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Article at a Glance
영조시대, 특히 사도세자의 죽음을 전후한 시기부터 영조 재위 말년까지는 재상들의 수난시기였다. 3년 새 5번이나 해직과 복직을 거듭했던 재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재상은 존재했다. 노론 출신 탕평파 영수 김재로는 재위 20년을 넘기며 자신감을 보이던 영조와 발맞춰가며 각종 개혁 어젠다를 밀어붙였고 성공시켰다. 훌륭한 2인자에는 물론 여러 유형이 있을 수 있다. 2인자들은 자신의 생존은 물론 성공을 위해서 스스로 어떤 유형에 속하든, 1인자의 성향이나 조직의 상황에 따라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김재로와 조현명은 영조의 뜻을 지지하고 영조가 제시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영조로부터 최상의 예우를 받고 영광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 ‘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기회가 없는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뛰어난 문장과 기개로 명망이 높았던 한익모(韓翼?, 1703∼미상)는 1772년(영조48) 10월22일,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의정에서 파직됐다. 임금의 지시에 반대한 괘씸죄였다. 이듬해 1월28일 그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됐지만 닷새 만에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됐고,1 두 달 후 영의정에 보임됐다가2 다음 달 또 파직된다.3 1년 후에도 영의정이에 오르지만4 일주일 만에 면직됐고, 1775년에는 그나마 길게 영의정으로 재임하다가 역시 네 달 만에 삭직됐다.5 3년 사이에 다섯 차례나 해직과 복직을 거듭한 것이다. 근무한 기간도 매우 짧았기 때문에, 그는 수상으로서 제대로 일해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비단 한익모만이 아니다. 같은 시기에 영의정을 지냈던 김치인(金致仁, 1716∼1790), 김상복(金相福, 1714∼1782), 신회(申晦, 1706∼미상)도 마찬가지였고, 좌의정이나 우의정을 지낸 사람들도 다를 바 없었다. 임금의 기분에 따라 재상이 갈리고, 하루아침에 수상이 유배를 떠나던 시기. 2인자의 지위가 하루살이나 다름없던 시기. 그것이 바로 조선에서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군왕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의 말년 풍경이다.
상황이 이렇게 됐던 것은 영조가 나이가 들며 더욱 완고해졌기 때문이다. 종사를 지킨다고 아들까지 죽인 마당에 영조에겐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세자를 버리고 세손을 선택한 자신의 결단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세손을 미래의 성군으로 훈육해야 했고, 평생의 자긍심인 탕평을 유지해야 했으며, 추진해 온 개혁과제들도 완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나이 이미 70을 넘은 고령. 영조는 조바심을 느꼈던 것 같다. 갈수록 비판과 반론을 허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뜻을 무조건 관철시키고자 했다. 자신의 뜻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신하는 가차 없이 처벌했다.
더욱이 이 시기 영조는 나이로 보나, 정치 경험으로 보나 신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쉰이 넘은 재상이라도 영조가 볼 땐 철부지나 다름없었다. 예컨대 김치인의 경우 역시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의 아들이다. 신하의 아들이 늙어 영의정에 오를 때까지 한 임금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영조의 신하들 대부분이 맞닥뜨린 문제였는데, 아버지가 모셨던 임금을 그대로 다시 모시기란 어렵고 불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영조는 ‘너의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는 충성스런 신하였다’며 신하들을 압박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신하들은 점점 입을 다물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정국이 비단 말년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원인은 달랐지만 영조 재위기간 내내 살얼음판 같은 정국은 계속됐다. 노론과 소론의 극한 대립, 반란, 사도세자 문제 등이 휘몰아치면서 어떤 재상은 반역으로 몰렸고, 또 어떤 재상은 관직을 추탈당했다. 2인자가 끊임없이 시험받고, 또 위태로웠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이 시기 2인자들은 어떻게 생존했을까.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또 어떤 대응을 했을까. 대표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영조 초반기를 관통했던 키워드는 ‘신임사화(辛壬士禍)’다. 과거 세자 시절부터 경종을 견제해온 노론은 경종 즉위 후, 친노론 성향의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에 임명하도록 주청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더 나아가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주장한다. 아직 나이가 젊고 건재한 왕에게 동생을 세제로 임명하고, 다시 그 동생에게 정무를 맡기라고 요구했다는 점에서 불충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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