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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영조 VS. 사도세자, 살벌한 갈등의 시기 지혜로 뜻 이룬 위대한 재상도 있다

김준태 | 188호 (2015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영조시대, 특히 사도세자의 죽음을 전후한 시기부터 영조 재위 말년까지는 재상들의 수난시기였다. 3년 새 5번이나 해직과 복직을 거듭했던 재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재상은 존재했다. 노론 출신 탕평파 영수 김재로는 재위 20년을 넘기며 자신감을 보이던 영조와 발맞춰가며 각종 개혁 어젠다를 밀어붙였고 성공시켰다. 훌륭한 2인자에는 물론 여러 유형이 있을 수 있다. 2인자들은 자신의 생존은 물론 성공을 위해서 스스로 어떤 유형에 속하든, 1인자의 성향이나 조직의 상황에 따라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김재로와 조현명은 영조의 뜻을 지지하고 영조가 제시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영조로부터 최상의 예우를 받고 영광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기회가 없는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뛰어난 문장과 기개로 명망이 높았던 한익모(韓翼?, 1703∼미상) 1772(영조48) 1022,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의정에서 파직됐다. 임금의 지시에 반대한 괘씸죄였다. 이듬해 128일 그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됐지만 닷새 만에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됐고,1 두 달 후 영의정에 보임됐다가2 다음 달 또 파직된다.3 1년 후에도 영의정이에 오르지만4 일주일 만에 면직됐고, 1775년에는 그나마 길게 영의정으로 재임하다가 역시 네 달 만에 삭직됐다.5 3년 사이에 다섯 차례나 해직과 복직을 거듭한 것이다. 근무한 기간도 매우 짧았기 때문에, 그는 수상으로서 제대로 일해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비단 한익모만이 아니다. 같은 시기에 영의정을 지냈던 김치인(金致仁, 1716∼1790), 김상복(金相福, 1714∼1782), 신회(申晦, 1706∼미상)도 마찬가지였고, 좌의정이나 우의정을 지낸 사람들도 다를 바 없었다. 임금의 기분에 따라 재상이 갈리고, 하루아침에 수상이 유배를 떠나던 시기. 2인자의 지위가 하루살이나 다름없던 시기. 그것이 바로 조선에서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군왕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의 말년 풍경이다.

 

상황이 이렇게 됐던 것은 영조가 나이가 들며 더욱 완고해졌기 때문이다. 종사를 지킨다고 아들까지 죽인 마당에 영조에겐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세자를 버리고 세손을 선택한 자신의 결단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세손을 미래의 성군으로 훈육해야 했고, 평생의 자긍심인 탕평을 유지해야 했으며, 추진해 온 개혁과제들도 완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나이 이미 70을 넘은 고령. 영조는 조바심을 느꼈던 것 같다. 갈수록 비판과 반론을 허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뜻을 무조건 관철시키고자 했다. 자신의 뜻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신하는 가차 없이 처벌했다.

 

더욱이 이 시기 영조는 나이로 보나, 정치 경험으로 보나 신하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쉰이 넘은 재상이라도 영조가 볼 땐 철부지나 다름없었다. 예컨대 김치인의 경우 역시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의 아들이다. 신하의 아들이 늙어 영의정에 오를 때까지 한 임금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영조의 신하들 대부분이 맞닥뜨린 문제였는데, 아버지가 모셨던 임금을 그대로 다시 모시기란 어렵고 불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영조는너의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아버지는 충성스런 신하였다며 신하들을 압박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신하들은 점점 입을 다물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정국이 비단 말년뿐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원인은 달랐지만 영조 재위기간 내내 살얼음판 같은 정국은 계속됐다. 노론과 소론의 극한 대립, 반란, 사도세자 문제 등이 휘몰아치면서 어떤 재상은 반역으로 몰렸고, 또 어떤 재상은 관직을 추탈당했다. 2인자가 끊임없이 시험받고, 또 위태로웠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이 시기 2인자들은 어떻게 생존했을까.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또 어떤 대응을 했을까. 대표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영조 초반기를 관통했던 키워드는신임사화(辛壬士禍)’. 과거 세자 시절부터 경종을 견제해온 노론은 경종 즉위 후, 친노론 성향의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에 임명하도록 주청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더 나아가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주장한다. 아직 나이가 젊고 건재한 왕에게 동생을 세제로 임명하고, 다시 그 동생에게 정무를 맡기라고 요구했다는 점에서 불충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컸다.

 

 

실제로 소론은 이러한 노론의 노선을 경종에 대한()’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노론을 탄핵했다. 이 과정에서 노론의 영수인 ‘4대신6 을 처단할 것을 주장한 소론 김일경의 상소가 올라왔는데, 이를 계기로 노론에서 소론으로의 환국이 단행된다. 이후 노론의 소장파들이 3가지 방법으로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이른바목호룡의 고변이 벌어지면서 4대신이 사사되고 관련자들도 모두 처형됐다.7 신임사화는 바로 이 사건 전반을 지칭하는 용어다.8

 

그런데 사실상 노론에 의해택군(擇君)’된 영조가 즉위하면서 국면이 뒤바뀐다. 노론은 신임사화를 소론의 날조로 규정하고 이로 인해 화를 입은 사람들을 신원하기 위해 주력했다. ‘노론=경종의 역신(逆臣)’이란 프레임을 무력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한편 소론은영조의 역신이며 사건을 조작했으므로경종에게도 역신이라는 논리를 확립하고자 했다. 더욱이 소위삼수의 옥에는 영조의 처조카 및 측근들이 개입돼 있었기 때문에 영조로서도 이를 무고로 처리해야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영조는 1729(영조5) ‘기유처분으로 노론 4대신 중 이건명과 조태채를 신원하고, 1740(영조16) ‘경신처분으로 김창집과 이이명을 복권시킨다. 그리고 다음해인 1741(영조17) 삼수의 옥과 관련된 서류를 불사르는신유대훈을 단행한다. 이로써 노론은 자신들의 염원인 신임사화의 신원을 완성한 것이고, 영조도 정치적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소론의 현실적인 힘을 무시할 수 없는데다 영조도노론의 임금에서 탈피하고자 탕평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서 소론을 처벌해야 하지만 동시에 소론을 필요로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인 것이다. 소론의 영수이자 영조의 통치 전반기를 대표하는 재상인 이광좌(李光佐, 1674∼1740)는 바로 이 시기에 영의정으로서 재임했다.

 

이광좌는 경종 시절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인물이다.9 노론 4대신과도 앞장 서 싸웠다. 노론의 입장에서 볼 때 눈엣가시와도 같았던 것이다. 그는 영조 즉위와 함께 영의정에 임명되는데10 이는 소론을 안심시키기 위한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영조가 세제 시절 자신을 위협했던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그 또한 파직 당한다.

 

이때 노론은 1년여에 걸쳐 이광좌를 엄하게 처벌하라고 상소했지만 영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이광좌에게 경종의 병환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 망극한 일을 겪게 했다는 죄목을 추가한다.11 경종이 승하할 당시 영조는 어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삼다(蔘茶, 인삼차)를 올릴 것을 고집했는데 경종은 차도를 보이기는커녕 다음 날 새벽에 눈을 감았다. 인삼이 경종 승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처방한 약을 진어하고 다시 삼다를 올리게 되면 기를 능히 되돌릴 수 없을 것12 이라는 어의의 경고를 무시한 것이기 때문에 책임 소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있던 영조에게 이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이를 불식시키고자 당시 약방 도제조를 맡고 있던 이광좌에게 경종 죽음의 책임을 돌린 것이다.

 

이후 이광좌는 영조 3년에 다시 영의정으로 제수된다.13 노론이 영조의 탕평노선에 동의하지 않고 소론을 전멸시키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자 영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환국을 단행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 터진다.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소론 과격파들이 일으킨 무신란(戊申亂, 혹은이인좌의 난’)이 벌어진 것이다.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정권은 신속히 진압 작전에 나섰는데 자칫 조정의 소론 신하들까지 역모에 연좌돼 몰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였다.

 

이광좌는 병력을 증원하는 등 도성방비대책을 수립하고 민심의 동요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14 그는 영병조사15 를 겸임하며 반란 진압을 총지휘했는데16 평안병사 이사성이 공범임을 밝혀내 체포하기도 했다. 북방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사성을 방치했더라면 조정은 남북으로 포위됐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수상으로서의 책임감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소론의 충성을 증명하고자 한 필사의 몸부림이기도 했다. 소론의 일부가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할 수 없고 영조는 선왕을 독살한 죄인이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킨 그때, 소론의 대다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소론 전체가 토역(討逆)17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향한 노론의 칼날은 끝내 무뎌지지 않았다. 노론은 계속 이광좌를 탄핵했고 그때마다 이광좌는 도성 밖으로 나가 대죄해야 했다. 노론에게 소론은 원수였고 이광좌는 어디까지나 그 원수들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영조도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부분에서는 노론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광좌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만약 이광좌가 영조의 탕평 방침에 충실히 부응하고 조세, 국가재정 문제 등에 역량을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당장에라도 북변으로 유배돼 죽은 좌의정 유봉휘와 같은 처지가 됐을 것이다.

 

 

이광좌는 영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영조 13년 다시 영의정에 임명된다. 그리고 3년 후 정쟁의 혼돈 속에서 병으로 죽었다.18 영의정이라는 현직에 있을 때 사망하긴 했지만 그의 사후는 매우 불행했다. 1755(영조31)에 일어난 소론의 역모사건에 연관돼 관작이 추탈당한 것이다.19 이때 영조는 교서를 반포하며, 이광좌가 비록 다른 마음을 품진 않았지만 소론의 영수인 그가 제대로 반성하고 노력했더라면 소론에 의한 역모나 정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규정했다.20  이광좌가 소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처럼 1인자와 반대되는 위치에 서게 되면 2인자의 삶은 결코 평탄할 수가 없다. 설령 1인자가 2인자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고, 2인자 또한 1인자를 깍듯이 모시더라도 구조적인 대립관계가 해소되지 않는 한, 즉 서로 이념이 다르고 정파가 다르다면 그 둘은 정적으로 남게 된다. 더욱이 각자가 가진 힘과 명분이 상대방에게 위협이 될 때, 이 둘이 공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광좌는 최선을 다해 영조를 보좌했지만 노론이 경종에게 불충했다고 보는 소론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조도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 이러한 이광좌를 끝내 불충으로 다스려야 했다. 태생적으로 두 사람은 합치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광좌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노론 탕평파의 영수 김재로(金在魯, 1682∼1759)가 영의정에 올랐다.21 당시 영조는 재위 20년을 넘기며 국정에 자신감을 보였는데 국정운영이념인탕평을 더욱 강조하고 <속대전(續大典)>22 편찬, 서얼등용 확대, 서원 억제, 균역법23 실시 등 자신의 개혁 어젠다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김재로는 이러한 영조를 충실히 보좌했다.

 

물론 김재로도 신임사화의 신원 등 노론의 정통성 확보에 앞장섰고당파적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며 영조로부터 비판을 받는 등 노론 본류에 속하는 인물이었지만24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호응하며 소론과의 공존을 받아들인다. 영조가그를 재상에 임명한 것은 탕평을 책임 지워 이루려 한 것이다25 라고 실록에 기록돼 있을 정도다. 졸기에도 그가탕평의 주인노릇을 했다26  라고 평가돼 있다. 그는 소론의 인물들과도 친하게 지냈으며 당파 간 갈등이 극심해질 때마다 양쪽을 모두 설득해 조율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그에게도 노론 강경파들의 비난이 쇄도했는데 김재로는 그때마다 거듭 사직상소를 올리며27 영조의 신임을 확보, 정국을 돌파해갔다.

 

같은 시기에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소론 조현명(趙顯命, 1690∼1752)도 마찬가지다. 친형이자 영조의 사돈28 조문명과 더불어 소론 탕평파를 이끈 조현명은 양역변통과 균역법 제정 과정을 총괄한 경세가다. 그는 균역법에 대한 비판이 비등하자개 한 마리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천 마리 개가 그 소리를 듣고 짖는 법입니다. 지금의 소요는 참으로 소요가 있어 이런 것이 아닙니다29 라며 일관되게 개혁 작업을 추진했다. 그는 소론이었지만 세제 시절부터 영조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고, 또한 직접 참전해 이인좌의 난을 진압했기 때문에 노론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훌륭한 2인자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사심 없이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 업무능력이 탁월한 사람, 1인자의 보완재가 돼줄 수 있는 사람, 레드팀의 역할을 수행해 줄 사람, 조직을 추스르고 구성원들을 북돋워 줄 사람, 넒은 안목으로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 등이다. 하지만 1인자가 좋아할 유형은 다를 것이다. 다른 구조적 제약을 뺀다면 2인자는 자신이 어떤 유형에 속하든 1인자의 성향이나 조직의 상황에 따라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김재로와 조현명은 영조의 뜻을 지지하고 영조가 제시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재상들이었다. 이들이 영조로부터 최상의 예우를 받으며 관직생활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원만하게 흐를 것 같던 정국이 다시 얼어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불신이 쌓이고 갈등이 격화되면서 세자에 대한 왕의 분노와 질책은 갈수록 더해졌고 세자의 마음병과 일탈도 심화된 것이다.

 

보통 1인자와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조직은 크게 동요한다. 현재의 권력과 미래 권력 사이에서 줄서기를 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를 이간질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혼란이 계속된다. 이는 2인자에게도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1인자를 무조건 지지할 수도, 반대로 후계자의 편을 들 수도 없다. 전자는 후계자가 1인자가 됐을 때 보복을 받을 수 있고, 후자는 지금의 1인자에게 노여움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이해관계를 떠나 1인자와 후계자의 갈등은 공동체의 안정을 해치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2인자는 어떻게든 이러한 국면을 타개해야만 했다.

 

 

이에 당시 재상들은 왕과 세자의 관계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재상들이 봤을 때 세자의 비행도 문제지만 영조의 지나친 압박이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들고 있었다. 김재로는동궁 저하께서 어린 나이에 대리청정을 맡으셨으면서도, 대응하심이 다 합당하여 성상의 뜻을 우러러 본받지 않음이 없으니 신은 일찍이 감탄해왔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매양 지나치게 책망을 하고 계십니다30 라며 세자를 관대하게 대해달라고 진언했다. 영의정을 지낸 이종성(李宗城, 1692∼1759)도 세자에게는 마음을 바로잡고 학문과 수양에 힘쓸 것을 거듭 요청하고, 영조에게도 세자를 대할 때 평상심을 잃지 말라고 강조했다.31 그는 영의정을 사직하면서 임금의지나친 거조와 헤아릴 수 없는 분노를 비판했는데32 , 이는 영조가 세자에게 보인 태도다.

 

유척기(?拓基, 1691∼1767) 역시 많은 노력을 했다. 영의정 시절 유척기는 영조에게자식을 가르치는 일은 귀천에 따라 차이가 없으므로 신이 민간의 예를 들어 말씀 올리겠습니다. 만일 아버지의 엄격함과 위엄이 지나치면, 자식은 두려워하고 위축돼 말하고 시봉하는 것이 잘 맞지가 않고 어긋나게 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심하면 질병으로까지 발전되는 것이니, 자애로움과 온화함을 위주로 하여 도리를 보여주고 깨우쳐야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믿음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엄격함이 너무 지나치시기 때문에 동궁이 늘 두려움과 위축된 마음을 품고 있어 전하를 뵐 때마다 머뭇거림을 면치 못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심기를 화평하게 만드시고 세자가 지나친 잘못이 있더라도 조용히 훈계해 점차 고쳐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그리하면 하루 이틀 사이에 자연히 나아져가는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간언한 바 있다.33

 

이 시기에 삼정승이 사도세자를 지키고자 자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34 1761(영조37) 15일 전임 영의정이자 현 영중추부사 이천보(李天輔,1698∼1761),

215일 우의정 민백상, 34일 좌의정 이후가 차례로 죽은 사건을 말한다. 임금의 마음을 돌리고 세자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죽음으로써 간언했다는 것이다.

 

이들 세 재상이 자결했느냐의 여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들은 <영조실록>에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며 이 세 사람은 자살이 아닌 병사라고 주장하지만 정치적 부담 때문에, 혹은 죽은 재상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적은 것일 수도 있다. 더욱이 세 사람이 자결했다는 내용의 옛 문헌들도 있다. 하지만 이천보의 경우 죽기 직전에 병 때문에 조참(朝參)35 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나온다.36 민백상도 사망하기 며칠 전, 자신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음을 영조에게 보고했다.37 세 정승의 잇따른 죽음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이 죽음들이 사도세자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고종 때 사도세자를 왕인장조(莊祖)’로 추존하는 과정에서 특진관 심상황은() 상신(相臣) 문간공 이천보, 정익공 이후, 정헌공 민백상은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다가, 신사년(1761)에 이르러 더 이상 사태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려 통곡하며 더 이상 살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세 정승이 손을 맞잡고 결단하여 연이어 죽었으니 그 뛰어난 충성과 절개는 천지를 지탱하며 해와 달처럼 빛났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린다.38 이는 비단 심상황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다른 신하들도 여기에 동의했고39 , 나아가 고종에 의해 채택된다. 조정의 공식적인 판단이 된 것이다. 자결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유보하더라도 최소한 세 재상들이 죽음으로써 세자를 지키고자 했다거나, 죽는 순간까지 세자를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됐고 사도세자를 죽이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재상들도 등장했다. 영조가 이미 결심을 굳혀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천보의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된 김상로(金尙魯, 1702∼미상)의 경우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관작을 추탈당했는데 정조에 따르면 영조가김상로는 너의 원수다라 했다. 김상로가 임오화변40 을 초래했으며 세손인 정조까지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다.41 영조는 재위 중에도 김상로가문녀42 와 비밀리 결탁하여 국본(세손)을 위태롭게 하려는 흉악한 모의를 꾸몄다고 밝힌 바 있다.43 이를 두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책임을 김상로에게 전가했고 정조 또한 그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최소한 김상로가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동참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홍봉한(洪鳳漢, 1713∼1778)도 마찬가지다. 그는 영조와 함께 세자를 죽이는 일에 주역을 맡다시피 했다. 원래 진사에 불과했던 홍봉한은 자신의 딸이 세자빈에 책봉되면서44 일약 고속승진을 한다. 2년 만에 종 2품 광주부윤에 오른 것이다.45 이후 성균관 대사성과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주로 척신들에게 주어지는 자리인 어영대장과 총융사도 역임했다. 그는 공노비 신공 감면, 균역법 시행 등 주요 정책과정에 참여했으며 영조의 치적 중 하나인 청계천 준설 작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다양한 활동과는 달리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세상에서는 그의 승승장구를 오로지 외척이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런데 이런 홍봉한이 왜 사위를 죽이는 일에 앞장 선 것일까. 자신이 가진 힘의 근거가 돼준 세자를, 그는 왜 제거하고자 했을까. 오늘날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세손이라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자칫 세자가 역모로 내몰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와 장인인 홍봉한이 직접 나섬으로써 세자의 죄로 연좌되는 일이 없도록 막고, 세손과 세손의 외가를 보호했다는 것이다.

 

 

홍봉한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영조의 결단을 칭송하고46 이어 이 처분을 정당화하는 내용의 차자를 올렸다.47 홍봉한에 따르면 영조의 결단은 종사를 보호하고 세손을 보존하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으며, 세자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기 전에 이를 미리 차단한 것이다. 자신은 세자에게 충성을 다해왔지만 이러한 영조의 결심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섰다는 것이다. 영조는 여기에 동의하면서 소위임오의리를 확립했다. 세자를 죽인 것은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것, 따라서 여기에 그 어떤 문제도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화사도에서 영조가 정조에게 이것이 너와 나의 의리이다라고 한 대사는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임오의리를 기반으로 홍봉한은 영의정이 돼 영조 후반기 정국의 중심이 된다. 하지만 정순왕후의 친정인물인 김한록, 김구주 세력의 견제, 신진소장파들이 주축이 된 청명당의 공격을 받아 점차 위세가 약화됐다. 여기에 홍봉한이 은언군과 은신군48 형제와 밀접하게 지내자 영조는 이를 세손에 대한 위협49 으로 간주해 그를 삭출시킨다.50 정조도 사도세자 죽음의 책임을 물어 그와 그의 가문을 처벌했는데, 어머니 혜경궁의 심정을 고려해 외조부 홍봉한과 외삼촌 홍낙임은 살려줬다고 한다. 홍봉한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권력을 누릴 수가 없었다.

 

이상 김상로와 홍봉한의 사례는 2인자가 후계자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준다. 반정과 같이 정권 자체가 바뀌는 것이 아닌 이상, 설령 그것이 아무리 명분을 가졌다고 해도 언젠가는 권력의 보복을 받게 된다. 신하가 권력을 탐해 왕위 문제에 개입했다는 불명예도 얻고 말이다.

 

 

지금까지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영조의 재위기간 동안 영의정을 지낸 인물들을 살펴봤다. 서두에서도 말했다시피 이 시기는 2인자인 재상들이 끊임없이 시험받던 시대였다. 신념을 지킬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다른 당파와 대결할 것인가 타협할 것인가, 임금의 뜻에 반대할 것인가 따를 것인가를 두고 재상들을 항상 선택을 요구받았다. 더욱이 그 선택은 반란과 옥사, 1인자의 독선, 후계 문제의 혼란 등과 관련지어졌기 때문에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영조의 영의정들이 보여주는 시사점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2인자는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다. 2인자는 기본적으로 업무여건을 선택할 수가 없다. 외부 환경,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 1인자의 성향 등은 자신이 선택하거나 자신이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존이 우선이라면 1인자에게 철저히 순응하고 대세를 따르면 될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을 등지고 떠나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2인자로서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2인자는 자신과 상황 사이의 접점을 찾아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현실 개선하고 환경을 변화시켜가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실패하거나 생존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념을 버리고, 우물쭈물하느라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다. 위태로운 정국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개혁을 위해 노력한 재상, 내부적 갈등과 혼란이란 족쇄 때문에 민생과 국정을 위해 온전한 힘을 쏟지 못한 재상, 1인자에게 휘둘려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못한 재상들이 공존하는 영조의 시대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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