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있는 정치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국가 경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경영 철학 외에도 이를 실행할 창조적인 인재가 필요하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세종의 인재관은 여기서 출발한다.
세종은 1397년 4월 10일(음력)에 태어났다. 중국명 왕조가 들어서고 28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대륙의 패권을 놓고 벌인 원·명 왕조 교체는 동북아 정세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원이 광대한 세계 제국을 통해 조성한 국제화 이념이 명의 한족 중심 가치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패권이 바뀐 시점에 조선은 건국 이념을 국가 경영에 반영해 부흥을 이끌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세종이 다방면에 걸쳐 훌륭한 치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지도력과 결단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정치 철학을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를 발굴, 육성했기 때문이다.
擇賢의 가치로 수많은 인재 불러모아
세종의 인재에 대한 시각은 위정재인(爲政在人)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일대의 정치가 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대의 영재(英才)가 있어야 한다”(세종실록 6년 7월 갑신)는 것이다. 세종의 이런 생각과 인재 육성 노력은 신생 조선의 활력소로 작용했다. 국왕 스스로가 사람이 전부이자 희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기에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은 조선 왕조에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태종의 삼남인 세종이 어떻게 양녕대군을 제치고 후계자로 낙점 받았을까. 조선의 패러다임이 건국 초기 이념인 무(武)에서 문(文)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세종은 차기 지도자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건국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적 부채를 짊어 진 태종은 실행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실행’보다 ‘창조’의 가치가 떠오르면서 세종과 같은 경영자 상이 크게 부각됐다.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인물이자 전환기의 최고경영자(CEO)라는 역사적 책무가 세종의 어깨 위에 놓여 있었다. 이를 오늘날 기업 경영에 비유하면 거대 기업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수장이 실행 중심의 잭 웰치에서 창조 중심의 제프리 이멜트로 바뀐 것과 비슷하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 국가 경영자로 뽑힌 스무 살의 세종은 주변의 핵심 측근들로부터 국가의 흥망(興亡), 군신(君臣)의 사정(邪正), 정교(政敎), 풍속(風俗), 외환(外患), 윤도(倫道) 등 유교 철학에 입각한 제왕학 수업을 혹독하게 받았다. 동시에 ‘택현(擇賢)’의 명분으로 왕위에 오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국의 수많은 인재를 불러 모은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변계량이다. 변계량은 현대 사회로 치면 HR 전문가로, 역사 속에 잠자고 있는 집현전을 현실 정치 세계로 다시 불러들인 인물이다. 인재의 요람이자 ‘현명한 자들을 모아 놓은 집’인 집현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세종시대 최대의 싱크탱크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자.
집현전과 경연의 역할
원래 집현전은 724년 당나라 황제 현종 때 만든 황립 학술기관의 이름이다. 집현전이라는 명칭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집현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고려 인종 때인 1136년부터다. 그러나 이 시기에 집현전의 활동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역사 속에 묻힌 집현전은 젊은 인재 집단이 절실히 필요하던 세종에 의해 부활했다. 역사에 두루 밝은 세종은 스스로 집현전이라는 이름을 찾아내고 자신의 가장 강력한 두뇌 집단으로 활용했다. 고제(古制)와 고전(古典)에서 ‘죽어 있는 신화’를 끄집어 내 리메이크하면서 지식 경영의 산실을 만든 셈이다.
국가 CEO가 될 무렵 세종은 스스로 질문했다. 국왕의 책무는 무엇인가. 나는 조선의 비전을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찾느냐에 따라 인재 발굴, 팀워크 확립 정책 등이 달라질 수 있었다.
여기서 세종은 현대 경영이 요구하는 ‘학습(learning)’이란 솔루션을 제시했다. 오늘날의 CEO 학습 과정이나 임원회의와 유사하며 국왕이 직접 참석하는 ‘경연(經筵)’은 이렇게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