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8일 한나라당이 단독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 상정한 이후 난장판이 된 국회 모습이 여러 차례 보도됐다. 필자는 금융위기 난국을 헤쳐나기도 바쁜 우리가 처한 서글픈 현실에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국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확실한 것은 조만간 한·미 FTA 비준이 완료될 것이며, 이는 우리의 기업 환경을 전격적으로 바꾸는 촉매제로 작용하리라는 점이다.
많은 한국 기업은 한국이 지금까지 리히텐슈타인·아이슬란드·미얀마 등과 FTA를 체결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FTA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우리 기업도 이제는 한·미 FTA가 야기하는 기업 환경의 전격적인 변화에 대해 인지하고 대처해야 한다. 한·미 FTA는 비단 한미간의 교역증가 효과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과의 FTA 타결 여부를 가름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FTA 현황과 한국 기업의 현실
국제 통상체제의 틀을 마련하는 세계무역기구(WTO)가 1995년에 설립된 이래 상품뿐 아니라 서비스 무역에도 괄목할 만한 발전이 이뤄졌다. 그러나 WTO 체제 아래에서 무역자유화를 더욱 진전시키기 위해 발족된 도하 협상 합의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오히려 FTA 체결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현재까지 발효된 FTA 수는 약 200개다. 특히 WTO가 설립된 1990년대 중반부터 FTA체결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FTA가 발효되면 회원국 간 자유무역이 이뤄지고 무역이 증가하므로 기업은 쉽게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비회원국 입장에서는 회원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사업 환경에 처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최근까지도 FTA에 관한 한 WTO 체제에서 가장 낙후된 국가 축에 들었다. 때문에 우리가 체결한 FTA로 인한 경제적 혜택보다는 다른 국가들 간의 FTA 타결에 따른 피해를 주로 보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우리와 교역구조가 유사한 일본이 멕시코와 체결한 FTA는 우리 기업에 상당히 많은 피해를 줬다.
멕시코와 일본의 FTA는 2005년 4월 1일자로 발효됐다. 첫 해에 멕시코 정부는 닛산·혼다·도요타 등 일본산 자동차 5만2000대에 대해 무관세 수출을 허용했다. 2011년부터는 멕시코 시장에서 일본산 자동차에 대한 전면적인 무관세 교역도 이뤄진다.
멕시코는 이미 2005년 1월 1일부터 멕시코 현지에서 생산되고 있는 4개 일본 업체의 완성차 생산대수의 10%에 대해 무관세 수출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약 8만2000대의 일본산 자동차가 추가로 무관세 수출 효과를 누렸다. 멕시코는 이미 미국·유럽연합(EU)과도 FTA를 맺고 자동차 관세를 10% 수준 이하로 인하했다.
반면에 멕시코 정부는 한국을 포함한 비회원국에는 도리어 관세를 50% 인상했다. 이에 따라 2004년 9.4% 증가한 한국의 대 멕시코 승용차 수출은 2005년 0.9% 증가로 증가율이 대폭 감소했다. 같은 기간 일본의 대 멕시코 수출은 14.8%에서 60.1%로 급증했다. 물론 당시의 원화 절상이라는 요인을 무시할 수 없지만 경쟁국의 FTA 체결로 인한 한국 승용차 산업의 타격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 주는 예다.
FTA 때문에 한국 기업들이 멕시코 시장에서 볼피해는 이미 FTA 타결 전부터 가시화된 상태였다. 멕시코 정부는 2004년 1월 1일부터 FTA 비회원국들로부터의 타이어 수입 관세를 23%에서 90%로 인상했다. 이로 인해 2003년 12월까지 멕시코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2위를 차지하던 한국산 타이어의 수출은 사실상 중단됐다.
2003년 12월 21일 금호타이어를 선적하고 부산항을 출발한 한진해운 소속 선박은 싣고 간 컨테이너를 통관시키지도 못하고 2004년 1월 12일 국내로 회항했다. 그 일주일 전 한국타이어도 12월에 수출한 타이어를 국내로 반송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서 한국산 타이어의 멕시코 시장 점유율은 2위에서 11위로 추락했다.
FTA 환경의 변화
한국 정부는 이 같은 문제를 타개하고 차세대 성장 동력이 될 첨단 산업의 주력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한·미 FTA를 준비해 왔다. 현재 한·미 FTA의 비준 현안을 두고 국회에서 한바탕 충돌이 벌어졌지만 경제적 측면에서는 하루빨리 비준이 이뤄져야 한다. 미국으로의 수출 증가 외에도 다양한 파급효과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EU FTA를 포함한 후속 FTA를 순조롭게 체결하기 위해서도 한·미 FTA 타결이 시급하다.
무역에 의한 단기적 실익만을 따진다면 12개 신규 가입국을 포함하여 27개 회원국을 가진 EU와의 FTA가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다. 한·미 FTA의 비준이 늦어지면서 2008년 말까지 협상 타결을 장담한 EU 역시 우리와의 FTA 협상을 지연시키고 있다.
한·미 FTA, 한·EU FTA가 체결되면 한국은 더욱 유리한 입장에서 일본과의 FTA 협상을 추진할 수 있고, 최종적으로는 중국과의 FTA도 가능해진다. 이 밖에 현재 추진하고 있는 인도, 캐나다, 멕시코, 호주, 뉴질랜드, 걸프협력기구(GCC), 남미공동시장(MERCOSUR) 등 다른 많은 국가와의 FTA에도 한층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