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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임금 망명불가+의병 인센티브+일선장수 지지.. 戰時수상 유성룡, 21세기 CEO를 가르친다

김준태 | 168호 (2015년 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HR,인문학

유성룡은 1593 11,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때 그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영의정에 임명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는 1598년까지 5년간전시내각의 수상으로서 조정을 이끌었다. 그는 피난길에 오른 선조에게명나라로 망명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버리고 이 땅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민심이반을 막으려 했고, 백성 개개인이 국토 방위에 자발적으로 나설 수 있는인센티브제도를 고안했다. 전쟁을 위한기본원칙을 다시 가다듬었고, 국가개조와 내부개혁에 힘쓰면서 동시에 전장의 장수들이 전쟁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전쟁이라는 단어를위기글로벌 경쟁으로 바꾸고, ‘백성임직원으로 바꾸고, ‘전장의 장수현장의 임직원으로 바꿔보라. 한 조직이나 기업의 2인자로서 위기 시에 무엇을 해야 할지 한눈에 보일 것이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1598(선조 31) 111. 이날의 <선조수정실록>1 은 두 가지 사건을 전하고 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전사와 풍원 부원군 유성룡(柳成龍)에 대한 탄핵이다. 7년간에 걸친 전쟁이 종식된 바로 그날, 전쟁기간 조선의 두 버팀목이었던 이순신과 유성룡이 함께 비운의 퇴장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시간을 되돌린 1592 414. 조선에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국난이 시작된다. 삼포왜란과 을묘왜란 등 왜가 일으킨 변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20만에 가까운 정규군의 침입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왜군을 맞은 조선은 삽시간에 무너졌다. 부산진 첨사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분전했지만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인해 성들은 오래지 않아 함락 당했다. 이때 최전선이었던 경상도의 지휘부는 매우 무능한 모습을 보인다. 경상병사 이각은 함께 싸우자는 송상현의 요청을 거절하고 도망갔고 경상좌수사 박홍도 주둔지를 버리고 달아났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스스로 전선을 침몰시키고 병사들을 해산했으며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백성들을 대피시키라는 공문만 발송했을 뿐이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조정은 크게 당황했다. 2년 전 통신사가 일본에서 돌아온 후 유성룡 등의 건의로 성곽을 보수하고 해안지역의 장수들을 보충했지만 겉치레에 그쳤을 뿐 사실상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조정은 왜군을 저지하기 위해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일과신립을 차례로 파견한다. 하지만 병사 부족, 전략의 실패 등으로 인해 괴멸 당했다. 왜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에 선조와 조정은 공석이었던 세자부터 책봉했다.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 지 보름여 만에 수도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다.

 

51. 선조는 본격적인 전시 체제에 돌입하며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전시내각의 총책임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대간의 탄핵으로 인해 유성룡은 곧바로 파직 당한다. 임금이 수도를 떠나 몽진(蒙塵)하는 치욕적인 상황에 대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고, 몽진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와 함께 좌의정이었던 그가 정치적인 책임을 진 것이다. 유성룡은 민간인의 신분이 됐지만 선조는 그에게 어가의 호종을 명령하고 계속 자문을 구한다. 그리고 한 달 후인 61일에는 유성룡을 부원군(府院君)에 봉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영의정에서 해임하긴 했지만 전시 조정을 운영하는 임무를 계속 맡기기 위해 재상에 준하는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후 유성룡은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임하며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고 명나라 군대의 군수보급을 책임졌다. 위압적이고 포악한 명나라 장수들을 상대하고 극한 상황에서도 차질 없이 보급이 이뤄지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노련함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실록>유성룡이 군량과 마초를 마련했기 때문에 공급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

 

유성룡은 1593 111일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는 98년까지 5년간 수상으로서 조정을 이끌었다. 그는 각 도의 전장을 누볐으며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파는 달랐지만 좌의정 윤두수와 긴밀히 협력했고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그가 남긴 주목할 만한 장면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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