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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 Cases in Books

숫자로 경영한 ‘CEO 이순신’

서진영 | 160호 (2014년 9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HR

‘경영자’ 이순신의 면모

1. 숫자로 경영했다. 평소 군량미와 화약, 총통 등의 수량을 철저하게 파악해서 중·장기 대책을 세웠다.

 

2. 필요한 물품을 직접 생산했다. 군수품을 직접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도 백성이 자립하도록 일자리까지 만들었다.

 

3. 자신의 명성과 거북선 등 브랜드 파워를 적절히 활용했다. 적군을 공포와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선 수군의 위세를 다소 과장하는입소문 마케팅을 구사했다.

 

4. 혁신적인 무기를 개발했다. 적군의 강점을 철저히 분석해서 백병전에 강한 일본군이 아군의 배에 오르지 못하도록 쇠못을 설치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순신은 경영자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외치던 영화명량도 못 봤는가? 이순신은 해군 제독이다. 아니다. 이순신은 경영자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자신이 경영자라고 여러 번 밝히고 있다.

 

‘수륙으로 적을 토벌해야 함이 모두 다 급한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 의논이 분분하여 수군에 대한 온갖 방책이 열 가지 중 하나도 실시되는 것이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뒤 수년 동안 온갖 것을 경영(經營)하며 한결같이 품은 소원이 그만 허사가 될 형편입니다.’

(연해안의 군병·군량·병기를 수군에 전속시켜 주기를 청하는 계본, 1593년 윤 1117)

 

‘국가의 위태로움이 극도에 이른 이때 해전에 관한 일은 방책을 세울 길이 없어 위로는전선을 많이 만들라는 임금의 명령을 어기게 되고, 아래로는 신이 해를 두고 경영해 오던 뜻 (經營之志)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군량과 무기 등을 옮겨가지 말도록 명령해 주기를 청하는 달본, 1593 1229)

 

이순신은 경영자다. 겉은 장군이었지만 속은 경영자였다. ‘경영자이순신의 사례를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박종평 지음, 스타북스, 2011)>에서 회계, 생산,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보여주는 전문가의 면모를 살펴보자.

 

 

 

마흔 살에 깨달은 이순신의 힘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

박종평 지음, 스타북스, 2011

 

회계전문가의 면모

경영 그루 피터 드러커는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되지 않는다며 추측이나 감각이 아니라 객관적 숫자를 이용해 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은 숫자다. 수입과 지출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 사업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그래서 매일매일 파악해야 할 숫자 꾸러미를 기록한 회계 장부를 영어로는 ‘Journal(일계장)’이라고 한다. 경영자 이순신은 무엇보다 회계에 철저했다. <난중일기>에도 회계장부와 같은 역할을 한 내용이 남아 있다. 이순신은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인 55포의 재무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에 맞춰 예산을 짜고 재원을 확보했다.

 

그가 회계를 얼마만큼 철저히 관리했는지는 체포돼 압송될 때 단적으로 증명된다. 조선시대의 관료들도 이취임 시에는 회계 상태를 기록한 문서를 철저하게 인수인계했다. 이 문서가 해유문서(解由文書). 관료의 회계부정은 엄격하게 처리돼 탐장죄(貪臟罪)의 처벌을 받았고, 부정을 저지른 관리는 완전히 퇴출돼 이후 관리로 임용될 수 없었으며, 자식의 관료 진출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순신이 해임될 때 수군을 거느리고 가덕 앞바다에 출전 중이었다. 그는 체포 명령을 듣고 본진으로 돌아와 진중의 비품을 계산해 원균에게 인계했다. 군량미 9914, 화약 4000, 총통은 각 전선에 실어 놓은 것 외에 300자루였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다른 물품도 모두 계산해서 원균에게 넘겼다. 이순신은 갑작스런 파직과 압송 명령에도 신속하게 진중의 해유문서를 작성해 인계했다. 이는 평시 자신이 보유한 자산을 매일 파악하고 확인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특히 그는 군량과 화약, 총통에 대해서는 진중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 인계받은 사람이 혼동하지 않도록 했다. 또 관리자들이 수량을 속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순신은 항상 숫자를 파악해 군량미 부족에 대비했고 백성을 구휼했으며 전투 장비를 확보했다. 그는 회식을 할 때도 인원을 정확히 파악해 기록했고 각종 사역에 투입되는 인원도 항상 정확하게 파악해 일기에 기록했다.

 

1594 124. 아침에 산역(山役)하는 일로 목수 41명을 송득일이 거느리고 갔다.

 

1594 43. 오늘 여제를 지냈다.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 1080동이를 먹였다. 우수사

와 충청 수사도 같이 앉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1595 92. 재목을 끌어내릴 군사 1283명에게 밥을 먹이고서 끌어내리게 했다.

 

1596 1011일 일기 이후 메모 글.

109일 진무성이 청어 4300두름을 싣고 왔다.

 

이순신이 숫자를 항상 점검하지 않았다면 새로 전선을 제조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아 군량을 사오는 노력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항상 재원 부족과 응급조치에 매달렸을 것이다. 평상시 철저한 회계 관리, 인력 관리 등이 단기적인 조치는 물론 중장기적인 각종 대책 수립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됐다. 이순신의 경영은 숫자경영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회계전문가였다. 우리는 숫자를 제대로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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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진영

    서진영sirh@centerworld.com

    - (현) 자의누리경영연구원(Centerworld Corp.) 대표
    -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경영 서평 사이트(www.CWPC.org)운영 - OBS 경인TV ‘서진영 박사의 CEO와 책’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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