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제과 직원들은 마케팅팀 구자룡 차장을 ‘빼빼로’라고 부른다. 11월 11일을 ‘빼빼로 데이’로 만든 주역이기 때문이다. 상업주의라는 비판도 많았지만, 마케팅 면에서 이 아이디어는 ‘대박’을 터뜨렸다. 구 차장은 2002년 빼빼로의 브랜드 담당자가 되자마자 이 아이디어를 냈다. 그 해 빼빼로 판매량은 전년보다 100억 원이나 늘어난 450억 원을 기록했다. 제품 수명 주기가 쇠퇴기에 진입한 상품 중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성공이었다. 그는 2004년 이후 껌 분야를 맡아 자일리톨의 성공 신화를 이어갔다.
실적만 보면 구자룡 차장은 마케팅 분야에서만 수십 년간 일해온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2000년에 마케팅 업무를 처음 시작했다. 산업공학을 전공했고, 1992년 롯데제과에 입사한 후에는 8년간 품질관리팀에서만 일했다.
‘마케팅 달인’의 유전자를 타고난 것일까?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구 차장은 ‘농부론’을 폈다. 마케팅은 ‘농사’, 자신은 ‘농부’라는 설명이다. 씨는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고 부지런히 관리해줘야만 열매를 얻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신제품을 만들 수 있지만, 마케터가 제대로 관리해줘야 성공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남들은 매출 정체 상태라며 사실상 빼빼로 마케팅을 포기했지만,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어 관리해줬더니 큰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다며 농부론을 설파하는 그의 성공 비결을 분석했다.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은 다르다
구 차장은 마케팅에 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다. 처음 브랜드 매니저가 됐을 때는 STP와 같은 마케팅 기본 용어조차 잘 몰랐다. STP는 고객들을 소득, 연령대, 구매 액수 등에 따라 세분화하고(Segmentation), 표적 시장을 선택하며(Targeting), 업계 내 제품 위치를 설정하는(Positioning) 방법론이다. 그는 ‘고객의 잠재된 욕구를 파악하라’ 같은 마케팅의 기본 명제에도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심리학 책을 읽다가 프로이트의 이론을 보며 무릎을 쳤다. “프로이트가 빙산의 예를 들어 인간의 자아와 초자아를 설명하는데, 그제야 잠재된 욕구가 무슨 말인지 알겠더군요. 우리가 보는 빙산은 실제 빙산의 10%에 불과하고, 나머지 90%는 수면 아래에 잠겨 있습니다. 이 10%가 자아, 나머지 90%가 초자아입니다. 마찬가지로 소비자가 ‘원하는 것(want)’은 눈에 보이는 10%, ‘필요로 하는 것(need)’은 나머지 90%입니다. 때문에 저는 설문조사를 맹신하지 않습니다. 물론 설문조사 결과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설문조사에 나타난 행간의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자동차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다고 생각해보죠. 고객들이 실제로 살 수 있는 차는 아반떼지만, 원하는 차를 물어보면 모두 벤츠나 BMW를 말할 겁니다. 이것이 바로 want와 need의 차이입니다. 마케터는 고객이 말로 표현하는 10%가 아니라 표현하지 않는 나머지 90%를 찾아내 제품에 반영해야 합니다.”
빼빼로 데이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이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빼빼로 브랜드 매니저로 일하던 초짜 마케터 시절, 그는 지방의 몇몇 여학교에서 날씬해지자는 의미로 11월 11일 빼빼로를 선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만일 구 차장이 겉으로 나타난 현상에만 주목했다면 ‘빼빼로 데이’가 아니라 ‘다이어트 데이’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다이어트지만 ‘필요로 하는 것’은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에는 연인끼리만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애인이 없는 사람은 참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죠. 선물 가격도 상당히 비싸고요. 친구들끼리 날씬해지라고 빼빼로를 선물하는 행위의 이면에는 다이어트보다는 우정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 같이 날씬해지자’라는 식의 직접적인 멘트를 삼가고 우정을 콘셉트로 한 감성 마케팅을 펼쳤더니 효과가 대단했습니다. 토종 이벤트라는 점, 가격 부담이 없다는 점도 많이 부각시켰구요. 10대들의 감성에 맞춰 주력 광고 매체도 온라인으로 결정했습니다. 2002, 2003년만 해도 온라인 광고가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어요. 경영진의 우려도 적지 않았죠. 하지만 감성 마케팅 대상인 10∼20대 계층에 접근하려면 온라인 광고가 훨씬 효과적이라 생각하고 밀어붙였습니다.
빼빼로는 무려 26년 전인 1983년에 탄생한 제품입니다. 성숙기를 넘어선 제품이라도 고객의 숨겨진 욕구를 파악하면 얼마든지 신제품 못지않은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큰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