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아슬아슬 명종?선조 교체기 중용의 재상 이준경, 과업 이루고 떠나다

166호 (2014년 1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재상 이준경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정치가였다. 특히 그는 2인자로서 권력 공백기와 리더 교체기를 성공적으로 관리했다. 그는 권력 교체기의 2인자답게 조직의 중심을 잡아주면서 매끄러운 권력 승계를 이끌어냈고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단호하면서도 신속하게 권력 공백을 메꿨다. 또 지난 리더십과의 결별, 구권력 숙청을 서두르기 쉬운 신임 리더가 단계를 밟아 권력을 강화하고 안정화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준경은 또한 새 리더십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새 리더에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물러나는 용단을 보였다. 현대사회의 조직이나 기업의 2인자에게도 시사점이 큰 부분이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국가의 주석(柱石)으로 의지하고 중히 여길 만한 신하로서 이 사람보다 훌륭한 이는 없을 것입니다.”

 

퇴계는 누구를 믿고 정치를 펼쳐가야 할지를 묻는 선조의 질문에 답하며 위와 같이 그를 평가했다.

 

남명 조식의 죽마고우이자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같은 대학자들의 절친한 벗이었으며 성수침(우계 성혼의 부친), 백인걸, 기대승의 존경과 지우를 받았다. 문하에 이원익, 정탁, 이항복, 이덕형, 심희수 등의 명재상들을 키워낸 이, 바로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얘기다.

 

재상 이준경의 파란만장한 삶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재상 이준경은 고려 말의 유학자 둔촌 이집의 후손이다. 집안은 대대로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는데 할아버지 이세좌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했다는 죄목으로 연산군에 의해 숙청되고 아버지 이수정도 함께 사사되면서 그는 6살의 어린 나이에 고난을 겪게 된다. 형 이윤경과 함께 유배를 간 것이다. 그러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풀려났고 1532 32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기 전까지는 주로 칩거하며 학문에 힘썼다. 과거 응시와 관직 진출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는데 연산군 집권기간과 중종조의 기묘사화 등 정치적 혼란 속에 그가 존경하고 가까이 했던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탄압받는 모습을 보면서 출사에 회의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그가 과거에 응시한 것은 모친의 간곡한 당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준경이 마주한 현실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척신 김안로의 공포정치가 횡행하고 있었다. 그는 기묘사화의 피해자들이 무죄라고 주장했다가 김안로의 눈 밖에 나 파직당한다. 그러자 그는 미련 없이 관직을 떠났고 5년간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가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한 것은 김안로가 사사된 1537년 이후부터다. 이조좌랑, 홍문관 부제학, 형조참판, 대사헌 등을 차례로 역임했는데 안타깝게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아끼는 조카이자 제자인 이중열이 사약을 받았고 우애가 깊던 종형들도 귀양지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때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경 자신도 외척 윤원형의 일파인 이기, 진복창 등의 모함으로 유배를 갔다. 원래는 더 큰 죄목을 뒤집어쓸 뻔했지만 중전의 할아버지이자 명망 있던 재상인 심연원이 적극 변호해줘 무사할 수 있었다.

 

몇 년 후 귀양에서 풀려난 이준경에게 명종은 각 조의 판서를 차례로 제수했다. 하지만 윤원형의 척신정치 아래에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때마다 그는 거듭 사직상소를 올린다. 다만 함경도 순변사가 돼 국경을 방어하는 일이나 호남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일 등은 기꺼이 맡았다. 국가적인 위기를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이준경은 전라도 순찰사로서 전주부윤으로 있던 형 이윤경과 함께 을묘왜란을 진압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후 그는 우의정과 좌의정에 보임됐고 1565년 윤원형의 몰락과 함께 영의정에 오른다.

 

강직한 성품으로 직언을 올리고 선비를 보호하며 국가안보에 기여하는 등 이준경이 세운 공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영의정이 되기 전까지는 사실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았다. 특히 판서에서 좌의정을 지내는 몇 년간은 재상으로서 윤원형과 함께 국정을 담당했기 때문에 도덕적 순수성 면에서 비난을 받을 소지도 있었다. 그러나 영의정이 되고 명종 후반기에서 선조 즉위 초기까지 국정을 총괄하면서 그는 명재상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조선조에서 전무후무했던 권력의 공백기를 매끄럽게 수습하고 별다른 충돌과 갈등 없이사림정치의 시대를 연 것은 그의 큰 공로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세 가지 사건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사건 1명종의 죽음

1567(명종22) 628일 삼경(三更).1 영의정 이준경은 명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대신들을 이끌고 황급히 경복궁 양심당(養心堂)으로 향했다. 그가 방 안에 들어서자 내관이 명종을 보며영의정이 입시(入侍)했으니 전교를 내리소서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명종이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으나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눈을 감는다. 이준경이 왕의 침상 아래로 다가가소신이 왔나이다. 전교를 주소서라고 거듭 아뢰었지만 굳게 닫힌 명종의 눈과 입은 더 이상 열릴 줄 몰랐다.

 

여기서전교란 후계자를 누구로 할지에 관한 임금의 지침을 말한다. 1563년 아들 순회세자가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한 이후 명종은 더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왕족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명종이 왕위계승자를 지명하지 않고 이대로 승하한다면누가 왕이 되느냐를 두고 정국의 혼란이 극심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이준경은 어떻게든 명종의 지시를 듣기 위해서 계속 전교를 내려달라고 간청했던 것이다.2

 

 

 

하지만 명종이 자신의 의사를 직접 표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 됐고 할 수 없이 이준경은 중전에게전하께서 전교를 내리지 못하시는데, 혹시 중전께 따로 당부하신 바는 없으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중전은지난 을축년에 글을 내린 바가 있었던 것을 경들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일대로 정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여기서을축년의 일이란 2년 전인 명종 20 9월의 사건을 말한다. 이때에도 명종의 병세가 매우 심각했는데, 당시 중전은덕흥군의 세째 아들 이균(李鈞)을 입시시켜 시약(侍藥)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 ‘시약이란 임금의 병간호를 담당하는 것으로 세자가 맡는 일이다. 유사시 하성군 이균에게 보위를 잇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명종은 의식불명이었다. 따라서 당시 이 조치가 명종의 뜻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중전의 독자적인 생각인지 알 수 없다.3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이 당시에주상께 아뢰고 결정하신 것입니까? 아직 아뢰지 않으셨다면 반드시 한 글자라도 전하의 친필을 받아 내리셔야 하옵니다라고 절차상의 문제를 확인하자 중전은만약 이 일을 전하께 아뢴다면 마음이 격동하여 증세가 더 나빠질 것이다. 우선 이렇게 결정하고 전하께서 회복하시면 그때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방금 국본에 대한 일을 아뢰려 했더니 전하의 마음이 몹시 동요하셔서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중전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명종은 쾌차하자마자 후계자 논의를 중단시켰는데 자신의 병중에 후계가 거론된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듬해 이준경은 다시금 명종에게종묘사직은 잠시라도 의지할 데가 없어서는 안 된다며 왕위 승계자를 정하라고 주청했다. 그는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아서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며 이 상태에서 만일 갑작스런 일이 닥치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서둘러 세자의 칭호를 내리실 것은 없고, 다만 종친 중에서 어진 이를 골라 궁궐로 불러들여 가까이에서 전하를 모시게 하고 법도를 익히게 하면 사람들이 모두 전하의 마음이 향하시는 바를 알게 돼 민심은 자연 안정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세자를 삼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한 것은 당시 명종의 나이가 젊은 편이어서 아들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궁궐로 불러들였던 종친은 다시 신하의 반열로 물러나게 하면 그뿐이니 걱정하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라며 이준경은 명종의 결단을 촉구했다. (명종21.10.15) 하지만 명종은내가 불민하여 어느 종실이 적합한지를 아직 판단하지 못하겠다며 거부한다. 그리고 1년 후, 여전히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있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보위를 이을 왕위계승자가 없다는 것. 이는 매우 심각한 위기상황이다. 리더의 부재는 결정과 책임의 공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집단의 미래가 흔들리는 것이며 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무한투쟁이 벌어질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와 비슷한 경우가 세 번이 더 있었는데 사안의 무게는 이때가 가장 엄중했다. 일찍이 예종도 세자를 정하지 않고 죽었지만 자신의 적자인 제안대군을 비롯해 형 의경세자의 적자들이 건재했고 대왕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가 중심을 잡아줬다. 훗날 헌종과 철종도 각기 후계자 없이 승하했지만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들이 있어서 차질 없이 왕위계승자를 지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달랐다. 명종뿐 아니라 선왕인 중종, 인종의 후손 중에 적통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고 왕위계승자를 지명해 줄 대비도 없었다.4 사상 최초로 방계 출신이, 그것도 전임자의 명시적인 후계자 지명 없이 보위에 오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중전의 선택이 있었다고는 하나 앞에서 볼 수 있듯이 명종의 의사와 합치된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자칫 왕권의 정통성이 뿌리째 흔들릴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정의 무게중심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준경이다. 그는 권력교체기 동안 국가사무를 차질 없이 처리했고 조정의 중론을 통일시켰다. 왕위계승에 개입하려 한 외척 권세가 심통원 등의 움직임을 단호히 차단하고, 즉위과정에서의 공을 내세우며 권력과 부귀를 탐한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그러면서 신속하면서도 법도에 맞게 새 왕의 즉위절차를 진행시켰다. 이때 그의 공로에 대해서는 이준경을 비판적으로 본 율곡 이이조차도왕위 계승이 겨우 정해지고 인심이 크게 안정된 것은 이준경이 일을 진압한 공로 때문이다. 만약 윤원형(尹元衡) 같은 무리가 나라를 맡고 있었다면 어떻게 지금처럼 조용할 수 있었겠는가5 라며 매우 높게 평가한다. 만약 이준경이 없었다면 조선은 큰 정치적 격랑에 휩싸였을 것이다.

 

사건 2신원(伸寃)과 삭훈(削勳)

새 정부가 출범하면 지난 정부의 잘잘못을 바로잡자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구세력을 억제하려는 목적과 함께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정지작업을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국정을 농단했던 척신정치가 종식되고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조선의 선비들은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명종의 거듭된 요청에도 꿈쩍하지 않던 이황이 조정에 출사했으며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이 등용되고 이이와 기대승 같은 촉망받는 신진 학자들도 정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때 퇴계를 불러들이고 백인걸을 중용하도록 한 이가 바로 이준경이다.) 사림이 조정을 장악한 것이다.

 

정국을 주도하게 된 사림은 최우선 과제로신원과 삭훈을 내세웠다. 을사사화로 원통하게 죽은 선비들을 복권하고 사리사욕으로 사화를 주도한 자들의 공훈을 삭제해 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준엄한 심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간악하고 사특한 무리들이 감히 공을 탐내어 사림을 참벌(斬伐)하였는데, 이들이 위훈에 기록되었으므로 하늘과 사람들이 울분에 쌓인 지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새로운 정치가 열리는 시기를 맞아 위훈을 삭제하여 명분을 바로 세움으로써 국시(國是)를 정립하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6 신원과 삭훈을 통해 올바름을 되찾고 명분을 바로잡음으로써 국가의 기강을 확립해야 한다는 이이의 이 말은 당시 사람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준경은 이러한 움직임에 일시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그 역시 을사사화로 인해 가까운 이들을 잃었고 본인 또한 고초를 겪은 바 있다. 사감을 내세운다면 당장이라도 신원과 삭훈을 밀어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세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이를 추진했다가는 반발을 불러오게 되고 나라는 혼란에 빠질 수도 있었다. 가뜩이나 정통성 문제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선조에게 즉위하자마자 선왕의 결정을 뒤집는다는 부담을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속도를 늦추고자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림의 급진파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권력 교체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신원과 삭훈을 통해 새 정권의 도덕적, 정치적 기반을 확립한 이준경은 그 해 71세의 나이로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선조 정권의 출범과 안정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이로서 더 이상 왕에게 부담이 되기 싫었던 것이다.

 

이준경은 단계적으로 일을 진행시켰다. 우선 조광조에게 시호와 관작을 추증하고 문묘에 종사하도록 상소를 올렸으며 조광조의 숙청을 주도했던 남곤의 관작을 삭탈하도록 했다. 을사사화보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선조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의 신원, 삭훈 문제부터 바로잡음으로써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선조 3, 이제 어느 정도 정국이 안정됐다고 판단한 그는잘잘못을 가리지 않은 채 선왕의 결정을 무조건 지키려 해서는 안 된다선왕의 잘못은 사왕(왕위를 이은 임금)이 개정하고, 사왕의 잘못은 후왕이 개정할 수 있어야 오래도록 국가의 맥을 이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왕의 결정을 바꾸는 일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선조에게 선왕의 잘못을 바로 잡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효도이고 국가의 만년대계를 위한 것임을 설득하며 을사사화에 대한 신원과 삭훈을 요청한 것이다. 이때 그가 올린 상소만 100여 차례였다고 한다.

 

신원과 삭훈은 억울함을 풀어주고 잘못을 징계하는 도덕적 차원에만 머무는 일이 아니다. 명분의 교체를 통해 기득권의 정당성을 부정함으로써 권력을 빼앗고 새로운 세력의 권력기반을 다지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력 간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며 자칫 잘못했다가는 역공의 빌미를 주게 된다. 시간을 두고 점진적인 접근을 선택한 이준경의 방식이 현명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다.

 

사건 3유차(遺箚)

권력 교체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신원과 삭훈을 통해 새 정권의 도덕적, 정치적 기반을 확립한 이준경은 같은 해 71세의 나이로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선조 정권의 출범과 안정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공신으로서 더 이상 선조에게 부담이 되기 싫었던 것이다. 그는 영중추부사의 명예직으로 있으면서 독서로 소일하며 지냈다. 그러다 1572년 여름.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그는 마지막 힘을 모두 쏟아내 유언상소, 유차를 지어 올린다. 의례적인 당부나 덕담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여기에 임금에게 남기는 충언과 함께 조정의 앞날에 대한 우려를 담았다.

 

 

 

이준경이 봤을 때 선조는 영특한 자질이 있긴 하지만언색이 까다로우며 아랫사람을 포용하고 겸손하게 대하는 자세가 부족했다. “사사건건(신하들의 단점과 허점을) 지적해 폭로하며 혼자만 높은 체하고 착한 체한다. 구성원들을 이끌어야 할 리더로서 결격사유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시급히 바로 잡지 않으면 임금 자신뿐 아니라 나라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이준경은 선조가학문과 수양공부에 힘쓰고 아랫사람을 위엄과 예의로 대함”으로써 이러한 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토대 위에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며 바른 정치를 펼쳐나가라는 것이다.

 

직설적이고 신랄한 비평이었지만 선조는 깊이 새기고 명심하겠다고 밝혔다. 국가에 큰 업적을 세웠고, 자신의 등극과 국정안정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원로대신의 마지막 당부 앞에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정이 벌집에 쏘인 듯 시끄러워졌다. 유차의 마지막 부분인붕당을 타파하라는 대목 때문이었다.

 

이준경은의견이 서로 같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고, 편당을 이루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당대의 풍조를 강력히 비판하고 이를 혁파하지 못하면 장차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환란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붕당 자체가 아니라 소인들에 의한 사사로운 붕당의 움직임을 경계한 것으로서 지극히 타당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상당수의 신하들이 반발했다. 붕당을 결성했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직 생생한 사림들로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준경의 문제의식과는 별도로 붕당의 죄를 명분으로 삼아 다시 사림을 위험에 빠트릴 세력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이이는 즉각 반박했다. 그는소인의 붕당은 용인해서는 안 되지만 군자의 붕당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지금은 오직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밖에 없다. 과거의 참화 속에서 겨우 몸을 보전하여 안정을 희구하는 대신들의 눈에는 젊은 선비들은 과격해 보이겠지만 마음은 다 같이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니 이를 이간질해서는 안 된다만일 정말로 사사로운 붕당의 조짐이 있다면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이 미리 그것을 제어하고 나쁜 싹을 끊어 버렸어야 했는데 왜 죽을 때가 돼서야 이런 말을 하여 분란을 일으키느냐고 비판한다. 극단적이고 모욕적인 어휘로 이준경을 공격하는 신하들도 나왔다.

 

이준경은 왜 죽음을 앞두고 이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었을까. 가만히 있었다면 국가의 최고 원로로서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준경은 영의정으로 재임하는 기간 내내 파당을 해체하고 신하들 간의 갈등과 분열을 봉합해 조정을 화합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특히 그가 우려했던 것은 젊은 선비들의 지나친 선명성 경쟁이었다. 훈구, 척신세력이라는 외부의 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지나친 선명성은 자신의 견해만 고집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수용하지 않는 도덕적 우월주의로 이어질 공산이 컸다. 더욱이 사림이 추구한 성리학의 유토피아적인 기획이 진정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초월한 화해의 비전을 제시해야 하며 현실 속에서 합리적으로 구현돼야 한다는 것이 이준경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도덕적 순수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라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날카롭게 일을 추진하고, 자신과 반대되는 생각은 무조건 악으로 몰아붙이며, 붕당을 지어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간다면 그것은 결국 나라에 더 큰 해를 끼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절박한 심정으로 유차를 남긴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준경의 이 예언은 불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7년 후, 이이는지금 사림이 화목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신은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동서 붕당이 큰 병의 근원이 되고 있으니 신이 깊이 근심하는 바입니다7 라고 고백하게 된다.

 

이준경은 왜 죽음을 앞두고 이런 논란을 불러일으켰을까. 가만히 있었다면 국가의 최고 원로로서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준경의 삶이 리더교체기의 2인자에게 주는 교훈

이상의 세 가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재상으로서 이준경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리더교체기의 2인자에게 주는 시사점이 크다. 흔히 리더의 공백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갑자기 찾아온다. 승계할 후계자가 미리 준비돼 있다 하더라도 연착륙하기까지 얼마간의 혼란이 계속될 것이다. 심지어 후계자가 없다면 그 자리를 놓고 조직 전체가 내분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 조직의 중심을 잡아주며 매끄러운 권력승계를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2인자의 책임이다.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단호하면서도 신속하게 권력교체기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 또한 새로운 리더가 출범한 초기에는 지난 체제의 문제점을 거론하고 구체제 인사들의 잘못을 문책함으로써 조직의 통제권을 강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구세력과 신세력이 충돌하고 안정론과 혁신론이 맞서며 갈등과 분열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 2인자는 이러한 대결 구도를 조율하며 조직을 위해 가장 합리적인 중용의 지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이 사명을 완수한 2인자는 새 리더 체제가 어느 정도 기틀을 갖추는 대로 물러날 필요가 있다.리더를 1인자의 자리에 옹립하고 리더십 안정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더라도 1인자에게 그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사람이다. 자신이 큰 신세를 졌기 때문에 심적인 부담감도 갖고 있다. 권력에서의 부담감은 선물이 아니라 칼날이 돼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으므로 차제에 미련 없이 퇴진함으로써 새 리더가 마음껏 자신만의 경영을 해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때 2인자의 퇴임사에 리더와 조직의 앞날에 대한 솔직한 조언과 당부를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a@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트위터에서 세종(@SejongDaeWang)과 정조(@King_Jeongjo)의 가상 계정을 운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저서로 트위터에 게재한 내용과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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