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임금과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정책적인 측면에서 임금의 의견을 보완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차원이 아니라 임금의 판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임금의 결정을 비판하려면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진정한 보수주의자이자 원칙주의자였던 중종 시기 재상 정광필은 자신의 안위나 1인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 전체를 위해 ‘극렬한 간쟁’을 했다. 직언을 넘어선 목숨을 건 ‘극간’은 1인자의 오판과 실수를 완벽하게 막지는 못했지만 ‘폭주’를 막았고 후대에 큰 교훈을 남겼다. 별다른 견제장치가 없는 CEO, 특히 오너 경영자들은 자신의 독단을 견제할 ‘극간하는 2인자’를 곁에 둬야 한다. 그리고 어느 조직이든 2인자는 기업 자체와 구성원 모두를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2인자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 ‘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마땅히 죽음으로써 극간1 한다(當以死極諫).”
“의로움을 따르는 것이지 임금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從義而不從君).”
구성원들을 지키고 공동체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설령 임금의 뜻을 거역하고 노여움을 사는 일일지라도 온 힘을 다해 직언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주 보이는 이 구절들은 신하된 자가 지켜야 할 도리이자 의무로 여겨졌다. ‘극간’의 상징적인 인물인 당 태종 때의 명재상 ‘위징(魏徵)’도 자주 언급됐는데 이 ‘극간’을 특히 재상의 주요한 책무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신하의 입장에서 임금과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리 관대하고 포용력이 있더라도 자신이 틀렸다고 얘기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데 이를 흔쾌히 수용하는 권력자는 드물다. 더욱이 면전에서 자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강력히 비판한다면 불쾌한 감정은 분노로까지 전이된다. ‘역린(逆鱗)’을 건드린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군주의 말 한마디에 개인뿐 아니라 가문의 안위까지 좌우되던 그 시대에 ‘극간’은 목숨을 걸어야 할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극간을 했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고난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간언을 하는 것이 신하의 의무라면 이를 경청하는 것은 임금의 의무였기에 임금에게는 “귀에 거슬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더라도 반드시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꾹 참고 즐거이 받아들여 칭찬으로 장려함으로써 직언하는 분위기를 북돋아주는”2 자세가 요구됐다. 극간하는 신하를 함부로 억누르거나 처벌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훌륭한 임금들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경지였고 간언을 하다가 임금의 눈 밖에 나서 알게 모르게 승진이 막히고 한직으로 밀려나며, 심하면 귀양을 가거나 모진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주저 없이 임금에게 ‘극간’한 신하들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은 의(義)로움을 지키겠다는 신념, 공동체와 구성원의 장래를 걱정한 충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번 회의 주인공인 정광필(鄭光弼, 1462∼1538)처럼 말이다.
진정한 보수주의자, 정광필
정광필은 1492년(성종23)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수찬, 교리, 직제학, 이조참의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연산군 때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언하다가 귀양을 갔는데 유배지에서 중종반정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는 종묘사직의 장래를 위한 큰 계책이로다”라고 평가하면서도 육류를 물리치며 “전 임금의 생사를 모르는데 고기를 입에 댈 수는 없다. 아래에서 그를 바르게 인도해주는 자가 없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슬프다”하였다고 한다.3
이후 그는 이조참판, 대사헌, 예조판서, 병조판서의 요직을 두루 거친다. 이 과정에서 전라도 도순찰사가 돼 삼포왜란(三浦倭亂)4 을 진압하는 등 무공도 세웠다. 이례적으로 종1품인데도 함경도 관찰사(종2품직)를 겸임하며 북쪽 국경을 책임졌으며 “장략(將略)5 이 있다” 또는 “지금 육경 중에 병사를 아는 것은 오직 신용개와 정광필뿐이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군사 업무에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정광필은 영의정이 돼서도 도체찰사를 겸임하며 국방을 관장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시대에 재상으로 활동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문신(文臣)이면서도 국경 방어를 맡고 군사를 지휘해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안보는 국가의 존립을 위한 중추로서 재상감이라고 생각된 사람이 향후 이 업무를 차질 없이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미리 현장 경험을 닦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오늘날 예비 CEO들을 기획, 인사, 재무 등 경영지원 업무뿐 아니라 야전인 영업 분야에도 순환근무를 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정광필은 중종 8년, 우의정이 됐고 11년에는 영의정으로 보임됐다. 중종반정의 주역이었던 성희안(成希顔)으로부터 “정광필은 소리 없을 때에 듣고 형체가 나타나기 전에 본다. 신용개(申用漑)6 같은 사람 백 명으로 정광필 한 사람과 바꿀 수 없다”는 강력한 추천을 받아 재상이 됐다고 한다. 재상으로서 그는 지나치게 남발됐던 공신(功臣)의 수를 줄이기 위해 힘썼고 중전의 자리를 노리던 후궁 경빈 박씨의 야욕을 강력한 반대로 좌절시켰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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