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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 무왕, 넘치는 인재를 컨트롤하다

김영수 | 39호 (2009년 8월 Issue 2)
아버지 문왕이 닦아놓은 창업의 터전
 
지난 호(동아비즈니스리뷰 38호)에서 살펴봤던 무왕(武王)은 아버지 서백 창() 문왕(文王)의 유업을 받아 상(, 사기에는 은[]으로 기록돼 있음)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창건했다. 무왕의 아버지 문왕은 유리성(里城)에 7년이나 구금되는 등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해내는 인내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문왕은 안으로는 자신을 수양하고, 밖으로는 덕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었다.
 
그는 인재를 제대로 대우할 줄 아는 리더였다. <사기> 제4 ‘주본기’에 따르면, ‘정오가 될 때까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선비들을 만났다’고 한다. 이른바 ‘일중불가식이대사(日中不暇食以待士)’라는 유명한 고사다. 문왕은 조용히 선행을 실천했고, 제후들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에게 와서 공정한 판결을 부탁했다. 다음 일화는 그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와 예() 지역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다.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두 지역의 우두머리들은 문왕을 찾아가 중재를 부탁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주나라 경계에 들어서서 처음 본 것은 농사짓는 주나라 사람들이 하나같이 밭과 밭 사이에 난 경계 지점의 땅을 서로에게 양보하는 모습이었다. 백성들은 또 연장자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풍속도 갖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문왕을 만나봤자 자신들만 부끄러워진다며 서로 양보하고 되돌아갔다.”
 
문왕의 덕을 칭송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고,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훗날 주나라 창건의 주역이 되는 강태공을 비롯해 태전, 굉요, 산의생, 육자, 신갑 대부 등이 문왕을 추종했다. 고죽국의 왕자들인 백이와 숙제는 왕 자리도 버린 채 그에게로 왔다.
 
무왕은 아버지 문왕이 닦아놓은 훌륭한 창업의 터전 위에서 유업을 잇도록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타고났다.
 

아버지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다
 아버지 문왕이 닦아놓은 기반은 무왕에게 더없이 훌륭한 밑천이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특히 아버지 밑의 기라성 같은 인재들은 무왕을 주눅 들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강태공(姜太公)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천하의 3분의 2가 주나라에 복종하게 만든’ 계책의 대부분이 그에게서 나왔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60세가 넘는 고령이 될 때까지 자신을 알아줄 리더를 기다린 내공 깊은 인재였다.
 
신갑 대부(辛甲大夫)는 상나라의 주 임금을 섬기면서 무려 75차례나 직간(直諫)을 올렸던 꼬장꼬장한 인물이었다. 소공(召公)이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고는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해 문왕에게 소개했고, 문왕은 직접 뛰어나가 그를 맞아들였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문왕이 장자를 우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라까지 팽개치고 달려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훗날 무왕이 상나라의 주 임금을 정벌하러 나서자 “아버지 문왕의 상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은 도에 어긋난다”며 무왕의 말고삐를 잡았다. 주위에서 이들을 죽이려 하자 강태공이 말려 돌려보냈다.
 
이렇듯 문왕의 주변에는 무왕이 부담감을 느낄 정도로 특출한 인재들이 많았다. 하지만 무왕은 이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고 우대하는 절제된 리더십을 발휘해 결국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건국했다.
 
 
 
균형과 견제의 리더십을 발휘하다
 무왕의 리더십에서 우선 주목할 점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식견’이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으로 보인다. 아버지 문왕의 위패를 앞세우고 군대를 동원해 상나라 정벌에 나선 그의 출정식에는 사전 통보도, 별다른 약속도 없었다. 그런데도 무려 800명의 제후가 맹진(盟津)에 몰려들어 상나라 토벌을 외쳤다. 그런데 돌연 무왕은 한발 물러서 “아직 천명(天命)을 알 수 없다”며 군대를 철수했다. 그는 아버지의 유업을 앞세워 여론을 탐색하면서 동시에 상나라 정벌에 따른 대의명분을 확보했고, 그로부터 2년을 더 기다린 끝에 드디어 상나라를 정벌했다.
 
무왕의 리더십은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더 빛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망한 상나라의 유민들을 안심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민심이 새로운 정권에 마음을 주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이전 왕조가 아무리 포악한 정권이었다 하더라도 다수의 민심에는 관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왕은 민심의 움직임에 작용하는 ‘관성의 법칙’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나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주 임금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祿父)를 죽이지 않고 남은 유민들을 관리하는 자리에 앉혔다. 이와 함께 상나라 왕족이었던 기자(箕子)를 석방하고, 어질고 유능한 인재였지만 주 임금에게 박해받고 죽었던 상용(商容)의 마을을 표창했다. 또 주 임금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비간(比干)의 무덤을 돌보게 하여 남은 상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러면서도 무왕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상나라 유민들의 반발이나 녹보의 배반을 예방하기 위해 자신의 동생들인 관숙(管叔) 선()과 채숙(蔡叔) 탁()을 녹보를 보좌하는 자리에 배치해 실제로는 그를 감시하게 했다.
 
무왕은 강태공에 대해서는 사상보(師尙父)라는 극존칭으로 높여 부르며 국정 전반과 군사를 맡겼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동생이자 왕조 건립에 절대적인 역할을 해낸 주공(周公) 단( )을 중용해 강태공과 함께 국정을 돌보며 그를 견제하게 했다. 그런 다음 국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무왕은 강태공에게 지금의 산둥성 바닷가 지역인 제()나라를 봉지(封地)로 주어 보냈다. 또 동생 주공에게도 제나라와 국경을 접한 노()나라를 봉지로 주었지만, 주공을 봉지로 보내지 않고 중앙 정부에 남아 자신을 돕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던 강태공을 일시적으로 중앙 정부에서 떼어놓고 동생 주공의 보좌를 받아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 무왕은 최고 리더에게 요구되는 ‘균형과 견제의 리더십’을 적절하게 발휘할 줄 알았다.
 
끝없이 고민하는 리더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대업을 이룬 무왕은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그는 밤늦도록 잠도 못 자면서 ‘주나라가 정말 천명을 받아 창건된 나라인지 잘 모르겠다’며 고민했다. 상나라가 너무 무도해 절로 무너진 덕이 크다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상나라는 건국 당시 360명이나 되는 현자들이 조정에 가득 찰 정도였지만, 결국 민심을 돌리지 못해 무너졌다. 무왕은 상나라가 멸망한 원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민심을 제대로 얻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고민 끝에 그는 무기와 병사를 거둬들이고 군대를 해산했다. 그리고 다시는 무기와 군대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온 천하에 알렸다. 망한 상나라의 유민들에게 어떤 보복도 가하지 않고, 어떤 불이익도 돌아가지 않게 할 것임을 천명한 셈이다.
 
리더가 각박하면 백성들도 각박해진다. 리더가 양보를 모르면 백성들도 양보하지 않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은 무조건 윗물만 맑아야 한다는 일방적 강요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윗물이 없으면 아랫물도 없다는 말도 된다. 윗물이 될 것이냐, 아랫물이 될 것이냐 하는 선택만 있을 뿐이다. 누군들 윗물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아랫물더러 맑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물이 거꾸로 흐르지 않을 바에야…. 그래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리더로 평가받는 당 태종은 “근원이 흐리고서야 어찌 백성들에게 맑아야 한다고 큰소리를 칠 수 있겠냐”고 일갈했던 것이다. 이것이 깨어 있는 리더의 모습이다.
 
 
필자는 고대 한·중 관계사를 전공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년 동안 사마천의 <사기>에 대해 연구해오고 있으며, 2002년 외국인 최초로 중국 사마천학회의 정식 회원이 됐다. 저서로 <난세에 답하다> <사기의 인간경영법>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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