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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부캐와 N잡러의 시대

김현진 | 307호 (2020년 10월 Issue 2)
“회사에 출근하면서 영혼은 집에 두고 간다.”

사장님들이 들으면 가슴 쿵 내려앉을 소리지만 실제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직장인들이 개인 SNS에, 또래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전하는 ‘진심’입니다. 회사와 나를 독립적인 관계로 보고 근무시간인 9 to 6에만 회사원의 ‘가면’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외국에서도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진 ‘N잡러’, 즉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진 집단을 ‘슬래셔(slasher)’라 부르며 이들이 이끄는 사회 트렌드와 직업 구조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단어를 나열하기 위해 쓰는 슬래시(/)에서 본뜬 단어인데 N잡러들이 자기소개서를 쓸 때 ‘의사/ 프로그램 디렉터/ 패션 유튜버’와 같은 식으로 슬래시로 여러 직업을 나열하는 모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마르시 앨보허가 쓴, 『한 사람, 다중 직업(One Person, Multiple Careers)』에 처음 등장한 이 용어 역시 다원화된 삶의 추구 현상을 보여줍니다.

주 52시간 근무제와 재택근무 등 업무 환경의 변화로 인한 개인적 시간 확대, 저성장 시대 ‘평생직장’ 개념의 실종, 인간 수명 증가 등 멀티 페르소나 트렌드가 부상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칩니다. 멀티 페르소나가 생소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직장인 중 77.6%가 ‘직장에서 회사에 맞는 가면을 쓰고 일한다’고 답할 정도로 이미 ‘회사 안’과 ‘회사 밖’ 자아를 분리하는 동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회사 내에는 때로는 사규와 개인적 목표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자기만의 ‘부캐 컴퍼니’를 운영하는 ‘소사장님’이 적지 않습니다. 조직 논리에 익숙한 X세대 관리자들은 부하 직원들의 이런 ‘페르소나 놀이’에 익숙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파렴치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꼰대’로 박제되니 속으로만 애가 탈 뿐입니다.

배꼽티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를 외쳤던 X세대에게도 개성은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20대였던 청년 시절, 당시 인기 높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같은 사람이 복수 계정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아이덴티티를 갖는 것이 매너 없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그만큼 하나의 인생에서 각기 다른 가면을 쓰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세대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조직 내에서도 ‘개인의 성장’을 더 중시하는 MZ세대의 특성을 차치하고라도 장기적으로 개인과 조직은 ‘고용’이 아닌 ‘동맹’ 관계가 될 것이라는 전망, 변화무쌍한 시장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 유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떠올릴 때 X세대나 베이비붐세대 역시 바뀌는 세태의 관찰자로만 남아선 안 됩니다. 사람처럼 생애주기를 논하는 브랜드 역시 ‘올드함’을 벗고 브랜드 회춘(brand rejuvenation)을 경험하기 위해 자신들의 멀티 페르소나를 뽐내는 게 최근 트렌드입니다.

직장인들에 회사 밖 ‘부캐’에 좀 더 애정을 쏟는 것은 회사 내 ‘주 캐’가 수동적이고, 경직된 모습이기에 진정한 ‘나’라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회사 안에서 본인이 애정을 쏟을 만한 ‘부캐’를 키울 수 있게 독려하고 이를 평가에까지 반영하는 등 그저 부캐를 자애롭게 용인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회사 안 자산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신선합니다.

직장인 개개인로서는 커리어란 긴 여정 속에서 주 캐와 부캐의 무게중심 맞추기에도 좀 더 신중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재무분석사/지식콘텐츠 개발자/칼럼니스트/1인 미디어 운영자/크로스핏 트레이너인 수잔 쾅은 ‘슬래셔’의 조건으로 “자제력이 매우 강하고, 오랜 시간 자기 투자와 단련을 거쳤으며, 핵심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직 재능이 무르익지 않았다면 좀 더 경험을 쌓고, 어떤 캐릭터가 되든 공동체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합니다.

바야흐로 부캐가 권장되는 사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고(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나란 놈을 고작 말 몇 개로 답할 수 있었다면 신께서 그 수많은 아름다움을 다 만드시진 않았을(BTS의 ‘Persona’)” 멀티 페르소나의 힘에서 개인과 조직 모두 한 단계 더 진화할 기회를 찾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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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편집장•경영학박사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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