실적인 가격에 부실 자산을 매각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굴복한 채권 소유주들은 거대 금융기관의 해체 및 민영화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한 금융기관의 주식을 받아들였다.
 
놀라우리만큼 많은 은행들이 새롭게 시장에 등장해 최저 레버리지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고객과의 관계에 최대의 관심을 쏟는 등 이전의 은행과는 전혀 다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 로스차일드, 라자드 등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금융기관들의 화려한 부활은 과거의 금융영업 방식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준다. 금융위기를 무사히 넘긴 수많은 헤지펀드들은 몸집을 합쳐 과거의 투자은행과 매우 흡사한 기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월가에는 브리지워터, 폴슨, 르네상스, 쇼 등의 이름을 딴 투자은행들이 자리하고 있다.
 
2009년 티모시 가이스너 재무장관이 제안한 규제 방안은 무척 성공적이었다. 그는 경영자 보상에만 관심을 쏟지 않고 은행 측에 새로운 규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가 제안한 규칙은 ‘금융기관의 레버리지 비율은 20:1을 넘을 수 없으며, 상황이 좋을 때는 레버리지 비율이 15:1에 근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2009년 정부 예산안의 전망처럼, 2013년 미 연방정부의 총 부채는 GDP의 98% 수준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지난 4년간 제법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인 덕에 미국이 남미와 같은 외채 위기를 겪을 가능성은 낮아졌다. 이에 따라 미국은 자국 국채를 매입하라고 해외 투자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미국의 최고 소득세율은 35%이며, 2009년 10월 최저점을 기록한 S&P 지수는 서서히 상승세로 돌아서 976까지 반등했다. 달러 가치는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위안-달러 환율도 6.8위안 수준이다.
 
아시아의 대미 수출이 회복세에 접어들면서 달러 대신 SDR을 세계 기축통화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2009년 2월 루오 핑 중국 은행감독관리위원회(CBRC) 국장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채권 이외에 어떤 자산을 사야 할까? 금? 일본 국채나 영국 국채를 갖고 싶어 할 사람은 없다. 미 재무부 채권은 안전한 도피처다. 미 재무부 채권이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세계의 장기 디플레이션이 한참 진행 중이던 1886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독일 총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신은 바보, 주정뱅이, 미국을 위해 특별한 섭리를 마련해뒀다.” 운이 좋다면 아직 그 말은 사실이다.
 
번역 김현정 jamkurogi@hotmail.com
 
닐 퍼거슨(nferguson@hbs.edu)은 하버드대에서 역사를,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가르치고 있다. 8권의 책을 집필했으며, 최신작으로 <돈의 부상, 세계 금융의 역사(The Ascent of Money: A Financial History of the World)>(펭귄출판사, 2008)가 있다.
 
편집자주 이 글은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7월 호에 실린 닐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의 글 ‘The Descent of Finance’를 전문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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