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운동 선수에게 나이는 넘기 힘든 벽이다. 골프 등 일부 종목을 제외하고 대부분 종목에서는 ‘서른 넘은 선수는 환갑을 지난 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배구 선수들의 생명은 유난히 짧다. 배구는 공중에서 움직이는 볼을 도구가 아닌 인체로 타격하는 스포츠다. 신체에 큰 부담을 주는 수직 상승 동작, 움직이는 볼을 때리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힘을 주는 몸동작, 관절에 무리가 가는 점프 후 착지 동작이 필수적이다 보니 다른 종목보다 신체에 미치는 부담이 크다. 배구계에서 노장 선수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평균 연령이 만 32세인 선수들을 이끌고 프로배구 챔피언 결정전에서 세 차례 우승을 차지한 사람이 있다. 바로 삼성화재 블루팡스 신치용 감독(54)이다. 삼성화재는 장병철(33), 석진욱(33), 손재홍(33), 최태웅(32), 신선호(31), 여오현(31) 등 핵심 선수들이 모두 서른을 훌쩍 넘겼다. “환갑이 넘은 어르신이 많아 내가 조석으로 문안을 드려야 할 정도”라는 신 감독의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신 감독은 ‘코트의 제갈공명’으로 불려왔다. 슈퍼리그 8연패를 포함해 무려 11번의 우승컵을 들어올린 명장이다. 하지만 2008∼2009 시즌이 개막할 무렵, 삼성화재의 우승을 점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승은커녕 챔피언 결정전에도 오르기 어렵다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나왔다. 주전 선수들의 나이가 많은 데다 대부분 키도 작기 때문이다.
김세진, 신진식, 김상우 등 한때 남자 배구 무적 시대를 이끌던 주역은 은퇴한 지 오래고, 젊은 피의 보강도 없었다. 키가 크고 싱싱한 선수들이 넘쳐나는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대한항공 점보스, 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 등을 넘어서기 힘들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삼성화재는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며 2년 연속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신 감독은 “남들이 나이와 체력 문제를 거론할 수는 있어도, 우리가 말하면 변명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선수들끼리 서로 신뢰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만든 게 우승 비결”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건강한 조직 문화를 만드는 사람이 좋은 지도자’라고 강조했다. 훌륭한 전략과 뛰어난 기술도 중요하지만, 선수들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건강하지 않으면 결코 달성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시즌 초만 해도 삼성화재의 우승을 점친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1라운드에서는 최약체 KEPCO34와 상무를 제외한 나머지 프로 팀에게 연패를 당했고요
솔직히 저도 올해 우승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챔피언 결정전에만 진출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해도 1라운드 때의 성적은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팀은 아닌데 말이죠.
2라운드를 앞두고 선수단과 함께 계룡산에 올랐습니다. 선수들에게 말했죠. “우리 서로 마음을 열고 새롭게 시작하자. 너희가 나이가 많은 건 나도 알고, 너희도 알고, 세상이 다 안다. 지금 와서 너희들의 힘이나 실력이 더 늘지도 않을 거고, 선수를 새로 영입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끼리 팀워크를 발휘하는 길뿐이다. 그래도 결과가 나쁘면 그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노력도 해보기 전에 나이 많고 키 작다고 우리끼리 변명하지는 말자. 배구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데 우리끼리 합심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
1라운드 때만 해도 선수단 내부에 알게 모르게 ‘이 전력으로 우리가 어떻게 또 우승을…’이라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어요. 세상에 변명거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좋은 환경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는 일은 누구든 할 수 있잖아요. 어려울 때 잘하는 사람이 진짜 강자이고, 삼성화재는 안 좋은 여건에서도 우승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팀이라는 자부심을 갖자고 독려하니 결국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회 전체가 젊은 사람들만 원하고 있습니다. 성적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감독으로서 노장 선수들을 관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듯한데요
배구는 신체 조건이 중요한 운동이기 때문에 젊고 키가 큰 선수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하지만 애정과 열정이 있다면 나이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과 연륜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노장 선수들은 젊은 선수들보다 책임감도 훨씬 뛰어납니다.
지도자는 선수들의 단점보다 장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이가 많다는 건 그만큼 경험이 풍부하다는 뜻이고, 키가 작으면 순발력이 좋아 서브와 리시브에서 강점을 지닐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