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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묻고 신하가 답하다: 광해군-임숙영

“전하의 잘못을 간하는 사람을 존중하셔야…”

김준태 | 290호 (2020년 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당신은 리더가 잘못된 지시를 내렸을 때 그 책임이 리더에게 있다고 용기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선비 임숙영은 과거시험에서 광해군이 각종 현안에 대한 대책을 묻자 임금의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며, 본인이 생각하는 진짜 조정의 병폐 4가지 1) 중궁의 기강과 법도가 엄하지 않은 것 2) 언로가 열리지 않은 것 3) 공정한 도리가 행해지지 않는 것 4) 국력이 쇠퇴한 것 등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4가지 문제는 모두 임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임숙영의 답안은 조직에서 문제가 된 사안을 해결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과연 리더가 제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준다.



어느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신입사원 채용 면접에서 이렇게 물었다. “지금 우리 회사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특히 이러저러한 당면과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각자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를 내보십시오.” 그러자 어느 신입사원이 대답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CEO께서 경영을 제대로 하지 못하시니 기업이 이 모양인 것입니다. 먼저 본인의 잘못부터 반성하고 CEO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이런 말을 한 신입사원은 어떻게 될까? 그보다도 CEO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신입사원이 과연 존재할까?

1611년(광해군 3년) 조선에서 시행된 과거 최종 시험 ‘전시(殿試)’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광해군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안정시키려면 당면하고 있는 시급한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면서 좋은 인재를 등용하고 국론 분열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 공납제도를 개선해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킬 방안, 토지제도를 정비할 방안, 호적과 지도의 정리 방안 등 4가지 현안에 대한 대책을 질문했다. 그런데 임숙영(任叔英, 1576∼1623)이라는 선비는 출제된 문제와는 다른 답안을 제출한다. 그는 광해군이 언급한 일들이 시급하기는 하지만 원칙에 따라 처리하면 될 일이라며 “지금 전하께서는 나라의 진짜 큰 우환과 조정의 병폐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으셨으니 신은 전하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애오라지 덮어두기만 하고 의논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1 라고 했다.

사실 시험 문제와 상관없는 답을 쓰면 안 된다. 탈락 처리가 돼도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임숙영은 왜 다른 주제로 답안지를 채웠을까? 과거시험 낙방, 아니 이로 인한 왕의 분노를 감수하고서라도 그가 꼭 지적하고 싶었던 ‘나라의 진짜 큰 우환과 조정의 병폐’는 무엇이었을까? 임숙영은 임금이 근심하고 당장 해결해야 할 일로 ① 중궁(中宮)의 기강과 법도가 엄하지 않은 것, ②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은 것, ③ 공정한 도리가 행해지지 않는 것, ④ 국력이 쇠퇴한 것 등 4가지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4가지 문제는 모두 임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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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중궁의 기강과 법도가 엄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살펴보자. ‘중궁’은 왕비인 중전을 뜻하는 단어지만 여기서는 중전뿐 아니라 왕의 후궁들, 즉 내명부(內命婦) 전체를 가리킨다. 광해군 당시 후궁들이 왕의 총애를 믿고 사사로운 청탁을 하는 등 국정에 자주 개입했는데2 내명부의 기강을 세워 이를 엄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요즘에도 반복돼 나타나는 문제다. 회장의 부인은 회장이 아니고 대표의 아들은 대표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회장이고 대표인 것 마냥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인사에 개입하고 직원들을 마음대로 부려먹고. CEO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보니 청탁이 몰리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조직 내 공식적인 지위에 있지 않은 사람이 공적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설령 그것이 선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조직의 원칙과 절차를 무너뜨린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적(私的)인’ 것은 조직의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따라서 리더가 직접 나서서 그 싹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다음으로 언로는 임금이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다. 임금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 판단과 결정은 나라와 백성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상황을 오판하지 않고 잘못 결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왕이다. 하지만 지혜가 부족하거나 감정에 휩쓸려 나쁜 선택을 할 수 있다. 사려 깊고 똑똑해도 그의 생각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으며, 옳더라도 그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을 수 있다. 요컨대,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하고 더 나은 선택지를 고르기 위해 임금은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때 사람들의 말이 임금에게 막힘없이 전달되는 통로, 그것이 언로다.

그렇지만 당시 조정에 언로가 막혀 있다는 것이 임숙영의 진단이다. 임숙영은 광해군에게 바른말을 한 간관3 이 처벌받은 것을 거론하며 이 때문에 직언하는 것이 금기가 되고 아부하는 것이 유행이 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임금이 마음을 비우고 경청하며 뜻을 굽혀 따른다고 해도 유순하고 마음이 약한 선비들은 지레 할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바른말을 하면 노여워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 죄를 주니 강직한 신하가 아니고서야 누가 나서서 전하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 바른길을 가시라 권할 수 있겠습니까? …… 부디 전하께서는 질문하기를 좋아하고 어떤 말이든 기꺼이 경청했던 순임금을 배우십시오. 좋은 말을 들으면 그 말을 해 준 사람에게 감사하며 절을 했던 우임금처럼 전하의 잘못을 간하는 사람들을 존중하셔야 합니다.”

리더가 아무리 인품이 훌륭하고 부하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런 말 했다가 혹시라도 찍히면 어떡하지?’ ‘주제넘다고 언짢아하지 않을까?’ 하물며 리더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말, 리더의 결정을 비판하는 말을 꺼낸다?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리더가 포용력이 부족하고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사람을 가만두지 않는 성격이라면? 임숙영의 지적처럼 직언을 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고 어떻게든 리더의 뜻에 부합하고 아부하려는 예스맨들만 넘치게 될 것이다. 조직 내부의 자정 능력, 합리적 의사 결정 능력이 사라져버릴 테니 이런 조직이 잘될 턱이 없다.

다음으로 세 번째 공정한 도리. 이것은 인사(人事) 문제에 관한 것이다. 임숙영은 “관직은 크건 작건 반드시 재능에 따라 천거돼야 하며 벼슬은 높건 낮건 반드시 능력에 따라 선발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公)’이고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사(私)’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광해군 아래에선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르고 재산이 많은 사람이 출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력자들의 일가붙이, 권세가에게 빌붙은 사람들이 벼슬을 독점하는 등 인재의 선발과 등용, 인사 발령과 고과평가 등이 모두 원칙을 잃었다고 단언했다. 나라의 발전과 백성의 안녕을 위해 무엇보다도 공정하게 운영돼야 할 관직이 사사로움에 물들어 버렸으니, 이는 모두 왕의 잘못이라는 게 임숙영의 주장이다.



어떤 조직이든 그 조직이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각 직책이 최적의 적임자를 만나야 한다. 그 임무를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어야 최대의 성과를 낼 수가 있다. 아울러 그 사람을 발굴하고 등용하는 과정은 반드시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래야 임명된 사람이 정당한 권위와 힘을 발휘할 수가 있으며 조직 내부에도 정정당당하게 능력으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정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국력의 쇠퇴는 위기의식을 가지라는 말이다. 나라가 오래도록 번영하려면 어떠한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견고한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러려면 나라의 먼 장래를 생각하고 장기 계획을 세워 대비해야 하는데 지금 사람들은 작은 성과에 집착하고 한때의 이익에 연연하고 있다는 것이 임숙영의 판단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하께서는 나라가 편안하더라도 근심스러운 듯 대하고 나라가 형통하더라도 운수가 막힌 듯이 대하십시오. 나라의 살림살이가 풍족하더라도 곤궁한 듯 대하시고 성대하더라도 금방 쇠퇴할 듯이 대하십시오. 그리하여 근심해야 할 것은 근심하고, 힘써야 할 것은 힘쓰셔야 합니다.”


일찍이 공자는 ‘임사이구(臨事而懼)’, 일에 임할 때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라고 했다. 혹시나 부족한 점은 없는지, 잘못 판단한 부분은 없는지, 예상되는 리스크에 철저히 대비했는지 면밀하게 살피라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상황이 좋을수록 더 필요한 자세다. 어려울 때는 누구나 긴장하고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잘나갈 때는 자만하고 현실에 만족한다. 이럴 때 미리 준비해놓으면 보다 적은 비용으로 효과적인 위기 대응 체계를 갖출 수 있지만 ‘당장 뭐 그럴 필요가 있겠어?’ 하다가 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임숙영은 지금의 왕과 신하들은 마치 태평성대를 만난 듯 나태하고 겉으로 꾸미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며 ‘난리가 일어나기 전 위태로운 시국’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국정을 일신하지 않으면 정말로 곧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상 임숙영이 말한 ‘나라의 진짜 큰 우환과 조정의 병폐’ 4가지는 결국 최고 리더로서 왕의 책임을 환기한 것이다. 광해군이 언급한 정책들의 폐단을 해결하는 것,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임숙영이 보기에 왕이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기강을 확립하고 조정을 공정하게 운영했다면 그런 문제들은 불거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하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직언을 장려하며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로 업무를 처리했다면 그런 문제점은 이미 정책 입안 단계에서 인지되고 해결됐을 것이다.

요컨대, 어떤 조직이 위기를 겪고 있다면, 어떤 일이 잘 해결되지 않아서 구성원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다면, 그 사안 자체를 해소하는 노력과 함께 조직의 리더십이 과연 건강하게 행사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혹시 리더가 오만하게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직언에는 귀를 닫고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만 곁에 두고 있지는 않은지를 반성해야 한다. 또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조직 경영에 사사로이 개입하고 있지는 않은지, 능력이 아니라 정실 인사가 이뤄지고 있지는 않은지, 현실에 안주해 문제점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냉정하게 진단해야 한다. 이는 무엇보다 리더의 책임으로, 리더가 이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조직에서는 그 어떤 일도 이뤄지지 않는다.


필자소개 김준태 성균관대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논어와 조선왕조실록』『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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