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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트윈’과 인공지능의 만남

가상 환경서 제조 설비를 AI 학습시켜
‘소프트웨어 기반 공장’이 제조업의 미래

장영재,정리=김윤진 | 404호 (2024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일반적인 인공지능 기술은 학습을 위해 과거부터 축적된 데이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신축 공장에는 과거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꼭 새로 지은 공장이 아니더라도 현대 제조산업의 특성상 생산하는 제품이 끊임없이 바뀌고 설비도 계속 진화하기 때문에 학습할 데이터가 없다. 이렇게 제조업에서는 과거 데이터가 부족하기에 디지털 트윈으로 현실을 모사한 환경을 만들어 가상 환경에서 로봇과 자동화 시스템을 학습시켜야 한다. 로봇과 자동화 시스템이 가상의 공장을 실제 공장인 듯 착각하고 마치 수년간 업무를 해온 것처럼 기억하도록 해야 최상의 운영 방안을 도출할 수 있다. 이미 디지털 트윈은 제조업의 제품 개발, 공장 구축, 공장 운영 등 여러 단계에서 활용되고 있다. 앞으로는 공장 내 거의 모든 업무가 디지털 트윈을 통해 수행되고 디지털 트윈에서 검증된 기능과 의사결정만이 실물 공장에 적용되는 단계까지 나아갈 것이다.



공상과학소설의 거장 필립 K. 딕의 작품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원작으로 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공상과학 장르에 새로운 지평을 연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는 인간과 거의 똑같이 생긴 ‘리플리컨트’라 불리는 복제인간들이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복제인간들은 처음부터 성인의 모습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인간처럼 성장 과정을 겪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이들 복제인간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상의 어린 시절 기억을 주입당해 마치 인간처럼 삶을 살아온 존재라는 착각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기억의 조작으로 인해 기계는 단순히 인간의 기능을 흉내 내는 것을 넘어 감정과 정체성까지 지니게 된다. 1982년 소개된 지 40년이 더 지난 이 영화는 오늘날 인공지능과 결합한 디지털 트윈 개념을 예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레이드 러너가 예견한 디지털 트윈이란 무엇일까? 기억의 조작과 디지털 트윈의 관계는 무엇이며 이러한 기술이 제조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제조 산업의 새로운 혁신을 주도하는 제조 디지털 트윈의 기술적, 산업적 의미를 설명하고 인공지능과 결합한 디지털 트윈이 만든 제조의 혁신적인 개념인 소프트웨어 기반의 제조(Software-Defined Factory, SDF)를 사례를 통해 소개한다.


디지털 트윈의 세 가지 구성 요소

디지털 트윈은 현실의 기계 장비나 공장 설비를 디지털 환경에서 정확히 시뮬레이션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통신을 통해 실제 장비나 설비의 움직임을 가상 시뮬레이션에 실시간으로 반영한다. 결과적으로 현실 세계의 대상과 가상 세계의 시뮬레이션이 마치 쌍둥이처럼 동일하게 작동하고 변화한다.

디지털 트윈의 초기 개념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처음 제안됐다. 그 역사는 1960년대 인류의 우주 탐사와 달 착륙을 목표로 한 아폴로 프로젝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주와 달이라는 환경은 인류가 아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NASA는 이러한 상상 속의 우주 환경을 과학 이론과 일부 수집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상 세계에 구축했다. 또한 실제 달 착륙선과 동일한 착륙선을 지상에 만들어 다양한 실험과 모의 훈련을 수행했다. 이는 현대 디지털 트윈 기술의 초기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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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의 모의 달 착륙선과 가상의 우주 환경은 인류가 최초로 달을 탐사한 아폴로 11호 미션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하지만 이러한 모의 가상 시스템이 가장 극적으로 그 효용을 발휘한 사례는 아폴로 13호의 미션이다. 아폴로 11호의 성공적인 달 착륙 이후 NASA는 여러 차례 후속 달 착륙 미션을 수행했는데 그중 하나가 아폴로 13호 미션이다. 선행 미션을 통해 경험치를 쌓아서 큰 무리 없이 진행될 탐사였지만 달 착륙 전 우주선의 연료탱크가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상황은 우주인들의 생명마저 위태로운 지경으로 치달았다.

아폴로 13호의 달 착륙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미션의 핵심은 우주선에 탑승한 우주인들의 무사 귀환으로 바뀌었다. 그 성패는 연료탱크 파손으로 인한 연료 부족과 일부 통신 및 구동 시스템의 파손이라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NASA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지상에 구축된 가상의 우주선이었다. 지상 관제팀은 가상의 우주선을 현재 연료탱크가 파손된 실제 우주선의 상황과 최대한 유사하게 설정했다. 남은 연료의 양, 파손된 시스템 상황, 현재 우주선의 위치와 궤도 등을 실제 우주선이 처한 상황 그대로 재현했다.

지상의 엔지니어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우주선이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긴급 대책 프로세스를 찾는 작업에 매달렸다. 그리고 지구 귀환 과정에서의 단계별 우주선의 항법 궤적, 적절한 연료 사용량, 우주인들의 역할 분담 등 수많은 시나리오를 사람들이 직접 시뮬레이션한 끝에 짧은 시간 안에 그 방안을 도출해냈다. 이런 노력으로 우주인들은 모두 무사히 지구로 귀환할 수 있었다. NASA는 아폴로 13호를 ‘성공한 실패(Successful Failure)’로 기록하며 가상과 모의 환경을 통한 의사결정 프로세스의 효용 및 연구개발 투자의 타당성을 역설하는 계기로 삼았다.1 이 사례는 현대의 디지털 트윈 기술이 어떻게 실제 상황에서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예시다.

디지털 트윈의 개념은 1960년대에 탄생했지만 그 개념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구체화됐다. 미국 미시간대의 마이클 그리브스 박사와 NASA의 존 빅커스 연구원은 디지털 트윈의 구성 요소 및 정의를 명확히 제시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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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학계에서는 다양한 논의를 거쳐 디지털 트윈의 요소3 를 [그림 2]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실물과 가상의 연동이다. 이는 실물을 모사한 가상 시스템이 실물과 실시간으로 연동돼 실물을 모사하는 개념이다. 앞서 설명한 아폴로 13호 사례에서도 예측하지 못한 연료탱크 파손이 발생했을 때 지상의 NASA 엔지니어들이 가장 먼저 수행한 작업은 실제 상황을 가상 환경과 모의 달 착륙선에 모사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센서나 통신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 사람이 직접 상황을 하나하나 모사하는 작업을 거쳤다. 그러나 현재는 센서, 통신, 데이터 처리를 통합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IoT 기술의 발전으로 현실과 가상 시스템을 거의 실시간으로 연동할 수 있다.

디지털 트윈의 두 번째 기술적 요소는 시뮬레이션이다. 사람이 의사결정을 할 때는 여러 대안을 떠올리고 각 대안에 따른 결과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이러한 특정 시나리오나 의사결정 사항에 대한 결과를 컴퓨터로 구현하는 것을 ‘컴퓨터 시뮬레이션’ 혹은 ‘디지털 시뮬레이션’이라고 한다.

‘컴퓨터’ ‘디지털’이란 단어를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시뮬레이션이 PC나 디지털 기술로만 구현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군사 모의 훈련도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즉 시뮬레이션이란 용어는 가상의 상황을 실제처럼 모사한다는 넓은 의미를 포괄한다. 다만 실제 훈련을 컴퓨터 모델과 데이터, 각종 디지털 기기로 대체한다는 의미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 혹은 디지털 시뮬레이션이라고 부른다. 이는 디지털 트윈 기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실제 물리적 대상의 행동을 가상 환경에서 예측하고 분석하는 데 사용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수많은 시나리오를 검토해 최선의 의사결정을 판단하는 최적화 기술이 디지털 트윈의 세 번째 요소다. 디지털 트윈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의 의사결정을 지원하거나 대체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아폴로 13호 사례에서도 NASA의 지상 엔지니어들은 파손된 우주선이 제한된 자원으로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는 우주선 운행 프로세스와 설비 설정을 결정해야 했다. 수많은 대안 중 가장 적합한 선택지를 지상에서 찾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정리하자면 디지털 트윈의 구성 요소는 다음 세 가지다:

1. 가상과 현실의 실시간 연동

2. 시뮬레이션

3. 의사결정 최적화

우리 실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디지털 트윈의 대표적인 예는 자동차 내비게이션이다. 차량의 실시간 GPS 정보를 기반으로 실제 위치가 실시간 교통 정보와 함께 가상의 지도에 표시된다. 가상과 실물이 연동돼 있는 것이다. 또한 내비게이션은 수많은 대안을 기반으로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특정 구간으로 주행하면 요금이 발생하고, 특정 도로로 우회하면 도착 시간이 늘어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이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해 대안을 제시하는 시뮬레이션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내비게이션은 목적지까지 도달할 최적의 경로를 제시해 운전자의 의사결정을 최적화해 준다. 이처럼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디지털 트윈의 세 가지 구성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좋은 예다.


제조 디지털 트윈의 세 가지 활용 영역

제조업에서 디지털 트윈은 제품 개발, 공장 구축, 공장 운영 등에 활용될 수 있다. 첫 번째 제품 개발 단계에서는 목표한 제품의 기능과 사양을 충족하기 위한 다양한 설계안을 제안하고 검토하는 데 유용하다. 특히 디지털 트윈은 제품 개발과 양산 단계의 중간 가교 역할을 한다. 가상으로 설계된 공장에서 개발된 제품을 제조할 때 가공이나 성형 같은 제조 프로세스에 리스크가 없는지, 제품 기획 단계에서 고려하지 못한 양산 시 문제점은 없는지 점검하는 데 디지털 트윈이 활용된다. 제품 단계의 설계와 양산 단계의 운영이 서로 어긋남이 없는지를 판단하는 도구인 셈이다.

두 번째는 실제 공장의 구축 단계다. 공장에서 장비를 어떻게 배치할지, 공장의 운영 스케줄을 어떻게 가져갈지, 재고와 재공(Work-in-progress Inventory)4 은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 어떤 설비와 장비를 구축할지 등 수많은 대안을 검토하고 분석하는 데 디지털 트윈이 활용된다. 공장 설계란 것이 단순히 장비를 배치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조 IT 시스템의 설계, 물류 시스템의 설계, 운영안을 마련하는 일련의 모든 작업을 의미한다. 또한 공장 구축 시 각 설비들의 통합 연동에서 문제가 없는지를 가상 환경에서 테스트할 때도 유용할 수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이 배터리 제조 공장에 실제 물류 로봇을 배치하기 전에 디지털 트윈 공장을 사전에 구축하고 이 가상 공장과 실제 물류 로봇, 제조 IT시스템, 설비 데이터를 연동해 가상의 시스템에서 테스트한 사례가 대표적이다.5

실제 현장에서 로봇, 설비, 제조 IT 시스템을 통합하다 문제가 발생하면 현장에서 조치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해외 공장을 구축할 경우 현장 셋업에서 문제가 생기면 한국에 있는 담당 엔지니어가 직접 조치를 취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실제 공장에서 통합 작업을 수행하기 전 디지털 트윈으로 구축한 공장에서 상호 연동 테스트를 진행하면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사전에 파악하고 개발 구축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그림 3]은 로봇이 실제 공장 현장이 아닌 제조사에 설치돼 있지만 디지털 트윈 가상 공장을 통해 제조 IT 시스템과 연동된 채 최종 테스트를 수행하고 있는 장면이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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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제조 디지털 트윈이 가장 많이 활용되는 분야는 공장 운영이다. 공장 운영은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상황에 대처하는 기술이다. 아폴로 13호의 사례에서도 연료탱크 폭발이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NASA는 이를 가상의 환경과 모사된 우주선을 활용해 해결했다. 기계의 고장, 갑작스런 긴급 주문이나 물량 취소, 원부자재 가격 변동 등의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수시로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목표 생산과 운영 효율을 높이는 것이 공장 운영의 핵심이다. 그러려면 임의로 대처하기보다는 디지털 트윈을 통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사전에 점검해서 적절한 방안을 체계적으로 마련하는 프로세스를 마련해 둬야 한다. 이 프로세스의 핵심이 바로 디지털 트윈이다. 이미 국내 대부분의 글로벌 제조 기업들은 생산 계획, 물류 관리, 재고 관리 등 제조 운영에서 다양한 운영 시나리오를 사전에 디지털 트윈을 통해 최종 점검하는 프로세스를 두고 있다. 여기서 나아가 시나리오 자체도 사람이 설정하지 않고 최적의 시나리오나 의사결정을 자동으로 수행하는 인공지능을 결합한 디지털 트윈을 도입하는 중이다.


디지털 트윈과 인공지능의 만남

일반적인 인공지능 기술은 학습을 위해 과거 축적된 데이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신축되는 공장의 경우 과거 데이터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신축 공장에서 지속적으로 데이터를 축적한다 해도 실제 인공지능 기술에 활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현대 제조산업의 특성상 생산하는 제품이 끊임없이 바뀌고, 공장은 계속 진화하기 때문에 오늘의 공장은 어제의 공장과 다르다. 제조업에서 전통적인 과거 데이터 학습 기반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는 이유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제조 디지털 트윈이다. 디지털 트윈으로 현실을 모사한 환경을 만들고 가상 환경에서 로봇과 자동화 시스템을 인공지능으로 학습시킨다. 로봇과 자동화 시스템은 가상의 공장을 실제 공장인 듯 학습하고 마치 수년간 업무를 해온 것처럼 착각하며 최상의 운영 방안을 도출한다. 앞에 언급한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처럼 가상 환경에서의 운영이 마치 실제인 양 기억을 축적하는 것이다. 즉, 이제는 디지털 트윈에서 가상의 기억을 만들어 마치 현실에서 생성된 데이터인 것처럼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게 가능해졌다. 더욱이 디지털 트윈의 시뮬레이션은 실제 시스템의 시간을 가속할 수 있어 몇 달 분량의 학습도 단 몇 분 안에 수행할 수 있게 해준다. 마치 알파고 제로가 과거 데이터 학습 없이도 가상 환경에서 대국을 통해 바둑 지능을 고도화한 원리와 유사하다. 디지털 트윈이 일종의 데이터 생성기 역할을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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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생산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에서 즉시 의사결정을 지원할 때에도 디지털 트윈과 인공지능이 함께 활용된다. 공장 현장에서 과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계 고장이나 화재가 발생한 경우에도 가상의 시나리오를 즉시 시뮬레이션해 인공지능을 학습시킬 수 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상황에서도 인공지능이 디지털 트윈을 통해 생성한 미래의 시나리오를 학습해 의사결정을 지원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공장 물류 자동화에서 이런 디지털 트윈과 인공지능을 결합했을 때 탁월한 성과를 도출할 수 있음을 카이스트 연구진이 밝혀낸 바 있다. 최근 반도체나 평판 디스플레이와 같은 전통적인 첨단 제조는 물론이고 전기차 및 2차 전지 생산과 같은 급성장 중인 제조 공장에서도 수많은 로봇이 공장 내 물류 반송을 담당한다. 특히 반도체 공장의 경우 많게는 1000대의 로봇이 장비와 장비 사이 물류 반송을 맡고 있다.

기존 약 100대 규모의 로봇 운영에는 사람이 일일이 로봇의 작업 규칙을 프로그래밍해 로봇에 작업을 할당하는 것도 가능했다. 사람이 규칙(rule)을 만들고 주어진 규칙 안에서 작업을 진행하도록 하던 방식이 초기 자동화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카이스트 연구진이 개발한 방식은 이와 다르다. 로봇들이 협업하면서 어떤 로봇이 어떤 작업을 어떻게 수행할지 자율적으로 판단한다. 디지털 트윈을 통해 현 공장 상황을 인지하고 이를 강화 학습(reinforcement learning)으로 신속히 학습해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린다.

강화 학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두발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이런저런 방식으로 조작을 하면서 넘어지지 않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처음에는 몇 번 넘어지고 조작이 서툴더라도 이런 경험이 축적되면서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다. 일종의 시행착오(trial-and-error) 방식의 학습이다. 디지털 트윈을 통해 실제 상황에서 경험하지 않아도 디지털 트윈의 가상 환경에서 수많은 시나리오를 신속히 구현해 학습한 후 단시간에 현장 상황에 맞는 최적의 판단을 내린다.

이러한 방식이 특히 사전 예측이 어려운 대규모 로봇의 군집 제어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실증적으로도 검증됐다. 특히 1000대 이상의 로봇이 작업하는 상황에서는 물류 이동 혼잡이 발생하지 않도록 경로를 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기계 고장이나 로봇의 이상이 발생해 물류 반송이 정체돼도 이를 능동적으로 실시간으로 파악해 혼잡을 막아야 한다.

가령 교통 상황에 비유해 로봇 간 갑작스런 교통사고가 발생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상황을 예측하기보다는 실제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바로 인지한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게 중요하다. 디지털 트윈은 이런 교통사고 상황을 연출해 해당 시나리오에서의 인공지능을 학습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강화 학습을 통해 신속히 어떤 우회로로 운전하는 것이 최선일지를 판단해줄 수 있다. 이렇게 인공지능과 결합한 디지털 트윈 기술은 이미 사업화가 돼 포스코 물류 시스템을 비롯한 국내 반도체 및 2차 전지 기업에 활용되고 있다.


소프트웨어 기반 공장(SDF)의 미래

애플의 아이폰이 출시되기 전의 휴대폰 기능은 제품에 고정돼 있었다. 새로운 기능이나 업데이트가 자동으로 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기 위해서는 기능이 구현된 새로운 휴대폰으로 기기 자체를 바꿔야 가능했다. 그러나 아이폰은 앱스토어 소프트웨어를 통해 하드웨어 기기와 기능의 분리를 이뤄냈다. 새로운 기능은 앱스토어에서 바로 다운받아 내가 필요한 기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하드웨어의 업데이트도 기기 변경 없이 바로 다운받아 성능 개선이 가능하도록 설계돼 있다. 즉 기능과 성능이 하드웨어에 의존적이지 않고 소프트웨어로 모든 것을 구현하게 만든 것을 소프트웨어 중심적 설계 혹은 ‘Software-Defined X’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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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이후 이런 소프트웨어 기반의 설계로 시장 판도를 바꾼 기업이 바로 테슬라다. 기존 자동차의 기능이나 성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 부품을 교체하고 하드웨어 구동을 위한 전자장비도 업데이트해야 했다. 그리고 업데이트된 전자장비의 소프트웨어를 다른 부품의 소프트웨어와 문제없이 연동하기 위해서는 전체 전자장비와 소프트웨어의 통합이 필요했다. 즉 작은 기능 하나를 추가하려 해도 자동차 하드웨어 설치부터 소프트웨어 업데이트까지 다 새로 해야 했다.

하지만 테슬라는 자동차를 마치 스마트폰처럼 소프트웨어로 다양한 기능을 바로 업데이트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테슬라의 자율주행 기능도 소프트웨어 구독형으로 서비스된다. 마치 스마트폰의 앱처럼 다양한 기능을 실시간으로 다운받아 설치할 수 있다. 이런 차량을 소프트웨어 기반의 차량(Software-Defined Vehicle, SDV)이라 부른다. 이와 유사한 개념이 공장에까지 확대 적용된 게 바로 소프트웨어 기반의 공장(Software-Defined Factory, SDF)이다. SDF의 경우 운영 시스템이 하드웨어 설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기능과 성능이 신속히 쉽게 업데이트될 수 있다.

SDF를 구축하면 무엇이 더 나아질까? 공장 제조 IT 시스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MES(제조실행시스템, Manufacturing Execution System)에서부터 변화가 생길 수 있다. MES란 생산 계획과 실행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현장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해 인공지능과 설비 사이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시스템인데 아직까지는 설비, 장비, 로봇 등에 의존적이다. 즉 공장 설비가 추가되거나 바뀔 때마다 MES도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공장이 증축되고 확장될 경우 MES의 시스템 전체를 바꿔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수시로 변화하는 시장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SDF는 기계, 장비, 설비, 로봇, 자동화 시스템의 내부 소프트웨어 구조를 표준화한다. 이렇게 SDF를 구축하면 공장 기능도 마치 앱스토어에서 업데이트하듯이 유연하게 변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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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SDF의 가장 중요한 축이 바로 디지털 트윈이다. SDF를 구축하려면 공장 내 자산(Asset)인 기계, 장비, 설비, 로봇, 자동화 시스템을 모두 디지털화해 디지털 자산(Digital Asset)으로 만든 뒤 데이터의 흐름, 로직의 구현, 운영 프로세스까지 디지털 트윈으로 관리해야 한다. 즉 대부분의 업무는 디지털 트윈을 통해 수행되고 디지털 트윈에서 검증되고 효용이 입증된 기능과 의사결정이 실물 공장에 적용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디지털 트윈의 개념과 구성 요소, 제조업에서의 활용 영역에 대해 살펴봤다. 최근 국내 제조기업들은 미국과 유럽에 대규모 제조 설비 투자를 진행 중이다. 하지만 해외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로 공장의 핵심 운영을 국내에서 원격으로 수행하는 방안을 고민 중에 있다. 더 나아가 사람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무인 공장, 자율 공장의 구현도 고려하고 있다. 미래 공장은 사람이 직접 공장에서 근무하지 않고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디지털 트윈 가상 공장을 통해 근무하는 SDF가 될 것이다. 최근 디지털 트윈 공장에 대한 투자가 증대되고 있는 이유다.

기술 혁신의 흐름을 살펴보더라도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1990년대까지의 기술 혁신은 주로 원자(atom)로 대변되는 물리적인 시스템의 혁신이었다. 자동차, 비행기, 도로, 빌딩, 선박 등의 기술 발전이 이에 해당한다. 1990년대 이후의 기술 혁신은 비트(bit)로 대변되는 정보통신이 주도했다. 인터넷, 데이터, 통신 등이 우리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2000년대 이후에는 물리와 정보가 결합되고 물리적 시스템이 가상화되는 기술 혁신이 진행 중이다. 물리와 정보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디지털 트윈이다. 그리고 이렇게 디지털 트윈과 인공지능의 만남이 촉발하는 기술 혁신은 제조업의 새로운 미래를 열고 글로벌 경쟁의 승자를 결정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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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트윈 제조 활용의 유의점


1. 디지털 트윈 구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물자산의 표준화 작업이다.

컨테이너가 물류 혁명을 일으켰듯 디지털 트윈 구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정보의 표준화된 틀을 만드는 것이다. 과거 부두마다 제각각이던 물류 운영 방식이 표준화된 컨테이너의 도입으로 급변했듯이 디지털 트윈에서도 공장의 실물자산(Asset) 정보를 등록하는 표준 정보 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는 자산의 정적 정보뿐만 아니라 센서 등에서 생성되는 동적 정보의 수집과 저장 방식까지 포함한다. 이러한 표준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디지털 트윈 구축 과정에서 관련 주체 간 소통이 어려워지고 데이터 정형화 작업에도 과도한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실제로 이 작업이 전체 프로젝트 시간의 80%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표준화에 대한 기업 내 합의 없이 임의로 디지털 트윈을 구축하면 프로젝트마다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야 하는 비효율이 발생하고 기존 시스템과의 시너지 창출이 어려워질 수 있다. 독일 인더스트리 4.0의 AAS(Asset Administration Shell) 같이 글로벌로 통용되는 표준도 있지만 특정 표준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기업의 상황에 맞게 표준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정보가 표준화될 때 디지털 트윈은 더욱 효과적으로 구축되고 활용되면서 기업의 디지털 혁신을 견인할 수 있다.


2. 3D 그래픽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핵심은 아니다. 로직 시뮬레이션은 필수 기술이다.

최근 3D 그래픽 기술의 발전으로 디지털 트윈 구축 시 실물에 가까운 시각화가 가능해졌다. 게임 개발용 3D 도구도 제조업 디지털 트윈 구축에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트윈의 목적에 따라 3D 그래픽의 용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보여주기’ 시스템으로 전락할 수 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예로 들어보자. 내비게이션의 핵심 기능인 실시간 최적 경로 제안은 3D 그래픽과 무관하다. 복잡한 교차로에서 운전자의 경로 인식을 돕는 정도로 제한적인 경우에만 필요하다. 제조도 마찬가지다. 로봇의 동선 확인 등에 3D 그래픽이 유용할 수 있지만 과도한 사용은 컴퓨팅 리소스의 과부하를 초래할 수 있다. 오히려 디지털 트윈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산사건 시뮬레이션(Discrete Event Simulation)i 기술이다. 공장 스케줄링, 재고 관리, 인력 배치, 장비 유지보수 계획 등 공장 운영의 핵심 의사결정은 3D 그래픽이 아닌 논리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효과적인 디지털 트윈 구축을 위해서는 명확한 목적 정의, 3D 그래픽의 적절한 활용, 이산사건 시뮬레이션 기술의 효과적 구현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그래야 시각적 효과와 실질적 가치 창출 사이의 최적점을 찾고 디지털 트윈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3. 실물 공장을 100% 똑같이 구현하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이다. 디지털 트윈 구축의 핵심은 암암리, 짬짬이 이뤄지는 업무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디지털 트윈 구축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실제 시스템과 최대한 유사하게 구현하려는 욕심이다. 이는 시뮬레이션 기술의 핵심과 디지털 트윈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공장 운영에는 작업자의 임의적 규칙 적용, 데이터 누락 및 오류, 임기응변식 업무 처리 등 시뮬레이션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디지털 트윈 구현 시에는 명시적인 규칙, 표준화된 데이터 수집 방식, 작업자의 임의 작업 배제 등을 전제해야 한다. 이렇게 이상적 상황을 가정해 모델링한 디지털 트윈은 실제와 당연히 차이가 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디지털 트윈의 핵심 목적인 암묵적 운영 방식을 명시화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즉 디지털 트윈과 실제 공장 운영 간의 차이는 공장 운영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지표로서 가치가 있다. 디지털 트윈은 불안정한 공장 운영의 원인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도구로 활용돼야 한다. 결국 디지털 트윈의 진정한 가치는 불안정한 공장 운영을 그대로 모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상적 운영 모델을 제시하고 실제 공장의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

  • 장영재

    장영재yjang@kaist.ac.kr

    KAIST 산업및시스템공학과 교수

    장영재 교수는 미국 보스턴대 우주항공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기계공학, MIT 경영대학원(슬론스쿨)에서 경영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MIT 기계공학과에서 불확실성을 고려한 생산운영 방식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테크놀로지 본사 기획실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근무하면서 과학적 방식을 적용한 원가 절감 및 전략적 의사결정 업무를 담당했다. 2020년 KAIST 연구소 기업인 ‘다임리서치’를 창업해 인공지능과 디지털 트윈 등의 혁신 기술을 제조 현장에 적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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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김윤진truth311@donga.com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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