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IBS Case Study - 상하이차의 쌍용차 인수 및 실패
편집자주
이 글은 중국유럽국제경영대학원(CEIBS)의 케이스스터디 ‘Shanghai Automotive and Ssangyong Motor - A Tale of Two Dragons (C)’(Asian Case Research Junrnal Vol.16,No.02)를 발췌 번역한 것입니다.
본문
2008년이 끝나고 새해가 며칠 남지 않은 연말의 어느 날. 2007년 11월부터 SAIC(Shanghai Auto motive Industry Corporation)의 국제 비즈니스를 책임져 온 장하이타오(張海濤)1 는 인삼차를 홀짝이며 고통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을 돌이켜봤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장하이타오는 쌍용자동차의 공동 CEO에서 지금의 자리로 승진했고 쌍용차가 흑자전환에 성공하면서 한 해를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2007년 쌍용차는 흑자전환을 자축하며 7185명에 이르는 모든 직원들에게 특별 보너스로 100만 원을 지급했다.2 쌍용차 경영진은 자사가 그해 여름에 노조와의 충돌 없이 임금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낸 한국의 유일한 자동차 회사라며 자축하기도 했다. 무려 7주 동안 지속된 노조 파업으로 3억 달러어치의 자동차를 생산하지 못했던 2006년의 상황과는 정반대라 할 만큼 긍정적이었다.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SUV에 치중돼 있던 포트폴리오를 다른 차종으로 확대하려는 쌍용차의 시도도 상당한 진척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쌍용차와 SAIC의 협력 개발 프로젝트에 배치받은 후 불신과 반대로 일관했던 쌍용차 엔지니어들의 태도 역시 온화해졌다.
하지만 불과 1년 후 장하이타오와 SAIC는 쌍용차에서 이전과는 매우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2008년 한 해 동안 무려 710억 원(5700만 달러)에 달하는 손실이 발생했지만 한국 정부는 쌍용차에 전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쌍용차는 손실을 메우기 위해 비용 절감 방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노조는 일자리나 임금과 관련된 어떤 손해도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 노조가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쌍용차 경영진은 급기야 2008년 12월에 지불해야 할 290억 원의 임금 지불을 유예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임금 지불 유예는 장기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SAIC가 급여와 기타 운영비를 지불할 수 있을 정도의 운전자본을 투입한다면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운전자본을 투입한다 하더라도 임시방편 이상의 역할은 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장하이타오에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옵션만이 남았다.
1) 쌍용차 채권단의 동의를 받아 워크아웃을 실시하는 방안. 단 이 방안을 실행에 옮기려면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고 노조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양보를 이끌어내야 한다.
2) 법원에 보호(법정관리)를 신청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방안. 이 방안을 택할 경우 SAIC가 경영권을 빼앗길 위험이 있다.
3) 매수자를 찾아 쌍용차 지분을 매각하는 방안.
2006년: 장기 파업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2005년 1월에 5억7200만 달러를 내고 채권단으로부터 쌍용차 지분 48.9%를 사들인 지 1년이 흐른 후 SAIC는 한국의 강성 노조를 경험했다. 2006년 7월에는 급기야 쌍용차 노조가 7주간 파업에 돌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쌍용차는 노조의 장기 파업으로 인해 약 3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국내 판매와 수출이 대폭 하락했으며 쌍용차는 설립 이후 처음으로 한국 자동차 업계 5위로 추락했다. 생산 대수 기준으로 르노삼성에도 밀리는 신세가 돼 버렸다.
극적으로 노사 간의 최종 합의가 이뤄지긴 했지만 해고할 수 있는 직원의 숫자는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최종 합의는 당시 SAIC의 국제 비즈니스 총괄 관리 및 쌍용차 감독을 맡고 있었던 필립 머터우(Phillip Murtaugh, GM에서 아시아 비즈니스 총책임자를 지낸 인물)가 쌍용차의 효율성 개선을 위해 다양한 변화를 시행하는 토대가 됐다. 머터우가 채택한 변화 방안 중 하나는 쌍용차의 핵심 공장인 평택 공장의 자동차 생산량을 10% 줄여 연간 자동차 생산 대수를 20만 대로 조정하는 것이었다.3 머터우는 경유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당시 쌍용차가 생산 중이던 SUV 모델 시장이 둔화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쌍용차가 새로운 고급 세단, 고급 SUV, 소형 SUV를 선보여야 할 때가 됐다고 선언했다.4
쌍용차의 판매 영업부도 구조조정 대상이었다. 한국 시장 내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4명의 최고위급 관리자도 교체했다. 전 GM코리아 김근탁 사장이 글로벌 판매/마케팅 책임자로 취임했다.5 2006년 한 해 동안 한국 시장 내 판매가 24% 하락하고 수출이 4% 감소했지만 쌍용차 공동 CEO 최형탁은 중요한 변화가 제대로 실시되기만 하면 2007년에는 매출이 20% 이상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6
2007년: 흑자 전환
2007년 초, 머터우는 쌍용차 장기 성장 계획을 공개했다. 머터우가 공개한 계획에 의하면 쌍용차의 목표는 2011년까지 자동차 판매 대수를 2006년 대비 3배 수준인 33만 대로 늘려 6조 원(64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SUV 생산업체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포트폴리오에 새로운 세단 모델을 추가해야만 했다. 당시 SAIC는 중국과 한국, 유럽에 있는 R&D팀과 공동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2005년에 인수한 브리티시 로버(British Rover) 75 모델 및 25 모델 플랫폼을 기반으로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SAIC는 이 플랫폼을 기반으로 최초의 자체 브랜드 로위 750(Roewe 750) 개발을 끝낸 후 2006년 10월에 중국에서 첫선을 보이기도 했다.7
2007년 중순이 되자 쌍용차는 고비를 넘긴 것처럼 보였고 다음 글에서 엿볼 수 있듯이 장하이타오(당시 SAIC의 발령으로 쌍용차의 공동 CEO를 지내고 있었다)도 꽤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약 2년 동안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누구에게든 한국팀과 중국팀의 공동 노력 덕에 쌍용차가 암흑기를 벗어나 건강하게 발전해나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신뢰와 존중으로 이뤄진 견실한 기초 덕에 우리는 협력하고 서로 힘을 모아 쌍용차를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회사로 만들 수 있게 됐다.
쌍용차가 중국에 진출할 가능성도 크다. 또한 우리는 지금 현지 생산을 통해 빠르게 성장 중인 중국 시장에 쌍용차를 참여시키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SAIC와 쌍용차는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동시에 이윤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동차를 시장에 내놓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생산 라인, 기술, 품질, 비용 구조, 가격 등 경쟁력과 관련된 모든 측면을 강화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노조와의 긴장 관계를 완화하는 것이다. 그동안 노조가 쌍용차의 발전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닌 긍정적인 원동력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중국과 한국을 넘나드는 교류를 실현하기 위해 상호 신뢰와 조화가 밑바탕이 되는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8
머터우가 SAIC를 떠나 크라이슬러(Chrysler)의 아시아-태평양 법인 책임자가 되고 란칭송(藍靑松)이 쌍용차의 신임 공동 CEO 자리에 앉은 후 장하이타오는 2007년 11월에 SAIC의 글로벌 비즈니스 총괄 책임자로 승진했다. 장하이타오는 쌍용차의 발전을 주제로 이야기하면서 SAIC와 쌍용차의 발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했다.
향후 4∼5년 내에 중국에서 생산한 자동차를 한국으로 수출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한국 소비자들은 벤츠(Benz)나 BMW 같은 고급 브랜드만 원한다. 한국 시장에서는 미국에서 수입된 자동차도 맥을 추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산 자동차가 어떻게 더 나은 결과를 낼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 5개의 플랫폼을 개발하고 한국 시장을 공략하기에 적합한 중형 자동차와 SUV를 도입하기 위한 계획을 갖고 있다. 그전까지는 오직 한국 자동차를 판매하는 데만 주력할 것이다.
쌍용차의 역할은 SAIC가 중국에서 시장점유율을 늘릴 수 있도록 돕는 데 국한돼 있지 않다. 한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우리가 마련한 장기 전략 가운데는 내년에 체어맨 W200 세단을 출시하고 매년 새로운 체어맨 모델을 하나씩 선보이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 우리는 2011년까지 쌍용차가 6조 원(64억 달러)이 넘는 판매를 달성하고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자동차 회사로 발돋움할 것으로 기대한다. 9
2008년: 악화
쌍용차가 2007년에 흑자전환에 성공하자 모든 직원들은 회사의 미래를 낙관했다. 2008년 3월, 쌍용차는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 S-클래스, BMW 7-시리즈, 아우디(Audi) A8 10 등과 경쟁하기 위해 고급 세단 체어맨 W를 출시했다. 당시 쌍용차는 한국에서 생산된 자동차 중 최고가인 1억 원(10만7000달러)의 가격을 책정했다. 2008년 4월, 공동 CEO 최형탁은 현대자동차가 판매하는 대중적인 자동차 모델 아반떼와 경쟁하기 위해 쌍용차가 오리지널 로버 디자인을 활용해 SAIC가 출시한 로위 550과 유사한 소형 자동차 모델을 한국 시장에 선보일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11
하지만 2008년 1월부터 5월까지 경유 가격이 51%, 휘발유 가격이 31% 급증하면서 쌍용차의 소형차 생산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쌍용차의 경우 디젤 SUV 차량이 전체 생산 차량의 80%를 차지했다. 경유 가격이 휘발유 가격보다 좀 더 가파르게 상승한 탓에 쌍용차는 경쟁업체들보다 한층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12 수요가 하락할 것으로 예상한 쌍용차는 디젤 엔진 SUV 모델 중 렉스턴과 액티언 생산을 중단했다. 고급 세단 시장은 고유가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하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근거로 쌍용차는 휘발유 엔진을 장착한 체어맨 W의 한국 시장 판매량이 1만3000대, 해외 수출 물량이 1만 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2008년 1분기에 총 판매가 전년 동기 대비 19% 하락했고 116억 원(1240만 달러)의 이윤을 달성한 2007년과는 대조적으로 2008년에는 340억 원(36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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