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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Management

사람들은 왜 극단적 주장에 끌릴까?

정현천 | 114호 (2012년 10월 Issue 1)

 

사극에 흔히 등장하는 장면 하나를 떠올려 보자. 여러 명의 적에게 쫓겨서 위험에 처한 검객이 있다. 그는 몸을 숨겨서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에는 서로 마주 보는 방향으로 두 개의 문이 나 있다. 방 안을 둘러본 검객은 한쪽 문을 잠그고 반대쪽 문 앞에 서서 적들이 오면 한칼에 베어버릴 자세를 취하며 숨을 몰아 쉰다. 이 검객은 과연 최선의 방비를 한 것일까? 그는 사실 이 건물의 구조를 잘 모르고 있다. 적들은 지붕을 뜯고 들어올 수도 있고, 잠갔다고 생각한 반대편 문은 밖에서 쉽게 열 수 있을지도 모르며, 견고할 것으로 생각했던 벽도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 검객이 등 쪽으로는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채 한쪽 문만 향해 적을 기다린다면 아주 어이없게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기업의 경영환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단순한 상황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국제곡물시장에서 밀을 사다가 밀가루를 만들어 국내에 파는 기업이 있다. 이 회사는 국내 시장에서 영업망도 튼튼하고 브랜드도 잘 알려져 있어서 오랫동안 거의 일정한 밀가루 판매가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수익성은 오로지 얼마나 값싸게 안정적으로 밀을 들여오느냐에 달려 있다. 마침 어느 국제곡물업자가 앞으로 1년 동안 아주 좋은 조건에 밀을 공급해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이 정도 조건이면 영업이익을 상당히 끌어올릴 수 있다. 제안받은 고정가격으로 1년치 밀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다른 모든 조건이 불변이고 밀의 매입가격이 이 회사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변수라면 당연히 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조건들이 불변이 아니라면 위에서 제시된 정보만으로는 살지 말지 결정할 수 없다. 만약 국제 곡물가격이 갑자기 폭락하면 안정적으로 유지돼 왔던 국내 밀가루 가격도 영향을 받아 폭락할 수 있으며 그 경우 이 회사는 적자를 면치 못한다. 밀가루에 대한 수요가 바뀔 수도 있고 밀가루를 만드는 공장 가동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회사는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변수들과 그 변수들 사이의 관계를 더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애플과 삼성의 소송이 주는 교훈

애플과 삼성의 소송이 화제다. 이 문제를 비슷한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죽기 전에 그의 전기작가 월터 아이잭슨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구글은 아이폰을 훔쳤다. 내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애플 계좌에 있는 400억 달러를 다 써서라도 이를 바로잡겠다. 안드로이드는 훔쳐간 장물이기 때문에 난 그걸 파괴하기 위해 핵전쟁을 벌일 것이다.” 삼성 스마트폰의 운영체제가 구글이 개발한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에 애플과 삼성 사이의 소송 전은 사실상 애플과 구글의 싸움이다. 스티브 잡스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구글과의 전쟁을 선포했을까? 단순히 구글이 막강한 경쟁자이기 때문에 구글을 무너뜨리는 것이 애플의 이익에 가장 부합한다고 본 것일까? 지금 시장에서는 미국의 1심 재판에서 애플이 승리한 것이 IT업계 전체의 혁신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애플의 혁신능력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시각이 많다. 왜 싸움에서 이긴 애플을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볼까? 애플의 수익성을 결정할 수 있는 요인은 안드로이드 진영과의 싸움의 승패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플 자신이 그동안 가꾸고 쌓아왔던 디자인과 감성을 중심으로 한 고객들과의 관계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애플이 안드로이드 진영과의 싸움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동안 애플의 경영진이 애플의 핵심가치를 잃어버리고 애플 내부의 문화가 변질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스티브 잡스가 전쟁을 선포한 것은 전쟁 자체보다도 디자인과 감성이라는 애플의 고유가치를 회사 내·외부에 천명하고 내부 구성원의 자부심과 외부 고객의 충성심을 끌어올리기 위한 고도로 계산된 연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의 후계자인 팀 쿡이 그 말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여 애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수준이 아니라 안드로이드 진영에 최대의 페널티를 뼈아프게 가하는 데 온 정력을 집중한다면 애플이 이기면 이길수록 애플의 미래는 어두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수비에 치중하고 특허와 소송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애플의 핵심가치에서의 우선순위를 바꾸고, 구성원들의 기질에도 영향을 미치며, 공급체계상의 협력업체들의 전망을 바꿔 혁신을 더디게 만들지도 모른다. 바뀐 애플의 이미지는 애플 제품이라면 무조건 열광하던 고객들의 선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이 DBR 102호에서 얘기한 것처럼아무리 철통같이 지켜도 병사들은 언젠가는 졸고 철조망에는 녹이 슨다. 최악의 약점은 고정 거점에 의지하는 순간, 우리의 전술과 행동방식도 고정되고 적에게 예측되는결과가 애플에도 일어날 수 있다. 싸움의 승패는 그것으로 최종적인 결과가 아니라 애플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다른 변수들에 되먹임돼 생각지 못한 방향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최선과 극단의 차이

최선을 다하는 것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다르다. 어떤 문제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관련된 모든 변수와 상황요인을 고려해서 최적의 결과가 나오도록 애쓰는 것이다. 문제에 대해서 1차원적으로 생각해서 오직 하나의 변수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답은 해당 변수의 한쪽 끝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선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보다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그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단순화해서 어떤 도그마에 빠지거나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고, 중간지대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그런 점에서 대부분의 극단주의는 복잡한 문제를 놓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결과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치적으로나 일상 생활에서조차 극단적인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많다. 조선시대의 오랜 당쟁과 6·25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거치면서 터득한 생존의 철칙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온건파를 자처하거나 확실하게 어느 한편에 위치하지 않고 중간을 선택한 사람들은 어느 쪽이 득세를 하더라도 항상 희생을 당했고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려 애쓰거나 중용을 취하려는 사람들은 회색분자의 오명을 뒤집어쓰는 와중에 50%의 확률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서도 계속 떨궈내기 싸움이 일어났기 때문에 선명성 경쟁이 계속됐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얘기다. 그러나 극단주의가 판치는 바람에 역사의 비극을 감수한 것은 한국만의 얘기는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왕정을 전복하고 새로운 정치체제인 공화정이 들어서게 했으며 이후 세계적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시발점이 됐던 대혁명의 시기에 극단주의가 판을 휩쓸었다. 혁명의 주도권을 쥔 로베스피에르는 극단적으로 혁명의 이상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혁명의 적으로 몰아 단두대로 보냈다. 그가 집권한 몇 년 동안 단두대에서 죽어간 이들만 17000여 명에 달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을 부르짖던 그 시기는 실상 기존 구체제보다 훨씬 폭압적이었고 살육과 폭력이 난무했던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도 반대파의 반란으로 체포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결국 또 다른 극단의 형태인 전제군주제를 부활시켜 나폴레옹에 의해 전 유럽을 피로 물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어디에서나 정치적 극단주의는 일시적으로 득세해 국민들을 현혹시킬 수 있어도 한 방향의 극단주의를 국민들은 결코 오랫동안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나 기업 안에서 또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서조차 극단주의가 횡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의 캐스 선스타인 교수는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에서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극단적 주장은 논지를 펴기 쉽다. 단순 명쾌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산뜻한 쾌감을 준다. 게다가 생각이 같은 집단 속에서 사람들은 더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동조자를 만나면 기쁘고 반대자를 만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내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안도감이 든다. 확신이 강해진다. 거기에 비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복잡하고 어렵다. 내용을 다 안다고 해도 그 내용을 다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결론에 대해서만 사람들의 동조를 끌어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복잡하게 얘기하면그래서 어쩌라고식의 반응이 나오기 십상이다. 그보다는 인정받고 싶고, 환호받고 싶고, 갈채받고 싶다. 그래서 이런 변수, 저런 조건 다 빼고 결론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을 찾는다. 한 가지 척도, 한 가지 변수로만 답을 찾고 나머지 변수들은 상수로 취급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답은 극단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극단주의는 정신적인 유약함과 나태함의 산물이다.

 

 

극단주의를 경계하라

기업이 단기 이익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태도도 일종의 극단주의다. 기업의 성장과 발전 또는 기업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 단기적 이익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좋은 척도가 된다. 그런데 단기적 이익을 쉽게 극대화하려면 종업원의 급여와 복리후생은 최대한 줄이고 교육훈련은 없애버리고, 공급업체는 최대한 쥐어짜고, 고객들로부터는 최소한의 서비스로 최대의 지출을 뽑아내면 된다. 요즘 이런 방안에 동의하는 경영자가 얼마나 될까? 단기 이익과 장기 성장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성장, 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의사결정을 단기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선택하는 경영자를 적지 않게 본다. 그 외에도 미래에 닥칠 수 있는 환경적 위험을 평가하는 태도에서도 극단주의적인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개 위험이 닥친 후 그것에 대해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크게 후회하고 반성한다. 그렇지만 위험에 과도하게 대비한 것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위험에 대비한다는 것은 사실 자원을 동원하고, 비용을 쓰고, 때로는 미래 성장동력의 상실을 감수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경고한 위험이 닥치지 않으면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반성의 필요를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실제로 위험이 닥치면그것 봐라하면서 가장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 공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역할과 책임 또는 보상의 불균형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위험을 제대로 평가하고 대비하려는 노력이 동기를 부여받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위험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가올 위험에 대해 더욱 정확한 평가를 하고 최선의 대비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극단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목소리가 아무리 높아도 사실은 유약하고 나태함을 감추고 있는 반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은 목소리는 나지막할지 모르나 용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런 사람들을 다양하게 모으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이 절실한 시기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1986 SK그룹에 입사해 회계, 국제금융, 투자가 관리, 구조조정, 해외사업, 전략수립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는 SK에너지 상무로 근무 중이다.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인류학, 역사 등 여러 분야의 책을 가리지 않고 읽는 다독가(多讀家)이며 변화 추진을 위한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포용을 주제로 한 <나는 왜 사라지고 있을까>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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