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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적 성과주의 도입한 18세기 일본

배노조 | 23호 (2008년 12월 Issue 2)
18세기 일본 인사제도, 성과주의의 시초
최근의 기업 인사 체계를 살펴보면 인재의 능력에 기초한 성과주의 제도가 더 이상 낯선 풍토가 아니다.
 
과거 서열과 연공 중심에서 탈피한 직무 중심의 직급제도, 성과 중심의 보상제도, 목표 관리를 통한 평가제도 등 다양한 차원의 성과주의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 능력주의 인사제도가 시행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본은 1990년대 버블경제가 붕괴한 뒤, 한국에서는 1998년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기업들이 체질 개선 및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성과주의를 도입했다.
 
그런데 이 성과주의 인사제도가 18세기 일본 에도시대에도 존재했다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당시의 인사제도는 현재의 인사제도보다 오히려 더욱 혁신적인 부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를 우리의 인사제도와 비교해 보자.
 
新사회, 상인층의 당면과제
16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에도시대가 중기에 접어들자 일본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에도시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적 신분제도가 확고했으며, ‘사’에 해당하는 무사 계층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화폐경제 발달로 새로운 권력층이 대두했다. 그들이 바로 ‘상’에 해당하는 상인 집단이었다. 이들은 신흥 권력층으로서 자신의 세를 과시하려는 욕망과 무사 집단과는 차별화한 자신만의 강점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가훈과 가법 같은 것을 만들어 무사 집단을 모방하는 한편 무사집단의 비합리성을 개선하기 위해 고심했다.
 
17세기 일본 사회는 활발한 기술 혁신과 산업 혁명의 싹이 트던 시기였다. 상인들은 무사 중심 사회의 절대적 질서이자 관습이던 연공 중심의 인사제도로는 급변하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상점은 계속 커지고 종업원 수는 늘어나는데 나이나 서열 중심으로 인재를 활용하면 조직의 활력이 떨어질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인사 제도를 능력주의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중대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에도시대 인사제도의 특징
이런 이유로 등장한 에도시대 인사제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직급별로 다른 평가 기준을 적용했다. 하위 직급은 기존처럼 연공에 의해 관리하되 책임자급이나 간부들은 능력과 성과로 평가하고 등용했다. 직급에 따라 필요한 업무 능력이 다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위 직급이 하는 일은 대부분 잡무였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크게 좌우되기보다는 경험이 쌓이면 누구나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능력보다는 성실한 근무 태도와 인간성이 중요했다.
 
반면에 상위 직급의 업무는 완전히 달랐다. 개인의 능력과 성과에 따라 상점의 수익도 확연히 달라졌기에 그들을 평가할 때는 능력과 성과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조직의 긴장과 활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인재 등용뿐 아니라 급여 배분, 능력 개발, 점장 교체 등 다방면에 걸쳐 인사평가가 이뤄졌다.
 
두 번째, 직원들의 능력 개발을 위해 직무능력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신기술이 넘쳐나고 사회 변화 속도가 빠른 에도 시대에는 주인부터 말단 직원까지 그 사회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시급했다. 상점 임직원 모두에게 도전 의식, 유연한 발상, 새로운 기술에 대한 숙련도 향상 등이 당면 과제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상인들은 부문별로 필요한 직무 능력을 세부적으로 명시한 기준을 작성했다. 예를 들어 말단 직원은 주판 능력, 중간 관리자는 계수 관리 능력과 시장 파악 능력, 지배인은 점포 경영 능력 등 구체적인 직무 역량을 정의하고 이에 근거해 직무 평가를 단행했다. 이러한 역량 수준 평가에 대한 평가자의 왜곡을 막기 위해 다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평가 위원회를 운영할 정도로 평가 공정성에도 신경을 썼다.

세 번째, 핵심 인재의 외부 채용 및 능력 개발 개념을 도입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자 대규모 상인 집단은 기존 사업의 영역을 확장해 새로운 사업 영역으로 진출할 필요성을 느낀다. 사농공상의 무사 중심 사회에서 절대적이던 신분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 혁신과 신사업 진출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굴지의 재벌로 성장한 스미토모 가문 같은 상인 집단은 과거와 같은 연공서열 방식으로는 시대가 요구하는 혁신에 대응할 수 없음을 가장 먼저 깨달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순혈주의 전통을 깨고 핵심 인재를 외부에서 적극 채용했다. 오늘날의 핵심 인재 채용 및 역량 평가와 유사한 개념이다.
 
인사제도, 정답은 없다
현대 성과주의와 유사한 인사제도가 이미 에도시대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고 놀랍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왜 일본은 이런 합리적인 인사제도를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는데도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연공 중심의 인사제도를 운용한 것일까.
 
답은 근대 일본의 사회적 배경에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줄곧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해 왔다. 이에 개개인의 기본적인 시민권보다 획일적·통제적 사회체제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개인의 능력이나 성과에 따른 차별적인 시스템보다 공통적이고 획일적인 시스템이 더욱 필요했다. 결국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이’ 중심의 시스템으로 사회 전체가 변화한 것이다.
 
기업의 인사제도에는 정답이 없다. 인간이 제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사 제도의 효과성은 각각의 기업이 처한 환경에서 얼마나 최적의 효과를 낼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결국 에도시대의 능력주의와 그 이후의 연공주의 인사제도 모두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다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에도시대 상인 집단이 기술 및 사회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해답을 인사제도에서 찾고자 한 지혜는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현재 각 회사의 인사제도가 급변하는 환경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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