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기에 혁신 역량에 꾸준히 투자한 기업이 경기가 회복됐을 때 가장 우수한 성과를 보인다는 점은 역사가 증명해준다. 미국 화학업계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화학업계를 따라잡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시어스 백화점이 몽고메리 워드를 앞지른 게 좋은 예다. 1980년대 초 불황이 지나간 후 일본 반도체업체들이 미국 기업들을 넘어설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즈니스 환경이 열악할 때에는 중요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제는 ‘미래의 성장 기회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비용을 절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딜레마에 직면한다는 사실이다. 호황기에는 덜 유망한 프로젝트를 연기하거나 취소하는 일만으로도 단기적 생존과 장기적 번영 양쪽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불황기에는 많은 기업들이 단기 수익 창출이 가장 확실한 프로젝트에만 관심과 자원을 할당한다. 때로는 어떤 프로젝트가 자사의 핵심 비즈니스에 가장 적합할지 순식간에 결정을 내려버린다.
단기적으로는 이 방식이 현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엄격하게 우선 순위를 정하는 방식은 장래성 있는 수많은 프로젝트를 개발 초기에 중단시킬 위험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많은 프로젝트들을 포기해야만 할 수도 있다. 결국 핵심 비즈니스 이외 부문의 성장 역량이 위협받는다. 핵심 비즈니스에만 지나치게 오래 초점을 맞추면 기업의 성장 동력은 떨어진다. 특히 시장이 회복기에 접어들면 회생 발판으로 삼을 만한 토대가 완전히 부족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개방형 혁신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개방형 혁신은 전통적인 기업의 경계를 무너뜨려 지적 재산, 아이디어, 사람이 조직 내외부로 자유롭게 흘러 들어가고 나오도록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개방형 혁신 중 ‘내부 지향(outside-in) 개방형 혁신’이라고 표현하는 내부로의 흐름, 즉 사내 역량만으로는 불가능한 서비스나 상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외부인의 도움에만 비교적 많은 관심을 표했다.(▶HBR 2003년 7월 호에 실린 ‘A Better Way to Innovate’ 참조)
하지만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개방형 혁신의 외부 지향적인(inside-out) 특성이 훨씬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외부 지향 개방형 혁신이란 기업이 자사 자산이나 프로젝트 중 일부를 사외에 배치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외부 지향 개방형 혁신은 프로젝트 투자 시간 및 비용 절약, 공급업체 및 파트너와의 새로운 관계 구축, 혁신 생태계 장려, 이윤이 높은 라이선스 수입 창출에 특히 효과적이다. (▶HBR TIP 외부 지향 과정 참조)
HBR TIP 외부 지향 과정
내부 프로젝트 중 일부를 사외에 배치하면 관련된 성장 기회를 잃지 않고도 R&D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각 프로젝트는 전략적으로 가장 합당한 목적지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간다. 관리자의 역할은 이 길을 계획하는 일이다.
오랫동안 영국의 통신 시장을 선도해온 BT(과거 브리티시 텔레콤) 사례를 보자. BT는 1990년대에 세계적인 통신 서비스업체로 거듭났다. 2000년 닷컴버블 후 통신업계의 거품이 터지자, BT는 회사 자원을 정리해 초점을 다시 맞출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BT가 택한 중요한 과정은 자사에서 개발한 기술과 지적 재산을 외부로 배치하는 일이었다. BT는 2003년 이후 분사 기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 투자자들과 전략적인 파트너 관계를 형성해왔다.(▶HBR TIP 외부 지향 벤처캐피털 참조)
HBR TIP 외부 지향 벤처캐피털
벤처캐피털 업체들은 사내의 지적 재산(IP)이나 혁신 전략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거래의 원천을 찾아낼 수 있다. 불황기에는 기업들이 핵심 부문에만 초점을 맞춘다. 때문에 곧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기술이라 해도 자본 및 기업가의 전문 지식을 추가로 투입해야 한다면 이를 버리는 기업이 많다. 하지만 벤처캐피털 투자자는 전통적인 기업가들이 추구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매력적인 기술 및 전문가를 찾아내고 적합한 시장을 찾아야 한다. 특히 벤처캐피털 투자자들은 모기업과의 진정한 파트너십을 통해 이런 변화를 이뤄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직까지 숫자는 작지만 일부 벤처캐피털 투자자는 이런 외부 지향적 활동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찾고 있다. 미국 뉴저지 주에 위치한 뉴 벤처 파트너스는 이 분야의 선두업체다. 한때 루슨트의 한 사업부로 벨 연구소에 내부 벤처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던 뉴 벤처 파트너스는 2001년 루슨트에서 독립했다. 독립 후 뉴 벤처 파트너스는 루슨트, BT, 필립스, 인텔, IBM, 유니레버, 테스트라 등 다른 기업과 협력해 여러 기업을 설립했다. 인텔, 유니레버, 지멘스의 분사 기업들도 벤처캐피털 자금 지원을 받고 있다.
외부 지향적인 거래를 성사시킨 대표적인 벤처캐피털 투자 기업은 샌프란시스코의 블루프린트 벤처스(인텔의 기업 벤처캐피털 그룹을 운영했던 임원들로 구성), 뉴욕의 피쿼트 벤처스(현재 ‘퍼스트마크 캐피털’로 명칭 변경), 샌프란시스코의 생명공학 전문 투자업체 부릴 앤 컴퍼니 등이다. 이들은 지원이 없다면 시들어버릴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에 자본과 전문지식을 투입하기를 원하는 기업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애저 솔루션즈, 비더스, 사이테크닉스 등 BT에서 분사된 기업들은 BT의 고객 서비스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통신 기술 및 서비스를 생산한다. 이를 통해 BT는 자금 조달, 개발, 기술 개선 등에 대한 장기적 부담 없이 중요한 기술 및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다. BT의 최고 과학 담당자 마이크 카의 말이다. “BT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업체가 아니라 최고의 네트워크 서비스 공급업체가 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했다. 파트너와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방식 덕에 BT는 마케팅 과정에서 기술 개발에 필요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BT는 필자들이 밝혀낸 5개의 외부 지향 개방형 혁신 방안 중 2개를 몸소 실천했다. (▶HBR TIP 내부에서 외부로 혁신을 이동시켜라 참조) 필자들이 밝혀낸 5개의 외부 지향 개방형 혁신 방안은 미래 성장 기회를 지키는 동시에 현재 핵심 사업에 초점을 맞추는 데 도움을 준다.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자.
헨리 W 체스브로
- (현) UC 버클리대 하스스쿨 교수
- (현) 개방형 혁신센터장
- <오픈 비즈니스 모델(Open Business Models: How to Thrive in the New Innovation Landscape)>(하버드 경영대학원 출판부,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