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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묻고 신하가 답하다: 중종과 김의정

“조정의 갈등은 公道가 바로서지 못한 탓”

김준태 | 281호 (2019년 9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진영 간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는 양쪽이 공정하고 투명한 조직문화를 토대로 소통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 김의정은 사화로 혼란에 빠진 조정을 걱정하는 중종의 책문에 ‘공도’를 바로 세우라고 조언한다. 시시비비를 따지기에 앞서 법과 원칙을 지키면서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소통하는 문화가 구축돼 있는지 돌아보라는 의미다. 의사결정과 관련해서는 ‘충후’와 ‘정직’의 조화를 강조했다. 어진 마음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되 개별 현안에서는 맺고 끊음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좋고 싫음과 옳고 그름[好惡是非]. 심리나 윤리의 영역일 것 같지만 공동체 경영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가치 판단의 기준이 서로 다른 데서 생겨나는 갈등과 대립을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다. 1526년(중종 21년) 별시(別試) 1 에서도 이 문제가 다뤄졌다.



좋고 싫음과 옳고 그름이 합당해야 조정이 바르게 되고 정치와 교화가 한결같아진다. 지금은 좋고 싫음이 경도되고 옳고 그름이 어긋나 어그러져 있다. … 옳고 그름을 말할 때도 그저 자기 생각만 따를 뿐 공론(公論)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를 어찌해야 하겠는가?



중종 21년의 조선은 혼란스러웠다. 7년 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를 비롯한 선비들이 큰 참화를 입은 이래, 조정에는 강직한 목소리를 내는 신하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가뭄과 병충해가 수년째 계속됐고 1526년 들어서는 전국 각지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나라는 위태로운데 신하들은 갈라져 이익을 탐하고 서로를 비난하기에 여념이 없던 시기, 중종이 출제한 책문(策問) 속에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고민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러한 중종의 질문에 대해 조선 중기의 학자 김의정(金義貞, 1495∼1547)이 쓴 답안지를 살펴보자. 그는 “조정에서 공도(公道)가 행해지면 선과 악이 변별돼 상벌을 순리대로 시행할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 공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공론(公論)이 막혀 사람들의 생각이 소통되지 못하니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을 판단하기가 어지러워집니다” 2 라고 답했다.

여기서 공도(公道)란 유교 경전인 『서경(書經)』과 『주역전의(周易傳義)』 등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공정한 도리·방법·원칙 등을 뜻한다. 유학자들은 정치가 공도에 입각해 펼쳐져야 나라와 백성에게도 보탬이 될 수 있는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의정도 마찬가지인데, 즉 공도가 전제돼야 비로소 올바로 판단하고 적절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무릇 좋고 싫음, 옳고 그름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각자의 생활 세계가 다르고 신념이나 가치관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옳고 그름은 그 자체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입각해 ‘옳다고 여겨지는 것’ ‘그르다고 여겨지는 것’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지금이 공격적인 경영을 해야 할 때인지, 보수적인 경영을 해야 할 때인지를 판단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대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차원이라면 내가 고심해서 결정하고 책임을 지면 그만이지만 공동체 차원에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조율하는 합의의 과정이 필요하다. 김의정이 말하는 ‘공도’란 올바른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공정하고 투명하며 사심이 없는 상태다. 조정이 그렇게 운영돼야 조정에 참여하는 신하들, 정책 담당자들도 각자의 사사로운 욕심이나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무엇이 좋은 선택인지, 어떤 것이 올바른 결정인지를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의정이 보기에 당시 조정은 그렇지 못했다. “지금 우리 조정은 하나의 제도를 만들고 하나의 일을 시행할 때마다 대신과 측근 신하들을 모아 잡다하게 논의를 채집하는데, 임금께 주청하는 대책이 초나라와 월나라의 사이와 같고 3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넘어가도록 결론을 내질 못합니다. 또한 각자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느라 상대의 의견에 대해서는 꺼리고 싫어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에 따른 갈등이 표출돼도 그저 세월만 흘려보내고 서로 양보하는 제제(濟濟) 4 의 기풍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모두 자기가 가장 잘났다 하면서도 내가 무엇이 더 나은지, 상대는 무엇이 더 못한지를 가려내지 않으니 좋고 싫어함이 서로 극단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공도(公道)의 부재에 기인한다는 것이 김의정의 판단이다. 최고 리더인 임금이 공도를 확립하지 못했고 조정에서 공도를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에 공도가 펼쳐져 있다면 구성원들 또한 공정하게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다. 공도에 따라 정의와 원칙이 구현되고 의사결정이 투명하게 이뤄진다면 사람들은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좋고 싫음, 옳고 그름을 판별할 것이다. 누구나 “나라를 걱정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혹시라도 나라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백성의 뜻에 배치되지는 않는지를 살펴”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비록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다른 사람이 그르다고 하고, 내가 좋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싫다고 하더라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위한 일을 해나갈 수 있게 된다.” 상대방의 진심과 순수성을 믿고 상대방 또한 같은 대의를 추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방법론에 있어서의 차이쯤은 충분히 좁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국가경영에서건 기업경영에서건 의견의 대립이나 충돌은 없을 수 없다. 상황을 어떻게 진단했느냐에 따라, 어떤 가치를 보다 중시하느냐에 따라 좋고 싫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에 차이가 생겨난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 여야의 대립, 고용자와 노동자의 대립, 사업부서와 지원부서의 대립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대립 자체는 각자가 처해 있는 위치상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양보하며 차이를 좁혀야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또 갈등으로 인한 불필요한 힘의 낭비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과 원칙이 지켜지고 공동체가 바르고 공정하게 운영되며,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생각이 막힘없이 소통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문화가 마련돼야 한다. 김의정이 말한 공도(公道)의 뜻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중종의 질문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 가지가 더 있다. 정책이나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좋고 싫은 점이 분석되고, 옳고 그른 점이 가려져 방향이 결정됐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진행하느냐가 중요하다. 중종은 일을 성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속도를 찾는 것, 그 방법에 대해서도 물었다.



기존 관행을 지키느라 머뭇거리고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저절로 안정되기만을 바란다면 종국엔 공공의 의(義)를 해치고 정치를 어지럽히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기대하며 성급하게 폐단을 교정하려 들면 뭇 사람들의 정서에 위배돼 바로잡으려고 할수록 더욱 부딪히게 될 것이다. 교정하되 부딪히지 않고 자연스레 하나로 귀결되게 할 수 있겠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정해졌는데도 변화에 따른 소란이 두려워 머뭇거리고, 안정이 중요하다며 기존의 방식과 매뉴얼을 답습하다 보면 ‘좋고 싫음, 옳고 그름’에 대한 공동체의 결정도 혼란에 빠진다. 현상 유지를 우선하느라 기존의 결정을 왜곡할 수 있다. 잘못됐다고 판단한 것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용인해버리는 상황 같은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사람들의 정서, 현실 여건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급박하게 바꾸려 들면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 시간을 두고 빈틈없이 준비하며 단계적으로 이행해야 겨우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을 당장 개혁해야 한다며 속도전을 벌이다 보면 일이 어그러지기 십상이다. 아마 중종도 절실하게 경험했을 것이다. 중종은 위훈 삭제, 현량과 설치 등 조광조가 급진적으로 추진한 개혁이 정국의 안정을 해친다며 조광조 세력을 숙청한 바 있다. 5 이후 조정은 과거로 퇴행했는데 전자는 중종 자신이 저지른 과오이고, 후자는 조광조가 범한 실책이라 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현실과 이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가운데 공동체의 상황에 맞는 최적의 속도를 찾는 것이다. 다만 누구는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겠는가? 말은 쉽지만 행동에 옮기기엔 어려운 것이다. 이에 김의정은 조금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그는 ‘충후(忠厚)’와 ‘정직(正直)’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대의 유학자가 말하길 정치를 함에 있어서 정직하기만 하고 충후하지 못하면 점차 각박하게 되고, 충후하기만 하고 정직하지 못하면 유약함으로 흐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충후’와 ‘정직’은 모두 마음가짐에 해당하는 단어다. 충후가 정성스럽고 온화하며 후덕함을 뜻한다면 정직은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게 임하는 것을 말한다. 전자가 포용과 화합, 양보와 소통을 이끌어낸다면 후자는 일을 분명하고도 빈틈없이 처리할 수 있게 준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들은 본래의 취지를 망각하고 겉치레에만 신경 쓴다. 두 개념을 조화시키지 못하고 어느 한 쪽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갈등을 해소하고 안정을 추구한다며 현실에 타협하는 일이 발생한다. 성급하게 일을 추진하다가 실패하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다가 사람들의 저항을 받게 된다. 김의정이 “충후함으로써 근본을 기르고 정직함으로써 말단을 다스려야 한다”고 제안한 것은 그래서다. 어진 마음으로 포용하는 덕을 중심에 두되 구체적인 일들에서는 맺고 끊음을 분명하게 하자는 것이다.



경영에서 모든 행위는 좋고 싫음, 옳고 그름의 판단 위에서 이뤄진다. 지금 상황에서 적합한 선택과 필요한 조치는 무엇인가, 이를 위해 공동체의 인적·물적 역량을 어떻게 배치하고 운용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하며, 이는 우리 공동체에 좋은 것, 옳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속에서 답을 찾게 된다. 문제는 구성원마다 생각하는 답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활발한 토론과 의견 교환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고, 각 의견의 장점을 수용하고 보완함으로써 선택한 답을 강화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노력이 막힘없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투명하고 공정한 조직문화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 바로 김의정이 강조하는 메시지다. 올바른 의사결정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 다른 관점과 반대 의견에 대한 존중이 체질화돼야 기꺼이 차이를 좁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렇게 결정된 공동체의 판단을 충후한 마음과 정직한 태도로 추진해나가면 ‘바꾸어나가되 부딪히지 않고’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소개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대학 연구교수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 『논어와 조선왕조실록』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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