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d Management
소수, 생존을 지속할 보물을 담고 있는 창고지기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은 “결국 살아남는 것은 가장 강하거나 지능이 높은 종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다”라고 말했다. 극단적인 예로 생물들이 빙하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생각해보자. 빙하기를 잘 견디고 살아남는 능력은 간빙기에 살아가는 생물 종의 입장에서 볼 때 정상적인 성질이 아니다. 이를 테면 신진대사를 최소화한다든지, 체액이 얼지 않도록 하는 능력은 아주 특이한 소수가 가진 기이한 능력이다. 그러나 그런 소수가 있었기에 다시 찾아오는 혹심한 빙하기에 그 생물종이 유지되고 살아남을 수 있다. 이 특이한 소수들이 간빙기에 포용되지 못하고 도중에 사라져버렸다면 새로운 빙하기가 왔을 때 전체 종이 사라질 수도 있다.
생물 개체의 생존기간보다 환경변화의 사이클이 훨씬 길다면, 하나의 개체가 환경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보유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집단마다 서로 다른 능력들을 조금씩 나누어 가지고 가면서 후세에 계속 전해준다. 일종의 역사적 분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누어 가진 능력으로 인해 일부 개체는 특이한 소수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괴짜, 소수, 마이너리티들은 사실 전체 집단의 생존을 지속시켜줄 보물을 담고 있는 창고지기들이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나의 생존과 번성을 지켜줄 보물들을 ‘남’들이 갖고 있다는 얘기다. 다르다는 것, 차이가 있다는 것은 내가 갖지 못한 소중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의미여서 함부로 무시하고 내버려서는 안 된다. 그런 관점에서 포용하는 능력은 생존하고 번성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잠깐 동안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손대대로 잘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바로 포용이다.
순수는 비극을 초래한다
우리 사회에서 순수를 추구하는 일은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자. 순수함이란 어떤 상태인가? 자연상태에서 순수한 물질들은 희소하기도 하거니와 사실 생명체들에 위협적 요인이다. 물도 무기질이 전혀 함유되지 않은 순수한 증류수는 인체에 흡수되면 소화기 세포에 장애를 일으킨다. 질소에 의해 희석되지 않은 순수한 산소도 마찬가지로 호흡기에 장애를 일으키고 생명을 위협한다. 순수한 상태의 가벼운 금속원소들은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으면 항상 폭발의 위험을 안고 있으며 무거운 원소들은 핵분열을 통해 주변에 방사능을 퍼뜨리고 무시무시한 피해를 준다.
인간세계에서도 순수함을 추구하는 활동은 대부분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좋지 않은 결과를 낳곤 한다. 순수를 추구하는 것은 사실 편을 가르는 일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원래 한 뿌리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편을 갈라 적대감과 반목을 키운 일이 많았다. 그로 인해 전쟁과 파괴와 대량살상이 초래됐다. 그 외에도 왕실의 순수한 피를 지킨다는 이유로 근친결혼을 반복해서 생긴 왕가 친족의 유전적 결함, 그로 인해 군주와 왕국의 역사가 뒤틀리고 혼란스러워진 사례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또 아리안계 순수 혈통을 추구한다면서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은 순수성과 잔혹성이 얼마나 쉽게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포용에는 고통이 따른다
포용이라는 단어의 뜻을 좀 더 살펴보자. 사실 포용은 의무교육을 마친 수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포용이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자기와 같거나 비슷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을 억지로 같게 만들어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포용의 진정한 의미다.
한자를 살펴보자. 包는 ‘쌀 포’ 또는 ‘꾸러미 포’로 읽는데 윗부분(
容은 ‘얼굴 용’으로 읽는데, 큰 집을 뜻하는 갓머리(
이렇게 만들어진 포용이라는 단어는 비슷한 뜻이지만 사람의 품성을 강조하는 관용(寬容)에 비해 행위와 그 결과를 강조한다. 여기에 부합하는 영어 단어로는 ‘Tolerance’를 찾을 수 있다. 어원적으로 ‘견디다, 참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Tolerare에서 유래된 Tolerance는 ‘고통이나 역경을 견디는 능력’과 ‘자기와는 다른 믿음이나 행동을 비난하거나 벌하지 않고 허용하는 태도’의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고통은 주로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나의 경계를 침입하여 뚫고 들어올 때 생긴다. 그런 고통을 주는 존재를 배척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견뎌내는 것이 바로 Tolerance이다. 고통을 견디며 뱃속의 아기를 키워내는 엄마의 노고가 Tolerance, 즉 포용의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극적인 사례다.
포용, 유연하면서도 가장 적극적인 관계 맺음
세상 만물은 모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것들과 함께 존재하고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어떻게든 관계를 맺는다. 그 관계는 일방적으로 한쪽이 잡아 먹고 다른 쪽은 잡아 먹히는 착취-피착취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 먹고 먹힘을 반복하면서 끝없이 원한과 복수를 쌓아가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적당한 도움을 주고 받으며 공생하되 끝내 더 이상 가까워지지는 않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서로 가까워져서 하나가 되더라도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흡수해버리는 관계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포용은 그런 여러 가지 ‘관계 맺음’의 방식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포용은 다른 ‘관계 맺음’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포용의 ‘관계 맺음’을 하게 되면 내 자신이 원래의 모습에서 바뀐다는 것이다. 전에 존재했던 나와는 다른, 좀 더 확장된 존재로 거듭 태어난다. 그 결과가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서 그렇게 변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방식의 ‘관계 맺음’에 비해 포용이 훨씬 더 어려운 이유다.
포용은 요즘 어떤 보험회사의 광고처럼 옳거나 그르거나, 같거나 다르거나, 맞거나 틀리거나,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제멋대로 놔둔다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덮어두는 것은 포용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포용이라기보다 무시에 가까운 태도다. 오히려 포용에서는 ‘차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중요하다. 차이를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 때문에 어떤 차별대우를 하지 않는 것이며, 차이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되 그 자체에서 무엇인가 발현하기를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포용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가장 유연하면서도 가장 적극적인 ‘관계 맺음’의 방식이다.
사실 다르다는 것, 즉 차이는 긴장과 불편을 낳는다. 같은 종류끼리 모여 있으면 서로 익숙하기 때문에 훨씬 편하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기 빙하기가 찾아오듯 환경이 변한다는 점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환경의 변화가 잦고 그 규모가 큰 상황에서는 다양하고 유연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포용은 다양하고 유연한 해결책을 제공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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