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35년 군 생활 동안 숱한 일화를 남기며 부하 병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은 군 생활 내내 군대 내부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항거한 리더로 유명하다. 사단장 시절 사단 관할 구역에 폭설이 내리면 전투모와 야전 상의, 귀마개를 하고 나가서 제설 삽을 들고 병사들과 제설 작업을 하는 등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실천했다. 야간 행동 때 단독 군장을 착용한 장교가 행렬 맨 뒤에서부터 맨 앞까지 병사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하며 함께 걷기에 누군가 했더니 전인범 사단장이었다는 일화도 있다. 사단장 시절, 장병들의 보급용 슬리퍼 품질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군수 사령관 앞에서 슬리퍼를 입에 물고 간곡히 요청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 실력으로 한미 동맹 강화에 큰 역할을 해 왔고 아프간 한국인 피랍사건 해결에도 공을 세우는 등의 업적으로 군 복무 중 총 11개의 훈장을 받은 그는 군대식 권위적 리더십을 버리는 대신 부하들이 저절로 모범을 따르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경영학의 발전은 전쟁사와 궤를 같이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영 전략이나 리더십 이론의 상당 부분은 전쟁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 일례로 전략이라는 단어는 서양 최초의 군사 사상가로 꼽히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가 『전쟁론』에서 처음 언급한 이후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리더십과 HR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여전히 많은 기업에서 활용하고 있는 계층 구조는 명령의 신속한 전달을 위해 군에서 활용하던 방식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 경영학은 군을 벤치마킹하며 발전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군은 더 이상 기업의 참고자료가 되지 못하고 있다. 기업의 발전 속도를 군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과 군대가 가진 뒤떨어진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장군들도 있다. 군 생활 내내 군대 내부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항거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이 대표적 예다. 그는 장교 임관 직후부터 숱한 일화를 만들었다. 1983년 중위 계급으로 합참의장 수행 부관을 할 때 아웅 산 테러 현장에서 중상을 입은 이기백 당시 합참의장을 구해냈고 중대장 시절 소총 사격 영점을 못 잡는 병사를 데려다가 실탄을 주고 자신은 표적지 앞에 서서 사격을 하게 해 영점을 잡게 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가 지휘봉을 잡았던 중대와 대대, 연대는 전투력 측정 평가에서 언제나 최상위권을 휩쓸었다.
워낙 특이한 행보를 많이 하다 보니 사단장 시절부터 유명했다. 사단장 시절 그는 육군 소장(투 스타)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해병대 스타일의 돌격 머리를 하고 다녔다. 과거 아웅 산 테러 때 자신의 상관인 이기백 함찹의장의 머리가 길어 상흔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을 지체한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사단장부터 훈련병까지 돌격머리 스타일을 고수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전 장군이 사단장을 맡은 부대가 이기자 부대여서 이 머리 스타일은 ‘이기자 컷’이라고 불렸다.
상급 지휘관인 군단장이나 군사령관, 심지어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부대를 방문할 때도 그는 “그 양반들이 오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냐? 청소하고 정리정돈 이런 거 한다고 병사들 고생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위병소 통과할 때 규정대로 조치하고 통과시켜라”고 지시했다.
한편 전 장군은 원어민 수준의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한미동맹 강화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지난 2013년에는 한국군과 미군의 혼성 사단인 ‘한미군 연합사단’ 창설을 주도했다. 실제 전투임무를 수행하는 한미 연합부대가 창설된 것은 1992년 한미 야전군사령부 해체 이후 처음이다. 미군이 타 국군과 사단급 연합부대를 편성한 것도 전 세계에서 처음이다. 전 장군은 이후 2013년부터 2014년 4월까지 한국군 특전사령관 겸 연합특전사령관으로 근무했는데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미군 통합특수전사령부 훈장(USSOCOM Medal)을 받기도 했다. 1994년 이 훈장이 제정된 이후 한국군이 받기는 처음이었다. 전 장군은 이외에도 군복무 내내 한 개 받기도 힘든 훈장을 자그마치 11개나 받았고 그중 미국이 외국 군에 주는 최고 공로훈장인 ‘Legion of Merit’이 3개나 포함됐다. 이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손에 꼽는 수훈이다. 2016년 퇴역 후에도 여전히 한미 동맹 강화와 군 제도 개선에 힘쓰고 있는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예비역 중장)을 DBR이 만나 기업인들에게도 혜안을 줄 수 있는 리더십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DBR이 그와 인터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 계엄 선포 사태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검찰이 1월 3일, 계엄사령관과 육군특전사령관을 구속기소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요동치는 한국 정치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임 특전사령관으로서의 소회와 ‘군인 리더십’의 역할에 대해서도 추가로 물었다.
좌충우돌 초임 장교 시절군생활을 36년동안 하셨는데, 군인이 되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는지 궁금하다.요즘은 아니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모든 남자 어린이는 한번쯤 장군을 꿈꾸고 대통령을 꿈꿨다. 나 역시 어려서부터 그런 꿈이 있었다. 특히 어렸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미국 TV 프로그램 ‘Combat!’에 나오는 샌더스 중사를 보며 군인의 꿈을 키웠고 스타트렉의 제임스 커크 선장을 보며 저런 리더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중학생 때 당시 국군의 날이 되면 도심에서 퍼레이드를 했는데 그때 군인이 멋있는 직업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군인이 되고 싶었다. 마침 당시 퍼레이드를 같이 보던 외삼촌이 “군인이 되려면 육사에 가야 한다”고 말을 해줬고 그 말을 듣자마자 육군사관학교 입학이 꿈이 됐다. 학업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겁도 많고 운동을 잘 못했다. 그래서인지 육사 입학 당시 입학 성적이 368명 중 367등이었다. 그래도 동기생 중 8명만 중장 진급을 했는데 그중 한 명이었으니 성공한 셈이다.
초임 장교 시절은 어땠나?육사를 졸업하고 제30 보병사단에 소대장으로 임관했다. 소대장 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육사 출신이니 뭐든지 잘하겠지라는 기대가 나를 힘들게 했다. 제일 먼저 받은 시련은 연대장배 소대장 복싱 대회였다. 그 당시에는 체급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싸움을 붙였다. 상대는 나보다 1년 선배고 체급이 컸다. 대충 하는 척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전 소대원이 보는 앞에서 하는 시합이었고 소대원들 사이에서는 건빵 베팅도 있었다고 했다. 나는 소대원들에게 “내가 질 게 뻔하다. 그런데 지더라도 어떻게 지는지 보여줄게”라고 멋있게 말했다. 하지만 1라운드에서 KO패를 당했다. 그 당시에는 유난히 훈련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대대전술훈련 도중, 보병 소대장이 가장 비난받아야 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소대원을 이끌고 가다가 길을 잃고 만 것이다. 그 당시에는 전기가 안 들어오는 지역도 많았고 별이 쏟아질 듯 보이던 때였다. 눈이 와서 무릎까지 쌓인 곳도 많았다. M60 기관총과 60밀리 박격포까지 들고 소대원들은 내 뒤만 따라왔다. 소대원 전체를 끌고 이리저리 헤매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부대로 복귀한 후 독신자 숙소에서 “나는 군대 체질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절망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것에 비해서 상당히 빨리 전속부관이 됐는데.소대장으로 좌충우돌하며 군에 적응하고 있던 1983년에 당시 중위였음에도 제1군단장이던 이기백 중장의 전속부관(참모장교)에 보임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행정 착오로 인해 중위로 진급한 지 1달밖에 안 된 나를 이기백 장군이 ‘고참인 줄 알고’ 뽑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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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백 장군은 나를 합동참모의장 때까지 전속부관으로 썼는데 그 결과 이후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현장에 가게 된다.
아웅 산 테러 현장에서 상관을 구하다아웅 산 테러 현장에서 상관의 목숨을 구한 일화로 유명한데.1983년 10월에 발생한 아웅 산 테러는 북한이 전두환 전 대통령 일행을 암살하려고 했던 테러 사건으로 대통령은 다행히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수행원 18명 중 17명이 죽은 끔찍한 사건이었다. 당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내 상관이던 이기백 장군이었다. 사건 당일 나는 행사장에 있다가 폭탄이 터지기 직전, 상관의 부탁으로 카메라용 배터리를 교체하러 잠시 주차장에 들렀는데 그 순간 행사장에서 폭탄이 터졌다. 당시 나는 폭발 현장에서 300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중간쯤 뛰어가는데 다들 폭발 현장에서 먼 곳으로 도망치는 게 보였다. 거꾸로 폭발 현장으로 뛰어가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사실 가면서 몇 번이나 추가 폭발이나 추가 공격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발이 안 떨어졌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연기와 화약 냄새가 가득한 곳으로 뛰어갔더니 다행히 이기백 장군이 부상만 입고 살아 계셨다. 당시 입고 있던 정복을 벗어 현장에 있던 넉가래를 이용해 임시 들것을 만들고 주변에 있던 한국인 차를 잡아타고 피를 흘리는 장군을 병원으로 모셨다. 다행히 장군을 침대에 눕힐 수 있었고 의료진에게 영어로 테러 사실과 합참의장의 상태를 설명했다. 당시 25살 때였는데 이 일이 있고 나서 인생관이 많이 변했다.
아웅 산 테러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일단 삶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전까지는 나도 다른 육사 출신 장교들처럼 어서 승진해서 별도 달고 권력을 잡고 힘을 기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눈앞에서 생사가 오가는 장면을 본 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도 참혹했던 현장이 생생한데 당시에는 ‘왜 나만 살았지?’와 같은 생각을 많이 했다. 죽고 사는 게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정립할 수 있었던 시기가 됐다. 그리고 이 시기의 경험이 이후 나의 군생활과 리더십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단 훈련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내가 폭발음을 듣고 반사적으로 폭발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훈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을 했다면 몸이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훈련받은 군인이고 장교였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몸이 폭발 현장으로 향했다. 결국 좋은 군인을 만드는 것은 전시 혹은 위급 상황에서 조건 반사적으로 옳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평소에 꾸준히 훈련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또한 사회적 소속감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실 나도 무서웠다. 뛰어 가면서도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연기가 자욱한 현장으로 뛰어 들어간 것은 내가 군인이고 장교라는 소속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소속감은 결국 내가 소속된 집단에 대한 동질감과 자랑스러움에서 나온다. 평소 내 조국이 자랑스러워야 하고 내가 속한 군대가 부끄럽지 않아야 절체절명의 순간에 목숨을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군의 리더로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을 때 크게 세 가지를 생각했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훈련시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나라가 가난하고 군에도 비리가 많다 보니 군인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지 못했다. 훈련 역시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많이 진행됐다. 이런 군대에 누가 사명감을 느끼겠나. 내가 사병들의 복지에 관심이 많았던 사령관으로 불리게 된 데는 이런 사건들의 영향이 컸다. 마지막으로 결국 운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부터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다.
리더십 측면에도 영향을 미쳤나?이기백 장군은 온몸에 박힌 파편 제거 수술을 받고 붕대로 칭칭 감겨 있던 상태에서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나에게 세 가지를 물었다. “각하 괜찮으시냐?” “지금 몇 시냐?” “밥은 먹었냐?” 자신은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눈을 뜨고 제일 처음 한 말이 이것들이었던 것이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상관의 안위와 부하의 밥을 챙기고 위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짜 군인이자 진짜 리더는 저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 이 장군이 두부(頭部)에 중상을 입었는데 두발이 길어서 피와 머리카락이 응고돼 정확한 상처 부위를 찾는 데 상당히 오래 걸렸다. 이 경험 때문에 이후 나는 사단장으로 근무할 때부터 “전시 혹은 훈련 중에 두부에 상처가 생기면 두발이 짧아야 상흔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치료를 빨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내 휘하 장병들을 다 짧은 헤어 스타일을 하게 했다. 물론 나도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녔다. 남들에게 하라고 하면서 리더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생사를 오가는 큰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군에서 승승장구하게 됐다고 들었다.아무래도 상관을 살린 부관이 됐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웅 산 테러 이후 군 내부에서는 북한에 일침을 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를 반대해 이뤄지지 못했다. 사건 이후 육군본부 대회의실에서 참모총장 및 장군 400여 명이 모여서 당시 한 방송기자가 촬영한 아웅 산 테러 현장 비디오를 틀었다고 한다. 이때 이 비디오를 보고 황영시 당시 참모총장이 “민간인들은 다 도망가는데 군인은 저렇게 뛰어 들어가는 것 보이나. 저런 게 바로 ‘군인 정신’”이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후에 군단장 이상이 부관을 뽑을 때 “전인범 같은 애 데려와라”라고 지시를 할 정도였다.
이라크 다국적국 사령부에서도 근무했는데 여기서는 어떤 경험을 했나.상부의 지시로 2005년에 이라크 다국적국 사령부 선거지원과장으로 나가게 됐다. 이라크 선거는 유엔이 지원하는 이라크 독립선거위원회(IECI, Independent Electoral Commission of Iraq)에서 주관했고 이라크 내무부가 치안책임을 맡았다. 그런데 내무부의 능력이 아직 기초적이어서 다국적군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이 위원회가 바그다드 한가운데 그린 존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말이 그린 존이지 그린 타깃이었다. 하루 평균 100여 차례 크고 작은 공격이 이뤄지고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심지어 위원회에 미군 중령 두 명, 영국군 중령 한 명, 미군 소령 두 명, 호주 해군 소령 한 명, 영국군 소령 한 명, 미군 대위 서너 명이 있었는데 내가 대령으로 이들을 통솔해야 했다. 가자마자 겪게 된 과제는 사무실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내가 계급이 가장 높았지만 처음 갔을 때 분위기는 대충 허수아비 선거지원과장 하나 두고 미군들이 알아서 좌지우지하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3500t이 넘는 선거 물자를 5400개 소의 투표소에 이동시키고 이들 투표소에 대한 경계 제공, 지휘통제 기구 설치, 상황실 운영 등을 지원했다. 또한 선거지원실 직원들의 월급을 줘야 하는데 이라크에 인터넷뱅킹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더플백에 독립선거위원회 소속 근무자들 봉급 3400만 달러를 넣고 무장을 한 채 직접 돌아다니며 월급을 주기도 했다.
한미 동맹 강화에 큰 힘을 보태 훈장도 많이 받았는데 타국의 군인들과 어떻게 협업을 원활히 할 수 있었나?어머니가 외교관이셔서 미국 뉴욕에서 7살 때부터 3년 반 정도 살았다. 그 덕에 영어를 잘하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소령을 달고 나서 30살에 미국에 갈 일이 생겼다. 미얀마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지 고민하던 시기였다. 당시 미국에 가서 미군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은 한미 동맹의 역사에 비해 미군들이 한국을 너무 모른다는 점이었다. 기본적으로 한국에 대해 잘 모르니 미군이 한국군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한미 관계를 올바르게 발전시키는 데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미국인들이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고 신뢰를 쌓았다. 특히 소령 때는 미군들을 집에 불러 불고기, 잡채 등을 많이 해 먹였다. 거의 주말마다 집으로 초대해 밥을 해 먹이면서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이후 계급이 올라갈수록 사실 단순히 친분을 쌓기는 쉽지 않았다. 각자 국가 간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한국과 미국은 동맹 관계이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부분도 상당하다. 장군이 된 후에는 미군 장교들이 자기네 장군보다 나를 더 인간적으로 좋아했다.
어느 부대든 결국 리더는 빠른 의사결정을 내려주고 책임을 져주면 된다. 나는 항상 “그거 해. 내가 책임질게”라고 정확히 말해줬다. 그래서 미군들도 나를 잘 따랐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과 미국 간 협상이나 협업 시 나에게 부탁을 해오는 장군들이 많아졌다. 주한미군을 비롯해 미군들이 나를 ‘한미 연합사단의 아버지’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다.
특전사령관 재임 시절, 전투력 강화와 복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는데.결국 군인은 전시에 잘 싸워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평시에 훈련을 잘해야 한다. 나는 군인에게는 훈련이 최고의 복지라고 생각한다. 힘든 훈련이 어떻게 복지가 될 수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건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나 같은 직업군인은 전쟁이 언제든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리더로서 내가 생각해야 하는 건 전시에 어떻게 내 부하 장병들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을까다. 그리고 그 해답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훈련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 제대로 된 장비나 보급품 지원도 안 해주면서 계속 훈련만 강도 높게 시키면 당연히 불만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군생활 동안 가장 신경 쓴 것이 바로 훈련을 잘 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훈련은 힘들게 받지만 잘 먹고 잘 입히고 끝나면 확실한 휴식을 보장했다. 유명한 사례 중 하나로 27사단장 시절에 부대를 방문한 군수사령관 앞에서 당시 질이 좋지 않았던 슬리퍼를 새 모델로 바꿔준다고 약속할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라며 입에 슬리퍼를 물고 서서 시위를 벌였던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소장이었고 군수사령관은 중장이었는데 이 일로 부대 슬리퍼가 바뀌었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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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적지 후방 및 중심에서 팀 단위로 작전을 펴는 특전사의 임무 특성상 몇 배의 병력에게 포위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러한 고위력 화기는 포위망을 뚫고 적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대단히 유용하다. 하지만 당시 특전사에는 인가된 장비 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국방부 등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찾아다니며 특전사가 특전사답게 싸울 수 있도록 무기와 장비를 지급해 달라고 읍소하고 다녔다. 당연히 반발이 거셌다. 부대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었고 육군 본부와도 불편한 관계가 됐다. 하지만 정무적 판단에 앞서 옳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 방탄복과 전술조끼, 헬멧과 통신기는 물론 각종 총기와 부가 장비들이 도입됐다.
리더십은 믿음과 신뢰에서 나온다군인임에도 규칙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규칙을 유연하게 적용할 때 중요한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나에게 있어 의사결정의 원칙은 ‘Choose what is right, Do what is good’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해석하면 ‘옳은 것을 선택하고 선한 일을 실행하라’다. 나는 평생 원칙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실 그 원칙이라는 것도 기본적으로 그 취지를 잘 알아서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 요즘 무슨 일만 있으면 ‘법대로 하자’고 하는데 법이나 규칙도 중요하지만 그 바탕에 취지를 잘 알아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좋은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일례로 1994년 대대장 업무를 맡을 때 대대원은 500명에 달했는데 공중전화기는 부대 내 1대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병장들이 공중전화를 독점하고 30분씩 통화를 하고 이등병들은 공중전화를 써보지도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전화기를 부대 내 5대 더 놓자고 건의했다. 당연히 규정이 어쩌니, 기준이 어쩌니 하면서 안 된다고 했다. 특히 군에서는 공중전화를 놔줄 수 없는 이유로 ‘보안’을 들었다. 하지만 내가 밀어붙였다. 보안은 교육을 통해 해결하면 된다고 설득하고 공중전화 5대를 보일러실, PX 등에 설치하면 군대 내 가혹 행위나 구타, 괴롭힘 등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만 해도 군 내에 가혹행위나 괴롭힘이 많았는데 이런 행위가 주로 보일러실 등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이뤄진다. 그런데 이런 곳에 공중전화를 설치하니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군대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눈이 오면 부하들과 함께 제설 작업을 하고 부하들이 제대할 때 부하들에게 수고했다고 먼저 경례를 하는 모습 등으로 유명했는데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내가 사단장 때 전역하는 병사들에게 ‘군대에서 뭘 배웠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삽질하는 걸 배웠다’고 답을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 밑에서 군 생활을 하느라 고생 많았는데 특별히 해줄 건 없고 투스타 경례나 받고 가라’며 ‘이기자’라는 사단 경례 구호와 함께 경례를 한 것이다. 내게 경례를 받은 병사들 중 사회에서 군대 이야기를 할 때 ‘난 장군에게 경례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지 않겠나. 군대에서 고생한 병사들에게 술자리에서 군 생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준 셈이어서 뿌듯하다. 사실 우리 사병들이 자의로 군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이들에게 최소한 군에 대한 좋은 기억 하나 남겨줄 수 있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또 한 가지는 한국 사회에서 카리스마에 대한 정의가 잘못 내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카리스마는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면 왠지 존경스럽고 따르고 싶고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힘이나 매력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과거부터 뭔가 독불장군 같고 포악한 사람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는 표현을 많이 했다. 내가 군생활을 시작하던 시기에는 어깨 위에 있는 별이나 명함의 직함으로 그것이 권위이고 그 권위로 인해 사람들이 따라오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기가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고 솔선수범해 모범을 보여야 한다. 자기가 하기 싫고 안 하는 것을 남에게 시키면서 자기는 책상에 앉아서 지시만 하는 리더는 카리스마가 생길 리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사람을 믿고 따르게 돼 있다. 리더십의 핵심은 믿음이고 부하들은 자기가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리더를 믿고 따른다. 사회에서 성공하고 사업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손익이 아닌 믿음을 따지는 사람이다. 눈앞에 있는 이득만을 바라보고 이를 취하려는 사람은 큰 성공을 할 수 없다.
위계질서가 명확한 군대에서도 장군님은 항상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하셨다고 들었는데 조직문화 내에서 개개인의 목소리를 살리기 위해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하는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안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 던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내가 미군들과 오래 일하면서 느낀 점은 미군은 계급과 상관없이 스몰 토크(Small talk)를 많이 한다. 미군은 장군이 사병한테도 지나가다 만나면 “별일 없냐?” “고향 어디냐?” “어려운 것 없냐?” 등 가볍게 질문을 던진다. 한국군 장군은 어떤가. 목에 힘주고 거드름 피우면서 걷는다. 먼저 대화를 걸지도 않는다. 장군한테 사병이나 부하가 먼저 말을 걸 수 있나? 일단 이런 자세부터 잘못됐다. 한국의 리더십은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게 많다. 사람들이 아직도 권위와 권위주의적인 것을 구분을 못한다. 너무나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처럼 되고 싶고, 따라 하고 싶고, 사랑하고, 그래서 그림자도 안 밟으려고 하는 것이 진정한 권위인데 권위주의는 지나고 나면 욕만 남는다. 진짜 권위를 갖고 싶으면 권위를 버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최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감춰둔 속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자! 우리 이야기해 봅시다”라고 한다고 부하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하기 어려운 혹은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게 해야 한다. 부하가 하기 어렵고 하지 않으려는 이야기를 하게 하는 방법은 하나다. 내가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수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사소한 것이라도 듣고 나면 액션을 취해야 한다. 부하가 부당함을 이야기하거나 개선을 요청했을 때 수용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어떤 노력을 했고, 왜 안 되는지 등이라도 설명을 해주는 것이 좋다.
시국이 이렇다 보니 12·3 비상계엄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전 특전사령관으로서 느낀 점이 남다를 듯한데.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군을 이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치로 풀어야 할 문제에 군을 끌어들이는 것은 위헌이고 불법이다. 안 그래도 ‘계엄’ 하면 특전사가 언급됐는데 이번에도 특전사 대원들이 투입된 것을 보며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스러운 건 우리 군이 정치에 맹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군의 본분인 ‘국민에게 총부리를 대면 절대 안 된다’는 의식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번 계엄은 불법적인 데다 준비도 엉성해서 자칫 큰 사고가 날 수 있었다. 군인들의 총을 탈취하려고 하거나 군인들에게 소화기를 뿌리며 자극을 하던 장면을 보니 아찔한 생각까지 들었다. 다행히 누구도 다치지 않고 끝나서 천만다행이다. 특히 12·3 비상계엄 당시 국회에 투입된 707 특수임무단은 원래 대테러 부대다. 707부대는 일반 사단 특공대 대비 사격량이 3~4배에 달하고 매일 8시간 고강도 훈련을 받는 최정예 부대다. 이런 최정예 부대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으니 부대원들과 예비역들의 실망감이 대단할 것이다.
군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군인은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런데 부당한 명령이 내려질 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나는 사령관 시절부터 ‘군인은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 다만 합법적인 명령만 따라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특히 계급이 올라갈수록 명령이 합당한지 늘 따져야 한다. 불법적인 명령을 따른 뒤 문제가 되자 ‘나는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군인에게 유죄를 선고한 대법원 판례도 알려줬다. 하지만 명령의 부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대령 이상 리더들의 역할이다. 사병이나 경험이 많지 않은 간부 군인에게는 여전히 복종이 미덕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험이 많고 판단을 내릴 정도의 전문성이 있는 군인이라면 부당한 명령이라면 거부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부하들을 보호하는 리더십의 핵심이다. 최정예 용사이자 나라를 지키는 자존감으로 청춘을 바치고 있는 대원들이 자칫 민간인을 해치는 상황에 놓일 뻔했으니 얼마나 아찔한가. 이들이 향후 평생 회한 속에 살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참 리더의 역할이란 뜻이다.
전역 후에도 유튜브를 통해 여전히 군인의 역할 등과 관련된 조언을 하고 계신데 이런 노력을 하는 이유가 있나.군인들의 처우 개선이나 군에서 느꼈던 불합리한 규정들을 해결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데 그 노력의 일환으로 유튜브를 하게 됐다. 벌써 구독자가 8만 명에 이른다. 또 2023년 전 세계 122개 지부, 10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린 미육군협회(AUSA, Association of the United States Army) 석좌위원(Senior fellow)으로 위촉돼 활동 중인데 석좌위원 가운데 미국인이 아닌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미 육군협회는 현역, 예비역, 그들의 가족과 군무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영리단체이지만 단순 친목 모임이 아니라 정부에 등록된 로비 단체로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군에서 겪은 특별한 경험이 이러한 활동을 통해 국가와 후배 군인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한다.