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인재관리 전략

세종, 조선의 최고 학습책임자

23호 (2008년 12월 Issue 2)

영혼이 있는 정치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국가 경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경영 철학 외에도 이를 실행할 창조적인 인재가 필요하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세종의 인재관은 여기서 출발한다.
 
세종은 1397년 4월 10일(음력)에 태어났다. 중국명 왕조가 들어서고 28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대륙의 패권을 놓고 벌인 원·명 왕조 교체는 동북아 정세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원이 광대한 세계 제국을 통해 조성한 국제화 이념이 명의 한족 중심 가치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패권이 바뀐 시점에 조선은 건국 이념을 국가 경영에 반영해 부흥을 이끌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세종이 다방면에 걸쳐 훌륭한 치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지도력과 결단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정치 철학을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를 발굴, 육성했기 때문이다.
 
擇賢의 가치로 수많은 인재 불러모아
세종의 인재에 대한 시각은 위정재인(爲政在人)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일대의 정치가 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대의 영재(英才)가 있어야 한다”(세종실록 6년 7월 갑신)는 것이다. 세종의 이런 생각과 인재 육성 노력은 신생 조선의 활력소로 작용했다. 국왕 스스로가 사람이 전부이자 희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기에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은 조선 왕조에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태종의 삼남인 세종이 어떻게 양녕대군을 제치고 후계자로 낙점 받았을까. 조선의 패러다임이 건국 초기 이념인 무(武)에서 문(文)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세종은 차기 지도자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건국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적 부채를 짊어 진 태종은 실행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실행’보다 ‘창조’의 가치가 떠오르면서 세종과 같은 경영자 상이 크게 부각됐다.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인물이자 전환기의 최고경영자(CEO)라는 역사적 책무가 세종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이를 오늘날 기업 경영에 비유하면 거대 기업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수장이 실행 중심의 잭 웰치에서 창조 중심의 제프리 이멜트로 바뀐 것과 비슷하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 국가 경영자로 뽑힌 스무 살의 세종은 주변의 핵심 측근들로부터 국가의 흥망(興亡), 군신(君臣)의 사정(邪正), 정교(政敎), 풍속(風俗), 외환(外患), 윤도(倫道) 등 유교 철학에 입각한 제왕학 수업을 혹독하게 받았다. 동시에 ‘택현(擇賢)’의 명분으로 왕위에 오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국의 수많은 인재를 불러 모은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변계량이다. 변계량은 현대 사회로 치면 HR 전문가로, 역사 속에 잠자고 있는 집현전을 현실 정치 세계로 다시 불러들인 인물이다. 인재의 요람이자 ‘현명한 자들을 모아 놓은 집’인 집현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세종시대 최대의 싱크탱크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자.
 
집현전과 경연의 역할
원래 집현전은 724년 당나라 황제 현종 때 만든 황립 학술기관의 이름이다. 집현전이라는 명칭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집현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고려 인종 때인 1136년부터다. 그러나 이 시기에 집현전의 활동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역사 속에 묻힌 집현전은 젊은 인재 집단이 절실히 필요하던 세종에 의해 부활했다. 역사에 두루 밝은 세종은 스스로 집현전이라는 이름을 찾아내고 자신의 가장 강력한 두뇌 집단으로 활용했다. 고제(古制)와 고전(古典)에서 ‘죽어 있는 신화’를 끄집어 내 리메이크하면서 지식 경영의 산실을 만든 셈이다.
 
국가 CEO가 될 무렵 세종은 스스로 질문했다. 국왕의 책무는 무엇인가. 나는 조선의 비전을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찾느냐에 따라 인재 발굴, 팀워크 확립 정책 등이 달라질 수 있었다.
 
여기서 세종은 현대 경영이 요구하는 ‘학습(learning)’이란 솔루션을 제시했다. 오늘날의 CEO 학습 과정이나 임원회의와 유사하며 국왕이 직접 참석하는 ‘경연(經筵)’은 이렇게 등장했다.

경연은 세종 재임 기간 내내 열렸다. 세종이 건강 문제로 이를 중단할 때까지 열린 경연의 횟수가 무려 1898회였다. 경연을 행한 횟수가 태조 때에는 7회, 정종 때는 30회, 태종 때는 12회였다고 하니 경연에 대한 세종의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가 얼마나 강력한 지식 정부의 성립을 추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세종은 스스로 제시한 학습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꾸준히 경연에 참석했다. 실록은 이를 이렇게 전한다. “임금으로 즉위해서 이른 새벽에 옷을 입고, 날이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살피고, 그 다음에 윤대하고, 그 다음 경연에 나갔는데 일찍부터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다.”(세종실록 32년 2월 17일)
 
경연의 학습은 성리대전, 자치통감, 사기, 한서 등 경(經)이나 사(史)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국가 경영에는 더욱 고차원적인 학습 수준이 필요했기 때문에 세종은 참석자들에게 하나의 전공에 ‘전경지학(專經之學)’, 즉 한 가지 경(經)이나 사(史)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이에 통달할 것을 지시했다.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질 때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집현전 학사들에게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이 주어졌다. 학사들은 빡빡한 일정관리를 통해 매일 각자가 읽고 연구한 범위를 장부에 기록하고 매달 말 보고해야 했다. 철저한 학습관리 시스템을 가동한 셈이다.
 
인재들의 안식년제 ‘사가독서’
건국한 지 얼마 안 된 조선 왕조를 부흥시키려는 계획에는 경(經)과 사(史)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대풍평(大豊平)의 세상을 열려면 다방면에 걸친 지식이 필요했다. 이에 세종이 변계량을 통해 기획한 것이 바로 ‘사가독서(賜暇讀書)’다.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한다’는 뜻의 사가독서는 현대의 안식년 제도와 유사하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 가운데 몇몇 젊은 학사들에게 근무를 면제하고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했다. 사가독서의 혜택을 처음 본 신하는 집현전 학사인 권채·신석견·남수문이었다. 변계량이 세종에게 이들을 추천하자 세종은 그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너희 젊은이들은 장래가 있으므로 지금부터 그 이름을 지우고 각기 집에서 독서하라”(세종실록 8년 12월 11일), 즉 장래에 크게 쓰이도록 자기 역량을 더욱 강화한 뒤 조정으로 복귀하라는 지시였다. 사가독서는 단순히 일 잘하는 사람에게 포상으로 주는 자기 공부를 위한 연수 과정이 아니었다. 성장 가능성 높은 인재에 대한 국가 차원의 투자였다. 또 신하들을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 창의적 방식으로 새로운 대안을 내도록 유도하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었다.
 
선택 받은 사람들만 누리는 독서 휴가였으므로 세종은 사가독서의 학습 성과를 철저히 관리했다. 세종은 이들이 특정 영역에서 전문성을 확보하면 이를 교육을 통해 널리 전파하고 국가 지식 경영의 무기로 활용했다.
 
세종은 사가독서의 성공을 확신했다. 실제 집현전 학사 가운데 사가독서의 혜택을 누린 이는 최항·신숙주·이석형·하위지·박팽년·성삼문·유성원·이개 등 쟁쟁한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의 후학으로 서거정·김수온·강희맹·이승소·성임 등도 대상자로 뽑혔다.
 
이들은 모두 앞날이 창창한 젊은 집현전 학사였다. 세종은 ‘경영=인재 관리’라고 생각했으며, 이들과 더불어 국가 비전 성취를 위한 경영에 나섰다.
 
세종이 발탁한 사람들은 큰 잠재력으로 창조 경영을 이끌 핵심 인재(HPI, High Potential Individual)였다. 신생 조선은 이들을 국가 경영에 필요한 멀티플레이어 또는 크로스오버형 인재로 키워나갔다. 따라서 이들은 창조 시대가 요구하는 학문의 전 분야, 즉 역사·지리·도덕·예의·천문·의학·운학·종교·농사·음악·문학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전문성을 쌓았다. 이들은 세종과 더불어 앞선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었다.
 
CEO의 인재 육성 의지가 최고의 인재 발굴법
세종은 자신의 비전을 실천해 줄 실무진을 강화하기 위해 인재 양성에 막대한 투자를 단행한다. 사가독서 외에도 신숙주·성삼문 등은 자주 해외 출장을 다녀왔으며, 장영실 등은 중국 유학 기회도 가졌다. 세종은 그들을 파견하는 이유가 과학 혁명을 앞당기기 위한 연구 개발에 있음을 강조했다.

연려실기술’은 세종의 인재 투자 노력을 이렇게 기록했다. “세종 3년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내감(內監)으로 불러 선기옥형(璇璣玉衡) 제도를 논란 강구하니 임금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장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에는 따를 자가 없다.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하고, 또 이르기를 ‘이들을 중국에 보낼 때에는 예부에 공문을 보내 역산학과 각종 천문 서책을 무역하고 보루각, 흠경각의 혼천의(渾天儀) 도식(圖式)을 견양(見樣)하여 가져오게 하라’하고 은냥(銀兩)과 물산(物産)을 많이 주었다.”
 
세종의 인재 육성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지원으로 신생 조선에는 뛰어난 인재가 급증했다. 세종과 더불어 창조 시대를 연 천재들인 장영실·정초·이천·남급·신숙주·박연 등은 다방면에 걸친 학습으로 국가 경영 전 분야의 지식을 섭렵한 대표적인 통섭형 인재로 성장했다. 이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세종은 새로운 시대의 문명을 창조한 성공한 국왕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집권 3년 째인 1420년 24살의 청년 CEO 세종은 신하들에게 조선의 비전을 설명하고 그들이 해야 할 책임, 의무, 보상체계를 자세히 설명했다. 조직 운영에 대한 지침도 발표했다. 젊은 피를 찾는 국왕과 새로운 세상을 열어 나갈 당찬 포부에 찬 인재들과의 만남은 역사적인 대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막대한 지원으로 ‘인재 시대’ 만들어
유독 세종 시대에 이토록 많은 인재가 나타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종의 탁월한 안목과 인재 중심의 인사 정책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탁월한 인물들의 기량을 알아보는 데 특히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세종 시대의 제안 및 천거제도는 신분이 낮은 장영실이라는 정보기술(IT) 분야의 숨은 보석을 발굴했다. 박연처럼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음재(音才)’도 탄생시켰다.
 
세종은 박연과 장영실이 자신과 같은 시대에 함께 태어난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거듭 밝혔다. ‘인재를 얻는 즐거움’은 인재들이 지닌 ‘국왕에 대한 흠모의 정’과 더불어 한 시대의 창조적인 역량을 드높이는 계기로 작용했다.
 
특별 관리 대상이 된 인재들에게는 두뇌 집단의 핵심 과제가 주어졌으며, 이들은 여러 프로젝트를 옮겨 다니며 두루 경험을 쌓았다. 이 인재들은 해당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인 동시에 국가 경영 전반에서 CEO를 보좌할 수 있는 광범위한 지식과 경험을 골고루 갖춘 제너럴리스트였다.
 
세종은 평범한 집단에서 인재를 찾아내고자 지방 발령을 받아 서울을 떠나려는 수령을 직접 대면하기도 했다. 자신을 대신해서 백성을 만나는 접점인 수령 중에 다시 가까이 불러들일 만한 귀중한 보석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세종은 능력주의에 근거해 철저하게 열린 인사 정책과 개방 정책을 활용했다.
 
원래 부산 동래현 관노였다가 세종 정부에서 파격적 대우로 종6품 상의원 별좌에 뽑힌 장영실을 보자. 그는 중국 유학을 통해 15세기 당시 세계에서 최첨단인 초정밀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측우기, 해시계, 대·소 간의대 등을 발명했다. 기타 기계, 건축, 과학 분야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이뤄낸다.
 
작곡 및 음악이론 정립, 악기 개발에 제작에까지 간여한 당대 최고의 음재(音才) 박연, 악학제조(樂學提調)를 통해 음악이론 분야를 세운 맹사성, 200여 가지나 되는 악기를 제작한 악기 제작 전문가 정양과 남급, 오늘날의 천문대 관장격인 윤사웅, 천문학자 이무림, 조선 최고의 수학자 이순지 등 수많은 인재가 이렇게 중앙 무대에 진출한다. ‘농사직설’을 집필해 조선 농업의 생산성 증대를 이끈 정초, 북방 6진을 개척한 김종서,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인재들은 마치 세종이 나타날 때를 기다렸다는 듯 솟아났다. 세종은 재능에 맞는 보직 배치와 경력 관리를 통해 최고의 인력관리 방법을 구현했다. ‘적재(適材)를 적소(適所)에 배치한다’는 용인과 합당한 보상 체계로 인재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자라났으며, 아낌없이 자기 능력을 발휘했다.

세종의 지극한 인재 사랑
세종의 인재에 대한 사랑은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지장’은 세종이 백성을 애민(愛民)하듯 말단 신하들에게까지 예를 갖추어 대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인재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집현전 소속 학사들에 대한 사랑은 극진했다.
 
용재총화’는 집현전 학사들이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므로 “내관으로 하여금 손님을 대하듯 하게 하였으니 그 우대하는 뜻이 지극했다”고 전할 정도다. ‘필원잡기’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세종이 인재를 기르는 데 탁월한 안목이 있었으니 그 어느 임금보다도 높고 빼어났다. 집현전 선비들은 번갈아 숙직했는데, 그들을 아끼고 대접함이 융숭하였으니 모두 영주(신선이 사는 곳)에 오른 것처럼 하였다. 어느 날 해가 저물고 밤이 되었는데 어린 내시에게 숙직하는 선비가 무엇을 하는가를 엿보게 하였다.
 
바야흐로 신숙주가 촛불을 켜놓고 글을 읽고 있었다. 내시가 돌아와 아뢰기를 ‘말씀대로 서너 번이나 가서 보아도 글 읽기를 끝내지 않다가 닭이 울자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돈피 갖옷을 벗어 그가 잠이 들 때를 기다려 그 위에 덮어주게 하였다. 신숙주가 아침에 일어나서 이 일을 알게 되었고, 선비들은 이 소문을 듣고 더욱 학문에 힘썼다.”
 
세종은 인재 중심의 사고로 철저히 무장하고 이를 실천한 몇 안 되는 국가 경영자였다. 세종의 인재에 대한 지극정성을 엿볼 수 있는 ‘연려실기술’의 일화는 언제 읽어도 심금을 울린다.
 
임금이 때때로 혼자 친히 첨성대에 임하여 윤사웅에게 명해 천도(天度)를 논하다가 술을 내려주고 파하였다. 임금은 천문관의 노력을 높게 평가해 윤사웅에게 벼슬을 높여 남양(南陽)을 제수했다.
 
이에 승정원은 ‘변변치 못한 벼슬아치들에게 하룻동안에 특명으로 네 고을 수령의 책임을 제수하오니 듣는 사람 중에 놀라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청컨대 속히 명을 도로 거두소서’하고 연일 두 번씩 아뢰었다.
 
그러나 임금은 ‘내 덕 없는 사람으로 참람히 임금의 자리에 올라 삼가고 부지런하지 못하였으므로 하늘의 꾸지람이 내렸는데, 오직 이 무리만이 여러 날 밤낮으로 몸에서 띠를 풀지 못하고, 눈을 붙이지 못하면서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였다. 혹시 이 무리가 아니었다면 내 결코 하늘의 천상(天象)에 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너희들이 편안히 앉아 잘 먹는 것에 비할 수 없으니 번거롭게 방해 말고 빨리 이들을 부임케 하라’고 명하였다.”
 
국왕이 인재를 사랑하고 극진히 여기자 세종 정부의 신하들은 자발적으로 학습하려는 의지에 불탔다.
 
어느 시대든 인재는 존재한다. 그러나 인재는 끌어올리지 않으면 땅 위가 아니라 땅 속으로 스며드는 물과 같다. 이를 땅 위로 끌어올리려면 CEO의 부단한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 세종의 집현전 운용, 임용 시험제도, 특별 발굴 및 추천제도, 상시면접제 등은 현대 사회의 CEO들도 참고할 만한 인재 발굴법이다.
 
특히 세종은 스스로 ‘인재 풀’의 일원이 되어 그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국왕의 모범적인 실천 때문에 신하들은 더욱 사명감에 불탔다. 세종은 인재들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지식으로 두뇌 강국을 만드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었다. 그 성과는 국가 경영의 전 영역에 걸쳐 고르게 나타났다. 인쇄, 농업 등 세종 시대의 전반적인 생산성은 고려 말과 비교할 때 300∼400%씩 증가했다.
 
세종은 취임 첫 해부터 마지막 해까지 시종일관 “초야에 은거한 사람 중 재주와 도(道)가 높은 자를 찾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는 인재에 대한 세종의 관심과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이런 국왕 앞에서 인재들은 허망하게 땅으로 스며들지 않았다. 대지를 흠뻑 적시며 솟아올라 한 시대를 넘어선 영원한 경영의 표본으로 세종과 함께 남았다.
 
세종이 다방면에 걸쳐 훌륭한 치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지도력과 결단력 때문만이 아니다. 철학 있는 정치를 실천하고, 모든 사고의 틀을 혁신시켰으며, 새로운 조선의 비전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깊고 융숭한 인덕(仁德)에 더해 인재에 대한 혜안까지 갖춘 국가 경영자 앞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던지지 않을 신하가 어디 있겠는가. 세종 시대의 창조 경영은 이렇게 꽃을 피웠고, 후세의 우리에게는 영원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현대의 경영자들 또한 ‘철학 있는 경영이 뭇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는 진리를 하루 속히 체득하기를 바란다.
 
필자는 미국 뉴욕시립대를 졸업했으며 야후코리아 총괄이사를 지냈다. 1999년 ‘세계의 문학’ 겨울호에 시 ‘눈 내리는 날’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창조의 CEO 세종> <광개토대왕 대륙을 경영하다> <평범한 직원이 회사를 살린다> <글로벌 CEO 누르하치> <진정한 성공을 위한 자기 경영>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18호 Dynamic Workspaces 2021년 04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