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2. 세종의 독특한 인재 경영

반대파 중용으로 시너지 효과
세대교체 빠르지 못한 건 한계

254호 (2018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세종은 흔히 ‘성군’으로 불릴 정도로 훌륭한 임금이었지만 어떤 독특함이나 특출한 능력 덕분에 위대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로는 쉬우나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들을 실천했기에 성군이 됐다. 그 중심에 바로 ‘인재 경영’이 있다. 세종은 과거 시험에서는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는 선비를 뽑았고, ‘시험에 강한 인재’만 들어오는 것을 염려해 널리 인재를 추천받는 ‘천거’를 적극 활용했다. 그렇게 모은 인재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도록 장려했고, 아예 ‘악마의 변호인’과 같은 반대자들을 대거 중용했다. 집현전을 통해 새로운 인재를 육성하는 것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인재 경영을 한 세종이었지만 인재의 ‘세대교체’는 제대로 이루지 못한 점, 아끼는 인재의 개인적 잘못에 대해 과하게 관대했던 점은 문제로 꼽을 수 있다. 

무릇 ‘경영(經營)’1 을 행하는 모든 조직은 인재를 중시한다. 리더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혼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전문성을 가지고 직접 경영을 담당하거나 경영을 도울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하다. ‘어떤 수준’의 인재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 그 인재가 ‘얼마만큼’ 능력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조직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러한 인식은 전통사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특히 유학(儒學)에서는 인재를 국가경영의 핵심요소로 상정해왔다. “정치는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으니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지 않았는데 정치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2 라는 공자의 말과 “어진 이를 보고도 등용하지 못하거나 제때 빨리 등용하지 못하는 것은 태만함이요, 착하지 않은 자를 보고도 물리치지 못하고 물리치더라도 멀리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대학(大學)』의 가르침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아는 것은 쉬워도 실천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사가 1000여 건에 이른다. 하지만 인재 경영은 항상 어려운 과제였다. 인재가 발견되지 못한 채 사장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인재가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사례도 많다. 심지어 정쟁에 휩싸여 죽음을 맞이한 인재도 적지 않았다. “자고로 묻혀 지낸 사람이 한둘이었겠소?”라는 『허생전(許生傳)』의 유명한 대사처럼 말이다. 이는 그저 말로만 인재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을 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종은 성군(聖君)으로 불릴 정도로 훌륭한 임금이지만 그 위대성은 독특함이나 특출함에 있지 않다. 물론 훈민정음 창제, 과학기술 발전 등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창조적 역량을 발휘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국가 경영과 리더십의 측면에서 보자면 세종이 어떤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고 이전에 없었던 제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옛 성현(聖賢)의 가르침에 충실해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지켜야 할 원칙을 지켰고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말로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힘든 일들을 실천했기에 우리가 아는 ‘세종’이 된 것이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현대 기업으로 치면 HRM과 HRD라 할 수 있는 ‘인재 채용과 관리, 개발 전략’, 즉 ‘인재 경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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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인재관
세종은 “정치를 함에 있어서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급선무니, 직무에 적임자인 관원을 선발한다면 모든 일이 다 잘 다스려진다”고 말했다.3 나라에서 어떤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재원이 준비돼야 하고 관련 규정과 시스템이 갖춰져야겠지만 무엇보다 그 일을 훌륭히 기획하고, 진행하고, 실현할 사람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러한 인재가 누구고, 또 그러한 인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훌륭한 인재를 발견해서 좋은 성과를 거뒀다는 소식보다는 ‘사람이 없다’ ‘인재를 찾기 힘들다’라는 탄식에 익숙하다. 적임자를 찾아 중용하고 싶어도 적당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며 하소연하곤 한다. 정말 인재가 없는 것일까? 세종은 “인재는 언제나 있어왔지만 다만 몰라서 쓰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4 일찍이 공자는 “열 집이 사는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직하고 신의가 있는 자가 있다”5 라고 했는데 세종은 이 말을 인용하며 “나라 안에 어찌 사람이 없음을 걱정할 것인가. 다만 구하기를 정성껏 하지 못하고, 천거하기를 조심하지 않았는지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6 인재가 없다고 불평하기 전에 과연 좋은 인재를 찾고자 진심으로 정성을 다했는지부터 돌아보라는 것이다. 다음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이 세상 어느 임금이 훌륭한 인재를 찾아 등용해 쓰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임금에게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없는 것이다. 둘째는 임금이 인재를 절실하게 구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임금과 인재의 뜻이 합치되지 않는 것이다.… 인재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임금이 어떻게 정치를 하고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7

이 말 속에는 세종의 인재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세종에 따르면 임금은 인재를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고 인재를 얻고자 절실히 노력해야 한다. 등용한 인재가 자신의 뜻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인재에게 비전을 제시해주고 그가 더 큰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임금의 의무다. 그러면 세종이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실천했는지를 확인해보기로 한다.


어떻게 좋은 인재를 찾을 것인가?
아무리 임금이 온 힘을 다해 인재를 찾는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세종의 말처럼 “여러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점을 임금 혼자서 능히 알고 정밀하게 살피기란 불가능한 일이다.”8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인재를 빠짐없이 파악할 재간도 없다. 그러므로 인재를 등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인사를 담당하는 부서를 설치해야 한다. 과거(科擧) 시험이 전자라면 전조(銓曹)9 가 후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 우선 과거는 인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재가 직접 찾아와야 하는 방식이다. 인재가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면 그를 등용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과거 시험이 과연 그 사람의 자질과 능력을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 오랜 기간, 심층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단 하루에 치르는 시험 성적을 가지고 그 사람이 인재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우수한 사람을 뽑느라 특정 부문에서 탁월한 사람을 놓치게 되는 문제도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종은 인재를 추천하는 ‘천거(薦擧)’를 적극 활용했다. 중종 때 조광조가 제안한 현량과(賢良科)나 재야의 선비 중 뛰어난 이를 추천받아 등용하는 ‘유일(遺佚)’과 같이 천거 제도는 조선시대 내내 존재해왔다. 그러나 대부분 일시적이거나 특례로 운영되면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와 달리 세종은 천거를 제도화하고 정례화해 지속적으로 시행한다.

“우리나라에는 과거로써만 선비를 선발할 뿐 덕행(德行)이 있는 사람을 천거하는 법이 마련돼 있지 않다. 그로 인해 선비의 기풍은 경박해지고 경쟁이 심화됐으며 순수하여 겸양하는 도리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런 것이 나라의 풍습이 되도록 조장해서야 되겠는가? 몸가짐이 발라서 절개와 지조, 염치가 있는 자, 마음에 의기(義氣)를 품고 있어 지극한 간언을 올릴 수 있는 자, 선비로서 그 행실이 고을 안에 알려진 자, 사람들로부터 재예가 있다고 인정받는 자를 서울에서는 한성부가, 각 지방에서는 감사와 수령이 항상 찾아서 직위와 신분을 가리지 말고10 , 수효가 많고 적은 것도 구애받지 말고 모두 나라에 신고하라. 그런 사람이 없는 데도 억지로 천거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있다면 기필코 천거하라. 담당 기관에 맡겨 살피게 한 후 등용할 것이다.”11

나라에서 인재를 파악하고 등용할 수 있도록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남김없이 천거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천거는 이미 관리가 된 사람을 대상으로도 시행됐다. 인사 담당부처가 있지만 10명 남짓한 구성원12 으로는 모든 관리의 능력과 특성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힘들다. 관행과 인사고과, 서열 등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고 순환시킬 뿐 그가 적임자인지를 일일이 살피기 어렵다. 세종은 이를 보완하고자 천거제도를 활용한 것이다.

“전직이나 현직을 가릴 것 없이 6품 이상의 동반(문관)과 4품 이상의 서반(무관)으로 하여금 지모(智謀)와 용력이 뛰어나 가히 변방을 지킬 만한 사람, 공정하고 총명해 수령의 임무를 맡을 수 있는 사람, 사무에 능숙하고 두뇌가 명석해 극히 번거로운 자리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각각 3명을 천거해 임용하게 하라. 누가 합당한지 모르겠다면 과목마다(문과, 무과, 음직 출신) 아는 대로 쓸 만한 사람 세 명을 천거하게 하라. 만약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잘못 천거하거나, 천거한 사람이 재물을 탐하고 정치를 어지럽혀 그 피해가 백성에게 미친다면 추천한 사람을 엄히 단죄할 것이다.”13

6품 이상의 문관과 4품 이상의 무관, 그것도 전직까지 모두 추천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가능한 빠트리는 인재가 없이, 최대한 많은 인재풀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다. 중복 추천이 나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 인재가 뛰어나다는 근거가 될 것이다. 학문이나 작문 실력이 아닌 실무 능력을 기준으로 제시하고, 추천인에게 책임을 묻는 점도 중요하다. 국정에 곧바로 투입해 실질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검증된 인재를 찾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천거는 ‘삼과천거(三科薦擧)’라는 이름으로 정례화14 됐는데 세종은 추천인으로 하여금 추천 대상자의 능력과 특기, 실적까지 기록해 제출하게 함으로써 공정성을 높였다.15

DBR minibox: 집현전을 통해본 세종의 HRD 전략

세종은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핵심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먼저세종은 유명무실했던 집현전을 키워 “젊은 문관 가운데 재주와 행실이 훌륭한 자를 배치하여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게 하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년 3월16일)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고 토론하게 했다는 것은 단순히 학문 연마에 그치지 않는다. 유교국가에서는 주경익사(主經翼史)i 라고 하여 경전학과 역사학을 통치의 바탕으로 삼는다. 국가 비전과 국정 철학, 모든 정책의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즉 집현전의 젊은 인재들에게 국가 경영을 위한 기본 소양을 키워준 것이다.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게 했다는 것은 다양한 미션을 부여했다는 의미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을 팀으로 구성해 분야별 정책기획과 사례 연구, 검증을 맡겼다.(『세종실록』 30년 7월2일) 공법 개혁이나 자체 역법(曆法) 개발과 같은 핵심 사업에서부터 여름날 옥에 갇힌 죄수들이 더위를 먹지 않게 하는 방법을 찾는 일까지 다양한 임무를 집현전에서 하도록 했다. 임금의 관심사에 대한 자료 조사,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등 전문 서적 편찬과 제도 정비 작업도 담당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이 스스로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동료와 생산적인 토론을 통해 함께 문제를 해결해가도록 지원했으며 재상급 대신이 촉진자(Transfer Agent)가 돼 이를 지도하게 했다. 액션러닝(Action Learning)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세종은 집현전을 매우 꼼꼼하게 챙겼는데, 집현전 관원들이 도출한 성과를 점검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들의 출결 상황과 매월 실시되는 평가시험 결과까지 직접 확인했다.(『세종실록』 12년 8월21일; 『세종실록』 16년 3월17일) 수시로 학사들과 국정을 토론했으며 윤대(輪對)ii 할 수 있는 기회도 자주 부여했다. 심지어 “직무로 인해 밤낮으로 독서에 전념할 겨를이 없을 것”이라며 아예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책을 읽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한다.(『세종실록』 8년 12월11일) 이는 집현전의 젊은 인재를 국가의 중추로 키워내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누가 정말 훌륭한 인재인지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임금은 고위급 대신이나 승지를 제외한다면 신하와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적다. 관직이 낮고 나이가 젊은 신하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누가 차세대의 재상감인지, 누구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길 만한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소한 것이다. 젊은 인재를 대면해 그의 재능과 식견, 인품을 시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하의 입장에서도 임금의 인정을 받고 임금의 비전을 이해하며, 자신의 역량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기회였다.

아울러 세종은 이렇게 발굴한 인재를 전문적으로 훈련했다. 정인지의 학술을 높이 평가한 세종은 그에게 각종 편찬과 저술 작업을 책임지게 했으며, 외국어 실력과 외교적 안목이 뛰어난 신숙주는 일본에 서장관(書狀官)으로 파견하고 함길도에 종사관으로 보내 경험을 쌓게 했다. 집현전 출신은 아니지만 김종서의 사례 또한 주목할 만하다. 김종서는 이조 정랑, 좌대언iii 등을 거치며 세종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1433년 12월, 세종은 돌연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발령했다.(『세종실록』 15년 12월9일) 이어 함길도의 군대를 총괄하는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옮겨 국경 방어를 총괄하게 한다. 물론 중요한 업무이고 조선시대에는 문신이 군권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임금의 최측근을 하루아침에 척박한 변방으로 보낸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세종실록』 14년 2월 25일)iv 훗날 이룩한 성과를 가지고 보자면 세종은 김종서가 국경을 어지럽히는 여진족을 단속하고 북방 개척을 통해 영토 확장을 이뤄낼 최적임자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후 김종서는 1440년 형조판서에 임명돼 돌아올 때까지(『세종실록』 22년 12월3일) 무려 7년 동안이나 북방을 지켰다. 세종은 김종서가 중앙으로 복귀한 후에도 계속 안보 문제를 맡겼는데 “앞으로도 함길도의 일과 방어하는 등의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형조판서 김종서와 같이 의논하라”(『세종실록』 23년 11월 9일)고 지시했고, 1449년에도 김종서를 우찬성 겸 판병조사(判兵曹事)v 로 임명하며 “함길도 변경의 일과 왜인, 야인을 접대하는 일은 우찬성 김종서와 더불어 의논해 시행하라”고 명령했다.(『세종실록』 권123, 31년 2월5일) 같은 해, 몽고의 달달 야선이 요동에 침입해vi 국경에 위협이 닥치자 지략이 높고 경험이 많은 대신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따라 평안도 도절제사가 돼 다시 최전선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김종서의 활약은 세종 사후에도 계속됐는데 세종이 그를 안보 분야의 책임자이자 최고 전문가로 키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유롭게 말하게 하다
이처럼 세종은 인재 경영에 최선을 다했다. 나라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좋은 인재를 발굴해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이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재가 자신의 역량을 남김없이 펼칠 수 있으려면 그에게 적절한 벼슬과 예우를 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신념과 뜻이 꺾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어야 하며 왕은 항상 그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해줘야 한다. 설령 왕에 대한 날 선 비난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훗날 사육신의 일원이 되는 하위지(河緯地)는 과거 시험에서 세종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시험 책임자였던 영의정 황희(黃喜)는 하위지를 높은 순위로 합격시켰는데, 이를 두고 왕을 모욕했다며 하위지뿐 아니라 황희까지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그러자 세종은 진노한다. “과거를 실시해 대책(對策)16 을 묻는 것은 장차 바른말을 숨기지 않는 인재를 구하기 위해서다. 설령 내가 노여워하며 하위지에게 죄를 주려고 해도 그대들이 적극 나서서 보호해야 마땅하거늘 도리어 하위지를 탄핵하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앞으로 내게 직언할 자들의 길을 막고 나아가 과거를 관장한 대신까지 공격해 국가에서 선비를 선발하는 공명한 정신까지 모욕하는구나.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닌가?”17

요즘이라면 취업 면접에서 해당 재벌기업 회장을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이 합격할 수 있을까? 그것도 회장이 그 내용을 확인하는데? 세종은 임금인 자신을 비난하고 정반대의 의견을 내더라도 기꺼이 존중하고 경청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럼으로써 인재 스스로 출사(出仕)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끔 만든 것이다. 임금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소신껏 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종은 자신에게 무례한 신하도 용서했다. 한번은 회의 중에 세종과 의견 충돌을 빚은 형조참판 고약해(高若海)가 “정말 유감입니다. 전하께서 제대로 살피지 못하시니 어찌 신이 조정에서 벼슬을 하겠습니까” “지금 제 말을 받아들여 주지 않으실 뿐 아니라 도리어 신이 잘못되었다고 하시니 참으로 실망이옵니다”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적이 있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크게 예의에서 벗어난 행동이다. 하물며 왕 앞에서 저랬다는 것은 처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세종조차도 그 순간은 매우 언짢아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내 “내가 고약해의 무례함을 벌주려고 한다면 사람들이 내 뜻을 오해하여 과인이 신하가 간언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할까 염려가 된다”며 한발 물러섰다.18 훈민정음 창제를 강하게 비난한 최만리를 옥에 가두었다가 바로 다음 날 석방하고 관직에 그대로 둔 것도 같은 맥락이다.19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해도 좋으니 그저 자신의 소임에 최선을 다하기만 하라는 것이다.

충성스러운 반대자들
이렇게 자유로운 반론을 허용함으로써 인재의 신념을 지켜줬던 세종의 태도는 조정의 주요 포스트를 ‘반대자’로 채우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세종의 인사 운영이 갖는 대표적인 특징으로20 특히 임금과 함께 국정을 책임지는 삼정승은 대부분 세종을 반대했거나 세종에게 서슴없이 반대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했다.

예컨대 세종의 재위 초기 좌의정을 지낸 박은(朴訔)은 세종의 장인 심온이 사약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1 태종의 뜻을 이행한 것이지만 세종의 입장에서 보면 아내의 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세종은 집현전을 설립하면서 박은을 정1품 총책임자인 영전사(領殿事)에 임명했다.22 개인적 감정은 접어두고 누가 가장 적임자인지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종 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 황희(黃喜)도 마찬가지다. 황희는 세종의 밑에서 19년이나 영의정을 지냈지만 본래 ‘임금의 원수’로 불릴 정도로 세종의 정적이었다.23 영의정이 된 후에도 세종이 시행하려는 정책들에 자주 제동을 걸었는데 실록에 따르면 “홀로 반박하는 의논을 올렸고 (세종이) 비록 다 따르지 않았으나 중지시켜 막은 바가 많았다”24 고 한다.

전(全) 백성 여론조사를 실시했을 정도로 세종의 역점사업이었던 공법(貢法)개혁을 예로 들어보자. 공법은 이전까지의 조세제도인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이 징세관에게 지나친 재량권을 부여하다 보니 부정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불필요한 비용이 낭비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세종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괄정액세인 공법을 도입, 조세의 명확성과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런데 공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답험손실법’은 매년 농사의 작황 정도를 실측해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조세부담 능력에 따른 공평과세가 이뤄지는 장점이 있었다. 이에 비해 공법은 소득에 상관없이 세금을 고정해 놓기 때문에 부자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자에게 불리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따라서 공법을 반대하고 답험손실법을 보완, 유지하자는 신하들이 많았는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황희였다. 세종은 공법을 기필코 시행하겠다며 물러서지 않았지만 “황희의 의논대로 하라”25 며 최대한 그의 의견을 수용했고 그로 하여금 공법개혁 작업을 총괄하게 한다. 그 결과 양 제도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연분구등(年分九等)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이 도출됐다. 26

신개(申槩)의 사례도 살펴볼 만하다. 그는 1431년 세종이 태종의 실록을 읽어보겠다고 하고 1438년 또다시 실록을 열람하겠다고 시도할 때마다 임금은 실록을 볼 수 없다며 강력히 반대해 무산시켰다. 임금이 역사 기록에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으로서는 자신의 지시에 계속 반기를 드는 신개가 못마땅했음 직한 데도 오히려 그를 실록을 편찬, 관리하는 총책임자에 임명했다. 그만한 전문가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27

이 밖에도 유정현, 최윤덕, 이직, 맹사성 등 세종 시대의 재상들은 대부분 세종의 결정에 자주 반대하고, 세종과 다른 의견을 제시했던 인물들이다.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던 것은 허조(許稠)인데 그는 소수 의견이 일상이었다. 백성에게 법전을 쉽게 풀어서 알려주는 문제, 수령의 임기를 늘리는 문제, 신문고를 칠 수 있는 조건을 완화하는 문제, 백성이 고을수령을 고발할 경우 이를 처리하는 문제, 과거 시험을 보완하는 문제 등 각종 사안에 있어서 그는 세종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다수와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실록에 보면 다른 신하들이 모두 찬성할 때조차 ‘허조만 홀로 아뢰며~(獨許稠曰)’ 반론을 제기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세종은 “허조는 고집불통”이라고 불평하면서도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28 오히려 6년간이나 인사를 총괄하는 이조판서로 중용했다. 정승이 됐을 때도 상당 기간 이조판서를 겸임하게 한다. 인재를 보다 정밀하게 살피고 편견을 예방하며, 인사 결정을 심사숙고하기 위해서 허조를 요즘 말로 ‘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으로 삼은 것이다. 이와 같이 CEO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에게 최고인사책임자(CHRO)를 맡기는 것은 오늘날 기업에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다.

요컨대 세종은 반대자를 중용해 시너지를 이끌어냈다. 임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임금의 지침에 충실하게 부응하는 신하가 아니라 임금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내는 신하를 선호했다. 세종도 사람인 이상 전자가 끌렸을 테지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후자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신하의 반대를 통해 자신의 결정에 잘못된 점은 없는지 반성하고 정책의 문제점을 점검해갔다.

이러한 태도는 국가 정책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더욱 필요한 자세다. 흔히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둘 다 옳은 것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이다. 국가 경영은 우선해야 할 가치를 선택하고, 자원 배분의 순위를 결정하는 등 ‘옳음’ 사이에서 이뤄진다. 사실 기업에서 비즈니스 결단을 내리는 과정도 이와 거의 유사하다. 따라서 어느 한쪽을 고르면 다른 한쪽은 폐기하는 ‘전부(全部)/전무(全無)’의 게임이 아니다. 선택하지 않은 다른 ‘옳음’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반영해야 하는데 여기에 반대자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반대자는 ‘무조건적인 반대자’가 아니라 ‘충성스러운 반대자’여야 의미가 있다. 기획과 준비 과정에서는 치열하게 반대하더라도 최종 결정이 나면 일사불란하게 힘을 합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임금과 신하, 리더와 참모 간에 굳건한 상호 신뢰가 전제돼야 가능하다. 세종의 대표적인 반대자 허조는 “소신이 반대하였지만 끝내 전하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의 의견을 들어 이만큼 고쳐주셨으니 이제는 시행해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29 죽으면서도 “성상(聖上)의 은총을 만나 간언을 올리면 실천해주셨고 의견을 말하면 경청해주시었으니, 내 이제 죽지만 여한이 없다”고 유언을 했다.30 자신이 반대의견을 내면 임금이 경청하고 반영해줬고, 또 언제나 그럴 것이라는 점을 믿었기 때문에 설사 자신의 뜻과 다른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온 힘을 다해 헌신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제점과 한계
그렇다면 세종의 인재 경영이 모든 면에서 완벽했을까? 문제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을까? 그것은 아니다. 당대에 드러나지 않았을 따름이지 어두운 면이 없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세대교체에 실패한 점, 신상필벌(信賞必罰) 중 ‘필벌’에 관대했던 점을 거론할 수 있다.

우선 세대교체를 보자. 세종이 아끼고 중용했던 인재는 크게 두 집단이다. 아버지 태종이 검증하고 물려준 신하들, 그리고 세종 자신이 발탁해 키운 젊은 인재들이다. 황희, 맹사성, 허조, 신개, 최윤덕 등 세종 대의 정승들이 전자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태종 대에 이미 판서급 고위관직을 지냈을 정도로 나이가 있었다. 그런데 세종은 이들에게 오랜 기간 정승을 맡긴다. 황희 같은 이는 무려 24년을 정승에 있었고 이 중 19년을 영의정으로 재임했다. 나이도 80대였다. 맹사성과 허조도 70대에 정승을 했고 긴 시간 동안 재상을 맡았다. 세종이 “나이도 늙지 않았고 기운도 아직 강건하므로 우의정에 제수한다”라고 말했던 신개조차 그때 나이가 66세였다.31

물론 원로 신하들의 능력이 훌륭했으니 세종이 인사를 그렇게 운영했을 것이지만 그러는 사이 그보다 연배가 어린 중진급 신하들이 재상을 맡아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다.32 이들이 재상으로 승진하고 그 아래가 다시 이들의 자리로 올라오면서 차례로 역량을 키웠어야 했는데, 원로들이 장수해 계속 정승을 맡다 보니 차기 정승감들이 먼저 죽어버린 것이다. 세종이 직접 육성한 집현전 학사들은 아직 나이와 경력이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훗날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김종서(金宗瑞) 한 사람만 제거하면 나머지는 걱정할 것이 못 된다고 자신하고33 실제로 김종서가 죽자 단종을 보위하는 세력이 일거에 흔들려버린 데에는 이처럼 세종의 세대교체 실패가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다음으로 세종은 ‘필벌’에 약했다. 세종은 평소 신하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듬뿍 쏟았을 뿐 아니라 성과를 낸 신하에게 후한 상을 내림으로써 동기를 부여했다. 공부하다 잠든 신숙주에게 자신의 옷을 덮어준 일화가 그다지 특별한 게 아니었을 정도다. 그뿐만 아니라 “그대의 자질이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그대가 온 마음과 힘을 다한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라며 신하들을 격려해줬으니34 자연히 인재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로 하여금 임금과 나라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사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당근만 사용할 수는 없는 법이다. 조직의 질서와 기강을 확립하고 잘못이나 실수를 반복하게 하지 않으려면 ‘필벌’을 병행해야 한다. 처벌의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감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세종은 ‘필벌’을 행하지 않는다. 행하더라도 수위를 경감해주고 쉽게 용서해줬다. 예를 들어 황희가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사위 서달의 살인 사건을 무마하고자 부정 청탁을 한 적이 있다. 세종은 그 죄를 물어 황희를 해임했지만35 2주 만에 같은 자리로 복귀시켰다. 다른 비리 사건도 눈감아 줬다. 신하들이 중대한 위법을 저지른 양춘무의 처벌을 요구했지만 들어주지 않았고36 종친 이원생과 이인이 죄를 범했을 때도 가볍게 다스렸다.37 여종을 학대해 죽음에 이르게 한 권채도 짧은 기간 파면에 그친다.38 이러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세종이 신하를 엄히 단죄하는 것은 수령이 백성구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백성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경우에 한정됐다.

이렇게 세종이 ‘필벌’의 규칙을 확립하지 않고 신하를 관대하게 대한 것은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처벌해 그 사람을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줌으로써 계속 활용하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능력을 아끼는 마음에 그냥 덮어준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기준이 원칙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처벌의 형평성에 대한 논란이 생겨나며 향후 같은 죄를 저지른 사람을 단속할 명분도 없어진다. 공직기강이 해이해지고 부정부패가 만연해질 우려도 있다. 세종 같은 군주야 충분히 이를 통제할 수 있고 신하들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겠지만 평범한 군주들이라면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세종의 인재 경영을 중점별로 정리해봤다. 인재 선발과 육성을 위해 임금이 관심을 갖고 열의를 다한 점, 인재를 빠짐없이 등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한 점,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핵심 인재를 양성한 점, 그리고 이것이 말로 그치지 않고 꾸준한 실천으로 옮겨졌다는 점은 오늘날 CEO들이 본받아야 할 부분이다. 리더가 직접 챙겨야 인사 부처가 최선을 다하고 조직 문화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인재가 직무에 몰입하고 만족하게 만들어준 것도 평가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인재의 헌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내적 가치와 외적 보상이 함께 충족돼야 한다. 다만 당시는 유교 이념에 따라 물질적 대가보다는 공직에 대한 사명감이 우선했고 요즘과 같은 성과보상 개념이 있지도 않았다. 인재가 옮겨갈 수 있는 경쟁 기업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다. 따라서 내적 가치가 인재를 붙잡는 첩경이 되는데 인재는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 지느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39 세종은 인재가 마음껏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도록 했다. 왕에 대한 신랄한 비판까지 기꺼이 받아들였다. 인재가 왕과 다른 주장을 하더라도 존중하고 경청하면서 최대한 인재의 의견을 수용해줬다. 최고 리더의 이와 같은 자세는 자연히 인재에게 동기부여가 됐을 것이다.

끝으로 세종이 반대자들로 조정의 요직을 채운 것은 매우 중요하다. 흔히 ‘악마의 변호인’ ‘레드팀’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반대 의견과 문제 제기를 통해 미리 취약점을 보완하고 나아가 객관성과 다양성을 확보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무 단계에서는 존재할지 몰라도 이러한 시스템이 최고 리더에게까지 적용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재벌그룹 총수의 결정에 반대하고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일상처럼 존재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의 면전에서 당신이 틀렸다며 강하게 비판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전직 대통령과 재벌 회장이 포토라인에 서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이라고 무조건 옳은 생각만 하고 적절한 판단만 내렸을까? 절대 아니다. 세종의 최종 결정이 훌륭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엄한 왕명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말하는 신하를 곁에 두었기 때문이다. 왕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반박하는 대신들이 그를 보좌했기 때문에 세종이 우리가 아는 세종대왕일 수 있었던 것이다.

DBR minibox: 세종의 비전 확산 전략

세종이 인재 경영에 힘을 쏟은 것은 자신의 정치 비전을 함께 구현해 줄 사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세종이 밝혔다시피 아무리 인재가 있더라도 임금과 인재의 뜻이 합치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임금의 비전에 공감하고 동의해야 인재도 임금이 추진하는 사업에 기꺼이 참여하고 헌신하게 된다.

세종의 정치 비전은 ‘시인발정(施仁發政)’과 ‘생생지락(生生之樂)’이라는 말로 대표된다. 즉위교서에서천명한 ‘시인발정’은 “어짊을 베풀어 이 땅 위에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지게 한다”는 뜻으로40 『맹자』의‘발정시인(發政施仁)’에서 유래했다. 세종은 ‘발정’과 ‘시인’의 순서를 바꾸어 놓았는데, 임금의 양대 책무인 통치(治, 발정)와 교화(敎, 시인) 중 교화를 우선한 것으로 보인다. 백성 개개인을 깨우쳐 진작시킴으로써 각자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발휘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생생지락’도 같은 맥락이다. 세종은백성으로 하여금 생생지락, 즉 삶을 살아가는 즐거움을 완수하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41 백성 개개인이스스로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주체적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교정치 사상의 핵심 이념인 ‘민유방본(民惟邦本,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 ‘인정(仁政)’에 입각한 것으로 세종만의 새로운 비전은 아니다. 인간 개개인이 순수하고 선한 본성(本性)을 회복함으로써 자신이가진 긍정적인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이를 토대로 도덕 사회를 구축한다는 성리학의 이상과도 직결된다. 하지만 기존 가치관이 ‘치자(治者)/학자(學者)’의 입장에서 교화의 노력을 강조한다면 세종은 백성이직접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삶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세종은 백성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중시했다. 『세종실록』에는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게 하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농업서인 『농사직설(農事直說)』, 의학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해 각 고을에 배포한 것, 주요 법률을 이두로 번역해 나눠주도록 한 것, 그림을 덧붙인 윤리책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보급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만의 달력과 각종 시보 장치를 제작하고 나아가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도 백성에게 다양한 정보를 보다 쉽게 제공하기 위한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세종의 노력에 대해서는 반발이 만만치 않았는데 가령 백성이 법률을 알게 되면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자가 나올 것이라며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세종은 ‘민본’과 ‘인정’의 당위성을 내세운다. 자신의 어젠다를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 원칙과 연결해 반대를 극복해갔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종이 자신 생각만 옳다고 고집한 것은 아니다. 공법 개혁, 부민고소금지법 개폐 논쟁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세종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계속 토론하고, 설득했다. “요사이 과감한 말로 과인의 면전에서 간언하고 논쟁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말하는 것 또한 절실하지도 강직하지도 못하다. … 왜 한 사람도 중론에 반대하여 논란하는 자가 없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반드시 숨김없이 다 말하라”42 며 직언을 장려하고 치열한 논쟁의 장을 열어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하고자 했다. 이러한 세종의 태도 덕분에 신하들은 특정 정책을 반대하더라도 임금과 함께 공유한 비전의 틀 안에서 최선의 접점을 찾고자 모색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세종이 ‘사조(辭朝)’를 적극 활용한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앙에서 아무리 훌륭한 비전을 세우고 좋은 정책을 마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선 현장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조’란 지방 수령으로 나가는 관리가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는 것을 말하는데, 세종은 말단 현령에서부터 각 도를 책임지는 관찰사에 이르기까지 직접 접견하며 수령으로서 유념해야 할 사항들을 상세히 당부했다. 수령의 생각을 청취하고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도 약속했다. 일반적으로 이 ‘사조’는 형식적으로 이뤄지거나 의정부 정승들이 대신하곤 했는데 세종은 이를 일일이 챙겼다. 최고 리더로서 현장 책임자/관리자와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필자 소개 김준태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45호 Fake Data for AI 2022년 05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