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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가 돈이다

심정희 | 37호 (2009년 7월 Issue 2)
‘○○를 착용한 스타들’. 필자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받는 e메일 제목이다.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일지 대충 짐작이 간다. 유명 연예인이 자사의 의상이나 장신구를 착용했음을 알리는 브랜드 홍보 담당자들의 뉴스 메일이다.
 
패션 산업에서 차지하는 스타의 위력은 이제 상상을 초월한다. 니콜 키드먼이 착용한 수십억 원짜리 목걸이는 다음 날 바로 팔려 나간다. 해당 브랜드의 바이어가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비싼 물건이 통할까?’라고 반신반의했던 의상조차, 김남주가 드라마에 입고 나왔다는 이유로 순식간에 다 팔렸다. 이제 유행을 선도하는 건 패션쇼가 아니라 TV나 인터넷에 뜬 파파라치의 사진이다.
 
대중의 제품 구매에 스타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패션 산업은 과거 꽤 오랫동안 스타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특히 패션 산업의 꽃으로 평가받는 고가의 명품 브랜드나, 트렌드를 선도한다고 자부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에게 스타는 관심 밖의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패션 산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비자는 콧대 높은 상류층이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거나 음반을 발매해 부자가 된 스타들이 진정한 상류층으로 보일 리 만무했다.
 
때문에 상류층을 타깃으로 한 패션 브랜드들도 스타를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다. 패션 브랜드들은 할리우드 스타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는 대신, 우아한 분위기의 전문 모델을 찾아 광고를 찍었다. 패션 잡지들은 스타들의 스타일을 드러내놓고 다루는 잡지들을 수준 이하로 평가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패션계의 ‘스타, 소 닭 보듯 하기’ 시대는 막을 내린다. 실력 있는 디자이너이자 마케팅의 귀재인 조르지오 아르마니 때문이다. 아르마니는 몇 편의 영화 의상을 제작하며 할리우드가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이 실로 막강함을 깨달았다. 이에 할리우드 스타야말로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광고판’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주요 영화제나 시상식 때 입을 옷 때문에 고민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는 ‘협찬’ 시스템을 고안해낸다. 과거 지방시와 오드리 헵번처럼 개인적 친분 때문에 디자이너가 유명 배우의 옷을 만들어준 적은 있다. 하지만 서로의 사업적 이해관계 때문에 스타에게 의상을 협찬한 디자이너는 아르마니가 최초였다.
 
기념비적 사건은 198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일어났다. 그해 아카데미는 아르마니의 패션쇼나 다름없었다. 미셸 파이퍼, 덴젤 워싱턴 등 수많은 스타들이 아르마니 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으로 시상식장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르마니는 미국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인식시켰다. 다른 디자이너들 또한 자신의 드레스를 입히기 위해 여배우들에게 ‘협찬 제안’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패션계의 협찬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이 현상의 배경에는 고급 패션을 향유하는 계층의 폭이 넓어졌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1980년대의 물질적 풍요 덕분에 일반 대중들도 디자이너 의류와 최고급 명품을 향유할 수 있는 경제력이 생겼다. 디자이너들 또한 소수의 상류층이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알릴 필요성을 자각했다.
 
이제 유명 스타를 둘러싼 패션 브랜드 간의 경쟁은 패션쇼에 어떤 스타가 참석했느냐, 아카데미 시장식장에 참석한 유명 여배우가 어느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입었느냐로 판가름 날 정도다. 스타들과의 돈독한 관계가, 창의적인 디자인만큼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시대가 도래했다. 

레드 카펫 위의 스타들을 놓고 펼쳐지던 유명 브랜드 간의 경쟁은 스타들의 일상생활로 확산됐다. 인터넷의 발달 덕에 소비자들은 유명 배우들이 집 앞 슈퍼마켓에 갈 때 무엇을 입는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어차피 일반 대중에게는 스타들이 패션쇼 및 드라마 속에서 입는 의상은 그림의 떡이다. 오히려 실생활에서 입는 스타들의 평상복에 더욱 관심이 가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에 스타가 착용한 일상복이나 운동화 등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제 영화제가 열리기 몇 주 전부터 스타의 의상 담당자에게 협찬 제안 전화를 거는 일은 유명 브랜드의 필수 과제로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제 당일까지 입을 옷을 결정하지 못한 스타들을 위해 즉석 협찬용 쇼룸을 만들고,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스타에게 핸드백, 구두, 의상으로 꽉꽉 채워진 선물 보따리를 보낸다. 유명 배우들은 이 선물 보따리를 따로 관리하고, 그중에서 쓸 만한 물건만 골라주는 스타일리스트를 따로 고용할 정도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스타가 곧 돈인 시대, 팔기 위해서는 스타에게 의상을 입히는 게 최선인 시대가 도래한 지 오래이니 말이다.
 
패션 칼럼니스트인 필자는 남성 패션지 ‘에스콰이어’와 여성 패션지 ‘W Korea’ 패션 에디터를 거쳐 현재 ‘에스콰이어’ 패션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10아시아’ ‘한겨레21’ 등 다양한 매체에 패션 관련 글을 기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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