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경제 위기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일부는 “그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하고, 다른 일부는 “신기루일 뿐”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아직도 불확실성이 매우 높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경제 주체들은 갈 길을 잃고 복지부동하고 있다. 위정자들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하면서도, 그것이 ‘헛된 약속’이 되지 않을까 불안해 한다. 기업 경영자들 역시 경기 회복에 기대를 하면서도 안개 저편에 있을 것 같은 위험에 잔뜩 목을 움츠리고 있다. 하지만 이래서는 제대로 된 위기 극복이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지금과 같은 ‘확실한 불확실성’의 시기에 경영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은 ‘민첩하게, 동시에 제대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역량이다. 사람은 환경이 불확실하면 매사에 조심스러워진다. 조심스럽다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생각이 많으면 결정이 늦어진다. 그런데 아무리 제대로 된 결정을 하더라도 시기를 놓치면 소용이 없다. 요즘처럼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경영 환경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의사결정 당시 파악했던 정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즉 아무리 좋은 결정이라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정보에 기초한 것이라면 상황이 뒤바뀐 현실에서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경영 위기의 상황에서 발 빠른 변화야말로 생존을 위한 유일한 탈출구, 또는 지속 성장의 열쇠다
물론 속도에만 매몰돼 부실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공사 참사 등은 ‘제대로’를 무시하고 오직 ‘빨리빨리’만 강조한 결과다. 경영자들은 이 2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이 글에서는 내용(what) 측면인 ‘제대로’보다는 방법(how) 측면인 ‘민첩하게’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민첩함’이란 무엇이며, 기업과 경영자가 왜 민첩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민첩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를 조직의 시스템과 개인의 행동 차원에서 살펴보자.
먼저, 빨리, 그리고 제때
우선 짚고 넘어갈 포인트는 ‘민첩하다(agile)’와 ‘빠르다(fast)’는 다른 개념이라는 점이다. ‘민첩하다’는 것은 빠름은 물론 먼저, 제때에 한다는 뜻까지 포괄한다. 한때 ‘스피드 경영’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는데, 필자는 ‘민첩성 경영’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고 본다. 기업은 그저 빠른 게 아니라 민첩해야 한다.
먼저(first) 시장에서의 경쟁이란 남과 똑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다. 특히 기업 경영에서는 남보다 먼저 했다고 반칙이 아니다. 먼저 결정하고, 먼저 실행하면 앞서갈 수 있다.
지금 평판 TV와 휴대전화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선점 경쟁은 한 편의 기업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어느 기술을 따를 것이냐의 문제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기술과 제품의 로드맵은 이미 그려져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고객과 만날 수 있는가’다. 이는 필요한 자원의 동원 능력에 의해 판가름 난다.
인텔은 미국 산호세와 오리건에 동일한 규모의 ‘모델 개발 센터’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며 신제품을 개발한다. 산호세에서 차세대 모델을 개발하면, 오리건에서는 차차세대 모델을 개발하는 식이다. 통상 5, 6년 걸리는 ‘개발 기간’은 경쟁사와 큰 차이가 없지만, 두 곳에서 동시에 개발을 진행하다 보니 제품의 ‘출시 기간’은 3년에 불과하다. 인텔은 이 덕분에 경쟁사들보다 먼저 차세대 제품을 시판하고 스스로 세대 교체를 실행할 수 있다.
아메바 경영으로 유명한 일본 교세라는 매일 정오에 마감을 하여 저녁이면 전사적으로 집계가 끝나는 ‘일일 결산 정보 시스템’을 구축했다. 다음 날 경영자는 아메바 조직 단위별 경영 실적을 파악해 적절한 의사결정을 그때그때 내린다. 월별 결산해 한 달이 지난 후에야 반응하는 경쟁 업체는 속도 면에서 따라갈 수 없다.
빨리(fast) 남들은 열흘이나 걸리는 것을 단 하루 만에 처리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면, 남들보다 다소 늦게 시작했더라도 앞서갈 수 있다.
모토로라의 우주시스템사업본부는 중요한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전문 기능별로 부서를 구성하고 있어 의사결정을 할 때 여러 부서장들의 동의를 순차적으로 얻어야 했다. 각각의 부서장은 자기 분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려 했고, 전체 의사결정에는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의사 소통 자체에만 많은 시간이 들었고, 그에 따른 기회비용은 매우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